<140화>
쏟아지는 햇살과 바람 한 점 없는 쨍한 여름이었다. 황도의 더위는 절정이라더니 정말이었다.
벨슈타인에서 느낀 여름은 이곳에 비하면 십 분의 일도 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숨이 턱턱 막히는구나. 더 시원한 드레스로 갈아입자.”
솔리아페와 루시엘이 입은 것도 반소매 드레스였지만 벨슈타인에는 얇은 원단이 아무래도 다양하진 않았다.
“제가 시원하게 해 드릴게요.”
루시엘이 가볍게 마나를 끌어모아 윈드 주문을 외웠다.
슈우우.
곧 마차 안으로 루시엘이 소환한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그러자 라리에트의 눈이 반짝 떠졌다.
“어머, 루시엘은 마법도 할 줄 아는구나.”
“할아버지께 배웠어요.”
“아아, 길리아트 각하께? 헉, 그분은 아무에게나 가르쳐 주지 않는다던데.”
“우리 루시엘이 아무는 아니지. 이 아인 마법에 재능이 있거든.”
솔리아페가 자랑스러워하며 루시엘의 머리를 쓰다듬자, 라리에트―세리안 백작 부인의 이름―의 칭찬이 또 마구 쏟아져서 루시엘은 민망해 작게 웃었다.
그사이 마차는 다각거리며 샤를로테 거리에 도착했다. 샤를로테 거리의 입구는 여름 맞이 할인을 홍보하는 푯말들이 매달려 있었다.
황도의 가장 유명한 시내답게 활기가 가득하고 볼거리가 많았다.
알록달록한 디저트와 베이커리들, 저택만큼이나 웅장하고 고급스러운 레스토랑과 잡화점, 귀금속 가게에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물건들이 손님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루시엘은 잠시 달콤한 디저트에 시선을 빼앗겼으나, 이내 솔리아페의 말을 듣고는 걸음을 총총 옮겼다.
“어서 드레스부터 갈아입자. 플로린 부티크의 옷들 말고 다른 곳도 예약했거든. 로즈, 그곳이 어디였더라?”
“네, 새로 오픈한 베아트리체 오트쿠튀르요. 완벽하게 예약해 두었어요. 그리로 모실게요!”
시녀들과 호위 기사를 제치고 앞장선 로즈는 어쩐지 신이 난 듯해 보였다. 도착한 가게는 마치 작은 사교 파티를 연상하게 할 정도로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선 가게였다.
가게 앞에 들어서자 길게 서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루시엘 일행에게 쏠렸다.
세리안 백작가와 벨슈타인 공작가의 호위와 시녀들만 해도 십여 명이나 되었기에 규모가 꽤 큰 일행이었다.
거기다 외부 활동을 잘 하지 않는 공작 부인 솔리아페와 아르테의 장미라 일컬어지는 세리안 백작 부인, 눈토끼처럼 귀엽다는 공자비의 모습까지 보이자 세간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잠깐만요, 벨슈타인 공작가잖아요? 어쩜 공작 부인은 더 젊고 생기가 가득해진 듯해요.”
“세리안 백작 부인이 동생이잖아요. 자매 모두 미모가……! 거기다가 공자비까지 눈토끼처럼 사랑스럽네요.”
“벨슈타인의 지난 피로연이 그렇게 화려했다지요?”
“네, 저도 들은 이야기인데 황성에 버금갈 만큼 성대하고 아름다웠다는데요. 언젠가 한번 꼭 가 보고 싶어요.”
들려오는 사람들의 긍정적인 평가에 루시엘은 괜히 뿌듯해졌다.
오트쿠튀르 앞에는 제각기 양산과 부채질로 더위를 피하면서 줄을 서 있는 사람들로 붐볐다. 시녀들뿐 아니라 귀족들도 직접 줄을 서는 모양이었다.
루시엘은 대기하는 손님들 사이에서 익숙한 낯을 발견했다. 아니,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묘하게 자신을 쏘아보는 시선이 있었으니까.
‘페넬로페잖아……?’
페넬로페는 평소처럼 카빌 후작부인과 함께 있지 않고, 다른 귀족 여성과 있었다.
‘샤를로테의 상점들이 카빌 후작가를 이제 받아 주나?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은 거겠구나.’
루시엘은 그리 짐작하면서 페넬로페를 향해 살짝 웃어 보이고는 솔리아페의 팔짱을 꼈다.
“다음 예약 손님, 입장 도와드리겠습니다.”
예약 손님만 먼저 통과시켜 주는 입구로 점원이 나와 안내했다.
“예약하신 손님, 가문의 인장을 보여 주시면…….”
솔리아페가 벨슈타인의 검은 드래곤이 새겨진 펜던트를 슬쩍 보여 주자 점원이 깜짝 놀랐다.
“아아! 죄송합니다.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벨슈타인 공작 부인이셨군요.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행분들 모두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점원이 한층 공손하고 친절해져 흰색의 장미를 선물했다.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들과 함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콧대 높기로 유명한 베아트리체인데, 역시 벨슈타인 앞에서는 꼼짝을 못 하는군요.”
루시엘이 가게 안으로 먼저 들어서는 걸 보며 아마 페넬로페는 약이 바짝 올라 있을 듯했다.
‘표정을 못 보는 게 아쉽네.’
루시엘은 속으로 생각하며 안에 펼쳐진 오트쿠튀르의 내부를 구경했다. 겉으로 보았을 때도 제법 규모가 되었는데 안은 더 널찍했다.
일반 손님들과 다른 복도로 안내한 점원이 상냥하게 말했다.
“vvip 고객님은 이 룸을 사용하시면 된답니다. 전문 재단사와 디자이너들, 미용사들과 점원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안내한 룸은 귀족가의 응접실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푹신하고 안락한 소파와 테이블, 화장대, 전용 욕실까지 있는 곳이었다.
“어머, 여길 대기 없이 들어와 보다니. 고마워, 언니.”
라리에트가 홍조 가득한 얼굴을 감싸면서 말했다.
“여기가 그렇게 유명한가?”
솔리아페가 자그맣게 소곤거리며 묻자, 라리에트가 격하게 고갤 끄덕였다.
“황도에선 여기 모르면 간첩이야. 언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최상급 전문가들의 손길로 풀코스로 단장할 수 있는 곳이니까 여자들에겐 천국이나 다름없지. 단점은 너어무 비싸고, 예약이 어렵다는 점. vvip고객도 딱 세 가문인걸.”
“……내부는 이렇게 넓은데 줄 선 사람들은 다 들이질 않네.”
“응. 줄 서도 다 들어올 수 없어. 쾌적함을 위해서 내부에 받는 고객의 수를 두 자릿수로 한정하니까.”
“비효율적이군.”
“아까 다른 귀족들의 부러워하는 시선들 못 봤어, 언니? 아, 마셰리 백작 부인이 어찌나 우릴 대놓고 쳐다보던지. 짜릿해!”
“…….”
가장 함박웃음을 지은 채 호들갑을 떠는 사람은 바로 라리에트였다.
솔리아페는 심드렁한 표정이었고, 루시엘은 뭔가 엄청난 세계에 발을 들인 것 같았다.
곧 웰컴 티와 핑거푸드를 가져다주면서 한 사람당 담당 인원들이 배치되었고 본격적인 단장이 시작되었다.
세 시간 후.
오늘 받은 것에 비하면 벨슈타인에서 한 건 관리 축에도 끼지 못했다. 세 가지 종류의 마사지와 피부 관리를 받았고 이제 머리를 하는 중이었다.
‘예뻐지는 것도 힘들구나.’
그래도 솔리아페와 나란히 누워서 오순도순 관리를 받으니 기분이 좋긴 했다.
루시엘은 거의 새롭게 탈피한 듯 맑아진 피부를 거울로 살펴보았다.
보드라운 은발은 영양과 손질을 해서 웨이브를 위해, 동그랗게 말아 놓은 상태였다.
어른들은 관리가 더 남았다고 해 일찍 끝난 루시엘은 로즈와 함께 룸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쉬는 중이었다.
“아가 마님, 지루하시죠? 먼저 드레스를 고르고 있을까요?”
“응, 그게 좋겠어.”
루시엘은 로즈와 함께 의상 담당 점원을 불러서 어린이 드레스가 진열된 곳으로 향했다.
루시엘은 레몬색 여름용 드레스를 골랐다. 오렌지색 리본이 깜찍하고 시원해 보였다.
“귀여우셔라. 이 드레스에 맞춘 구두를 몇 켤레 찾아올까요?”
“아, 응. 고마워, 로즈.”
“저는 액세서리를 찾아오도록 할게요.”
점원도 그리 말하며 액세서리 진열 층으로 올라갔다.
그때 루시엘의 눈에 페넬로페가 보였다. 이제 겨우 입장해 물건을 고를 수 있게 된 모양이었다.
루시엘은 페넬로페를 주시했다. 일부러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간다 했더니 페넬로페는 혼자 있는 아이에게 접근해 있었다.
아이를 밀쳐 내더니 쓰고 있는 모자를 홱 낚아채서는, 자신이 쓰며 거울에 비쳐 보았다.
“꺅! 뭐, 뭐예요?”
“다른 거 골라. 이건 내가 지난번에 찜해 둔 거야.”
“아, 아뇨. 이건 지난번에 힘들게 기다려서 샀던 물건인데……!”
“내가 저번에 여기서 보고 사려고 했는데 네가 새치기를 한 거야. 이건 한정판이라 이제 나오지도 않는다고!”
“그. 그러면 다른걸 사면 되잖아요…….”
키도 체구도 작은 아이는 점점 목소리가 쪼그라들었다.
“난 이게 마음에 드는데?”
교묘하게 점원들의 눈을 피해서 저보다 작고 만만한 아이에게 그러는 것이 보였다.
한결같이 이기적이고 유치한 페넬로페를 보고, 루시엘은 고개를 흔들면서 다가갔다.
루시엘은 윈드를 발동시켜, 페넬로페의 머리 위에 있던 모자를 슥 바람으로 날려 버렸다.
“어어? 뭐야, 갑자기 왜 바람이 부는 거야?”
“여기 있어요. 영애에게 잘 어울리네요.”
모자를 주운 루시엘이 아이에게 그것을 전해 주었다. 루시엘과 키가 비슷한 아이가 꾸벅 인사했다.
“고, 고맙습니다.”
“고…… 공자비잖아? 지금 뭐 하는 거야?”
루시엘이 뒤돌아서서 방긋 웃자 페넬로페가 부들거리면서 말했다.
“영애야말로 남의 것을 빼앗고 대체 뭐 하는 짓이죠?”
“남의 것을 빼앗다니요. 제가 이 가게에서 본 물건이라고요. 제 마음대로 물건도 고르지 못하나요?”
목을 빳빳하게 들며 페넬로페가 노려보았다. 루시엘은 가볍게 웃어 주며 말했다.
“그렇다면 새로운 상품을 골라서 금액을 지불하고 구매하면 되지 않을까요? 아, 혹시 그 소문이 사실인가요?”
루시엘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페넬로페의 얼굴을 훑어내리면서 한 발 다가섰다.
“카빌가는 샤를로테 거리에 못 들어오고, 황성에도 출입할 수 없다고 들었어요…….”
루시엘의 말에 페넬로페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오늘 외가인 닐즈 가문의 일원으로 온 것이라고요. 카빌이 아니라요.”
“……그 소문이 사실인가 보네요. 카빌 후작가가 추락했다는 소문이……. 내심 황성의 문학 살롱에서 만날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조금 안타깝군요.”
“뭐야? 이 망할 계집애가!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네 머리채를 흔들었다는 소문 때문에! 빌어먹을 벨슈타인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알아들어?”
살살 약 올리며 웃자 페넬로페가 결국 씩씩대면서 다가왔다. 그녀는 루시엘을 구석으로 몰아붙이면서 분노에 찬 얼굴로 중얼거렸다.
“문학 살롱, 반드시 갈 거니까 걱정하지 마!”
“…….”
금방 한 대칠 기세였지만 루시엘은 무섭지 않았다. 여기서 폭력을 쓰면 누구 손해일까?
“아가 마님……!”
그때 루시엘을 찾아다니던 로즈와 점원이 다가왔다. 루시엘은 으앙, 하고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트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루시엘?”
그 울음소리에 때마침 관리가 끝난 솔리아페와 라리에트마저 루시엘을 찾기 위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