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레이븐은 황자의 호화로운 침대에 벌렁 누워서 하품을 했다.
시커먼 남자 놈의 일과를 감시하는 것이 퍽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상대가 악한 놈이면 더더욱 말이지.
키제프는 귀엽고 애다운 구석이라도 있었지만…….
며칠째 지켜본 결과 레이놀드 황자는 사신인 자신조차 하루도 같이 있기 싫은 놈이었다.
레이놀드가 하는 짓들은 정상적인 범주는 아니었다.
황자의 방에는 다양한 생물들의 표본이 박제된 채 있었는데, 그 옆방에는 살아 있는 수십여 마리의 생물들이 작은 우리 안에 들어 있었다.
“끔찍하네, 진짜. 어떻게 눈뜨자마자 살생부터 저지르냐.”
잠에서 깨면 사냥터로 곧장 나간 레이놀드는 미친놈처럼 사냥을 핑계 삼아 거의 도륙을 하는 듯했다. 겁에 질린 동물들의 표정을 보면서 미소를 짓는 꼴이 역겨웠다.
특히나 약한 동물만을 골라서 사냥하고 관찰하는 아주 더러운 취미가 있었다.
‘이놈, 확실히 정상은 아니야.’
레이븐은 사냥터에 나갈 채비를 하는 황자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레이븐은 황자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수상한 것이 있는지 살폈다.
서재에는 무기와 군사, 전투, 정치, 의학, 체스, 독을 쓰는 법, 마법 실드와 흑주술에 대한 책들이 있었고, 그 옆에는 무기로 가득한 진열대가 있었다.
‘분명 루시엘의 이전 생에서 황자 놈이 푸른색 날을 가진 마검을 사용했지, 아마.’
레이븐은 기억을 짜내면서 진열된 무기를 하나하나 살폈다. 그러나 푸른색 검은 눈에 띄지 않았다.
‘하긴, 그런 중요한 검을 이런 데에 그냥 둘 리는 없는데 말이지.’
레이븐은 스스스, 검은 연기로 변해서 곧장 황자의 뒤를 따라갔다. 한바탕 사냥에 이어 사냥터의 호숫가에서 수영을 끝낸 황자가 가운만 입은 채로 보좌관을 맞이했다.
레이븐은 소파에 걸터앉은 황자의 차림을 흐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래, 그 망할 살롱에 참석하는 가문은 정해졌다던데요, 숙부.”
“예, 벨슈타인도 참석한다고 합니다.”
“그래요? 그거 아주 잘됐습니다.”
“벨슈타인과는 지난 일로 안 좋은 일이 있으셨던 것이 아닌지…….”
“그랬었지요. 다만 다시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벨슈타인에만 있다는 눈토끼 말입니다.”
황자의 눈동자가 가늘어지며 입매를 틀었다.
“눈토끼요?”
“그렇게 작고 은발을 가진 아인 처음 보았습니다.”
그제야 깨달은 듯 보좌관도 같이 허허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공자비를 이르는 말이군요. 하지만 문학 살롱은 황후 폐하께서 주최하시는 큰 사교 행사입니다. 섣불리 움직이셨다가는 안 됩니다. 게다가 클로디아 황녀가 두각을 드러내는 지금은 몸을 사리셔야 합니다.”
“내가 뭘 하겠다고 했나. 그저 보겠다는 겁니다.”
황자가 보랏빛 눈동자를 굴리자 레이븐은 진저리를 치는 얼굴로 촉각을 곤두세웠다. 보좌관이 한층 더 은밀하게 속삭였다.
“검은 장벽에 대한 정보를 조합해 마도사들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염려가 놓이는군요. 아주 잘되었습니다. 그나저나 한시라도 빨리 검을 받아 완성하고 싶은데.”
“아아…… 그래야지요.”
“그 전에 크리스털 페어리의 행방부터 다시 알아보세요. 그건 숙부께서 일을 그르치셨으니, 한시라도 빨리!”
“……예, 물론입지요.”
보좌관이 물러가는 걸 지켜보던 레이븐은 스르륵 조용히 사라졌다.
* * *
루시엘이 아기 영지의 별장에서 큼지막한 자두를 한 입 베어 물고 있을 때, 스스스 검은 연기가 나타났다.
“레이븐!”
“루시엘, 그놈 진짜 또라이야!”
레이븐의 금빛 눈동자가 울망해지며, 레이놀드 황자의 평소 일과와 보좌관과의 대화에서 얻어 낸 정보를 알려 주었다.
“……그러니까 황자에게는 아직 검이 없단 말이구나. 그걸 ‘받을’ 예정이고. 그렇다는 건, 누군가가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 되겠어.”
레이븐의 이야기를 들은 루시엘이 그리 추측했다.
“그래. 그리고 검은 장벽의 정보를 마도사가 해석 중이라고 하는데…….”
“아,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아빠께서 거짓으로 흘린 정보이니까. 해석해도 상관없어.”
“허, 그렇다면 다행이네. 근데 그 황자가 널 보고 싶다고 하던데……. 아주 기분 나쁜 눈을 하고서 그렇게 말했어. 단단히 조심하는 게 좋겠어.”
“나도 아무 생각 없이 가진 않을 거니까. 가족들이랑 대책을 논의 중이야. 걱정해 줘서 고마워.”
루시엘이 활짝 웃으면서 말하자, 레이븐이 말했다.
“……너보다는 키제프가 걱정돼서 그래. 네가 다치면 그 자식, 돌아 버릴 테니까 말이지.”
레이븐의 눈이 흐려졌다가 이내 평소대로 돌아왔다. 루시엘의 진홍빛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키제프가…… 돌아 버린다구?”
“너 설마 모르는 척하는 건 아니겠지?”
키제프를 미치게 했던 건 과거 솔리아페의 죽음뿐이었는데.
루시엘이 눈동자를 깜빡거리자, 레이븐이 됐다, 말을 말자, 키제프 불쌍한 자식 어쩌고 하는 말을 중얼거렸다.
“……알아듣게 말해 봐.”
“됐거든. 얼굴만 귀여우면 다냐?”
루시엘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레이븐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귀여운 게 다긴 하네. 하여간 황자 놈이 너를 눈여겨봐 둔 모양이야. 저번에 왔을 때 접점이 컸었나?”
루시엘은 황자를 마주쳤을 때를 회상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말 한마디 섞은 적 없어. 난 곧장 기절해 버렸으니까.”
그래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지만.
“저런, 네가 크리스털 페어리라는 건 아직 못 알아냈던데.”
“응, 알아내는 건 시간 문제겠지만. 되도록 숨기는 게 좋긴 해.”
루시엘이 체리빛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나저나 아가 마님, 내 보상은?”
“초콜릿 집을 만들라고 주문해 놓았어. 대신 조건이 있어.”
레이븐이 싱그레 웃으려다가 웃음기를 딱 멈추었다.
“레이븐이 너무너무 도움 되어서 그러는데, 다른 곳으로 한 번 더 부탁해도 될까?”
“아, 또 어떤 쓰레기한테 보내려는 거야…….”
“레이븐도 아는 쓰레기.”
루시엘이 혀를 쏙 내밀면서 말을 이었다.
“카빌 후작가로 가 줘. 내 생각에 페넬로페는 이번 문학 살롱을 그냥 넘길 애가 아니거든.”
“아, 저번에 내가 혼내 준 그 애들?”
“맞아. 하지만 이번에는 카빌 후작도 같이 감시해 주면 더 좋고.”
“이거, 그쪽은 요주의 인물이 셋이나 있잖아.”
“초콜릿 집 다음에는 초콜릿 성이야, 사신님.”
“알았다, 접수. 대신 집은 지금 주는 거?”
“물론.”
루시엘이 웃으면서 주방에 연락해 초콜릿 집을 옮겨 오도록 전달한 다음 카빌 후작가에 대해 생각했다.
과거에는 카빌 후작가의 사업이 성공 가도만 밟는 바람에 그 재력이 곧 힘이 되어 막대한 자금을 황실에 바쳤었다.
문학 살롱에도 그러한 공헌으로 참여했던 일곱 가문 중 하나였고.
물론 그것이 돈으로 산 티켓이라는 비아냥과 조롱을 들었을지언정 말이다.
페넬로페는 살롱에서 주목받으려고 루시엘이 만든 보석을 가져갔다. 황후에게 바치기 위해서였지만 결국, 그 보석은 전달되지 못했다.
페넬로페가 루시엘의 몸에 다시 집어 던지면서 신경질을 부렸으니까.
‘황후 폐하께서 보석을 거절하셨잖아! 그러게 더 예쁘게 만들었어야지.’
황후는 너무 고가의 보석은 받지 않겠다고 거절한 거였지만, 페넬로페는 루시엘이 만든 보석이 부족해서 받지 않은 것이라고 마음대로 생각했다.
당시 루시엘이 만든 보석은 검은색의 옵시디언이었다.
막시무스가 카빌 후작이 벌려 준 사업을 말아먹고 도박을 시작했을 때.
하루가 멀다시피 그의 장난감이자 보석 노예로 슬픔도, 분노도 없이 고통뿐인 나날을 살았으니 보석도 옵시디언만 만들어진 것이다.
황후의 눈에 들 기회를 놓쳤다며 페넬로페는 한동안 루시엘을 괴롭혀 댔었다.
그때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면서 루시엘은 다시금 복수를 다짐하며 눈을 꼭 감았다.
루시엘은 이제 두렵지 않았다.
‘나에게는 이제 힘이 있어. 그들에게 모두 대갚음할 힘과 가족이 있어. 페넬로페, 부디 살롱에 어떻게 해서든 오기를 바라. 기다릴게.’
루시엘의 입가에는 슬쩍 미소마저 감돌았다.
* * *
여름밤 문학 살롱.
황도의 귀족이라면 소녀든, 노년의 귀부인이든 지위와 나이를 막론하고 황성에서 열리는 문학 살롱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도 그럴 것이 제국의 오직 일곱 가문만이 참석할 수 있는 영예로운 자리인 건 물론이고, 나아가 황후나 황족의 눈에도 들 수 있는 중요한 사교 행사였던 터였다.
성년을 맞이한 영애들이 자신의 이름을 사교계에 알리는 데뷔탕트만큼이나 주목받을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하여 참석하기로 한 가문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황후의 눈에 잘 보이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사치스러운 물품이나 화려한 패션, 배우까지 섭외해서 오페라 공연을 준비하는 일까지 있었다.
문학 살롱에 초청받지 못한 귀족들도 황성에 따로 마련된 연회장에 입장해 영상구를 통해 문학 살롱을 감상했고, 파티가 열리는 곳이면 대개 영상석을 설치해 함께 감상하며 파티를 즐겼다.
“그러니 문학 살롱에서 주목받으면, 황도의 사교계 전역으로 곧장 퍼져 나가 일약 스타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란다. 알겠니, 루시엘?”
“네,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어요.”
세리안 백작 부인이 환히 웃으면서 루시엘에게 설명해 주었다.
누구보다 사교계 소문에 빠삭한 그녀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기 위해, 루시엘은 솔리아페와 함께 잠시 백작저에 들른 참이었다.
다른 가족들은 황도의 타운하우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황성에서 기거할 궁을 마련해 주겠다고 했지만, 공작이 살롱 당일에만 참석하겠다고 못을 박아 둔 터였다.
‘타운하우스가 없으면 모를까. 황성에 머무는 시간은 무조건 최소로 한다. 내 집이 최고인 법이지.’
클로디아 황녀가 아쉽다는 뜻을 전해 왔지만 루시엘도 공작의 의견에 따랐다.
“드레스랑 신발, 보석은 다 골라 두었고?”
“네, 다 골라 놓았어요.”
“아무리 완벽하게 단장을 마쳤다지만 최신 유행은 알아 둘 필요가 있단다, 루시엘.”
세리안 백작 부인이 루시엘의 볼을 쓰다듬고는 양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러니 우리 쇼핑 가자, 쇼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