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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138)화 (138/282)

<138화>

어느덧 막스와 약속한 날이었다.루시엘은 두근거리면서 응접실을 서성거렸다. 하지만 오후가 다 되도록 연락이 없었다.

“글도 다 썼고, 황성 살롱에 갈 준비도 다 되어 가서 이제 남은 건 공예품을 가져가는 것뿐인데……. 완성이 아직일까……?”

루시엘이 제작을 부탁한 유리공예품은 입체적인 꽃 모양 랜턴이었다.

사실 쉬운 작업은 아니긴 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납작한 판유리를 사용하는 공예이기 때문에 입체적인 형태를 잡으려면 난이도가 더 높아졌다.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

중간에 어려움이 있으면 연락 달라고 하긴 했지만 삼 일이란 시간이면 무얼 만들든 촉박한 건 사실이었다. 자칫 실수로 공예품이 파손이라도 되었다면 큰일이었다.

루시엘은 불안함에 눈동자를 굴렸지만, 우선은 그를 믿고 기다려 보기로 했다.

* * *

하루 전, 갈리우스의 작업실.

막스는 벌써 네 번째로 공예품을 완성했지만 마음에 차지 않아 연락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원하는 결과물이 빠르게 나오지 않자 작업하다 유리 조각에 손을 베이기도 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막스를 보며 지나가던 갈리우스 백작이 말했다.

“가만 보면 나보다 더하군. 내 눈에는 큰 차이가 없는데?”

“이건 꽃 형태가 아쉽고, 저건 마무리가 부족해서…….”

“내일이 약속한 날짜 아닌가?”

“……한 번만 더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심혈을 기울여 유리 제작에 힘쓴 결과, 막스는 약속한 삼 일째 정오에 이르러서야 겨우 다섯 번째 꽃 랜턴을 완성해 내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 봐줄 만한 것 같습니다. 공자비님께 연락 부탁드립니다.”

이윽고 엘링턴이 별궁으로 급히 달려와 전했다.

“아가 마님! 많이 기다리셨지요? 공예품이 무사히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어서 같이 가서 가져올까요?”

“좋아요. 근데 막스 씨 괜찮은 거지요?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어요.”

“아마도 고민을 깊게 한 모양입니다.”

루시엘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엘링턴, 혹시 모르니 공예품에 보존 마법을 걸어 줄 마도사도 함께 데려가면 좋겠어요. 저는 아직 보존 마법은 배우지 않았어요.”

“예, 알겠습니다. 마차를 준비시켜 놓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마차에 오른 루시엘은 한달음에 작업실로 달려갔다.

“막스 씨, 괜찮은 거지요?”

“예, 이쪽으로 오세요.”

피곤함에 찌든 얼굴이었지만 막스는 밝은 얼굴로 공예품을 보여 주었다.

입체적인 꽃 모양의 랜턴.

여기에 불을 켜 두면 정말 은은하고 화사한 분위기가 날 것 같았다.

분홍빛 꽃봉오리는 금방이라도 피어날 것처럼 생생하고 입체적이었다.

“와,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아름다워요.”

아름다운 디자인이지만, 만들기 무척 까다로웠을 것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루시엘이 그려 준 엉성한 그림만을 보고 제대로 도안을 잡아서 다시 만든 모양이었다.

“도안을 다시 그리신 거예요?”

“예.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 보았어요. 최적의 형태를 찾다 보니.”

막스가 머리를 긁적이면서 도안들을 보여 주었는데, 그 수가 십여 가지나 되었다.

“고민을 많이 했군요. 죄송해요, 너무 어려운 주문을 했지요?”

“아닙니다. 만들기는 어려웠지만, 보람은 있었습니다.”

그때 루시엘의 눈에 막스의 손 여기저기에 붕대가 감긴 것이 보였다.

“앗, 막스 씨 다쳤어요? 치료를 받아야겠어요.”

“아, 별것 아닙니다. 유리에 살짝 긁힌 모양입니다. 갈리우스 백작님께서 치료해 주셨어요.”

“그래도 치료는 확실히 받는 게 좋아요.”

루시엘은 걱정이 되어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도사를 불러 막스에게 치유 마법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공예품도 안전하게 황성까지 옮겨 가려면, 파손되지 않게 보존 마법을 걸어야 할 것 같아요. 꼼꼼하게 부탁드려요.”

“예, 아가 마님.”

루시엘의 주문에 따라 마도사가 조심조심 꽃 랜턴에 보존 마법을 걸었다.

루시엘이 막스의 손을 꼭 붙잡고는 말했다.

“정말 고생 많았어요. 모두가 유리공예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다녀와서 결과 알려 줄게요.”

“네, 공자비님. 더 필요한 건 없으시고요?”

사실 루시엘은 뒤늦게 생각난 아이디어가 있었다.

바로 책갈피였다.

꽃 랜턴으로 주목을 받게 되면 작은 꽃 책갈피를 살롱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나눠 줬을 때 더 많은 호응을 이끌어 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막스의 다친 손을 보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꽃 랜턴만으로도 충분한걸.’

그러나 그걸 눈치챈 막스가 아무렇지 않다며 손을 움직였다.

“……손은 다 나았습니다.”

“아니에요. 고생 많으셨는데 푹 쉬는 것이 좋겠어요.”

“아가 마님, 다른 게 필요하신 거죠? 저한테만 살짝 말해 보세요.”

“그래, 이래 봬도 나도 유리를 다룰 줄은 아니까. 내가 도울 수도 있지!”

엘링턴이 그리 말했고, 갈리우스도 루시엘의 기색을 알아챘다.

“…….”

‘다들 내 표정을 읽은 걸까?’

민망함에 고개를 돌리다가 루시엘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막스가 몇 번이나 공예품을 만들다가 남은 꽃잎 조각들이었다.

“아, 여러 번 만들다가 남은 흔적들이에요. 만지지 마세요. 버리든지 다시 모아서 가마에 녹여야겠습니다.”

“……엇, 이거. 그냥 버리기엔 아까워요. 모양도, 빛깔도 예쁜걸요. 그럼 막스 씨, 이 꽃잎들로 책갈피를 만들어 줄 수 있나요?”

“오, 좋은 생각인데요? 물론입니다. 그건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도 돕지.”

갈리우스도 소매를 걷었고, 엘링턴도 기웃거렸다.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뭐 없습니까.”

“자넨 식사나 사 오도록.”

“저랑 같이 사 와요.”

그렇게 해서 꽃 랜턴과 꽃 책갈피까지 여름밤 살롱을 위한 유리 공예품이 완성되었을 때는 한밤중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오늘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막스 씨, 이브나크의 공방으로 돌아가서 푹 쉬고 있도록 해요. 이번에 반응이 좋으면, 다음 일정도 논하기로 하고요. 갈리우스 백작님도 바쁘신 와중에 기술 전수해 주셔서 감사해요.”

“예, 이 작업실에서 갈리우스 백작님께 많은 걸 배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전수해 주신 기술은 유리공예에 유용하게 쓰도록 하겠습니다.”

막스가 갈리우스에게 꾸벅 인사했다.

“……드디어 귀찮은 녀석들이 안 오겠군. 아니, 근데 아직 안 끝난 거 아니었나?”

내심 아쉬운 듯한 기색으로 갈리우스가 말했다.

“맞아요. 어떤 반응이 나올지는 가 봐야 아는 거니까. 조금 더 기다려 주세요.”

“결과가 없더라도 저는 큰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루시엘은 막스에게 금화가 든 주머니를 전달했다.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조금 걸릴지 몰라요. 하지만 막스는 분명 재능이 있으니까 좋은 결과가 있을 거예요.”

금화를 본 막스의 눈이 커졌다.

“공자비님, 이건……. 공작님께서도 저희 하멜 공방으로 지원금을 주셨잖습니까.”

“그건 공작님의 돈이고, 이건 제 돈이니까요. 막스 씨가 노력한 보상을 주고 싶어서 그러니 받아 주세요.”

“……하지만 아직은 아무것도 없는데.”

그는 감격한 얼굴이었다. 루시엘의 조막손이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내가 보았을 때 막스 씨는 갈수록 빛날 사람이라, 언제가 되었든 크게 성공할 거예요. 그러면 이건 후원과 응원의 의미로 드리는 걸로 할까요?”

“고맙습니다, 정말로. 공자비 님이 아니었다면 이걸 해 볼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직 감사하긴 일러요.”

“예, 황성에 잘 다녀오시길 바라겠습니다.”

“좋은 결과 가져오지 않으면 다시 올 생각 말아라, 알지?”

“……흑, 너무하셔. 알겠어요!”

막스와 갈리우스의 배웅을 받으면서 루시엘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내가 아니라, 노력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좋은 결과로 이어지면 좋겠어.’

루시엘은 제 작은 어깨에 많은 것이 달렸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돌아가는 마차에서 엘링턴이 넌지시 알려 주었다.

“아가 마님, 여러모로 부담이 크겠지만, 잘 해내실 겁니다. 연약해 보여도 누구보다 강한 분이라는 것 알고 있어요. 새삼스럽지만 벨슈타인의 그 누구보다도 더요.”

엘링턴이 대견한 눈빛으로 보며 말하자, 루시엘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처음 벨슈타인에 왔을 때는 그야말로…… 작고 여린 아이였어요.”

“파르페를 좋아하는 눈토끼였죠.”

“풋…… 맞아요.”

“그 모습으로 여러 사람을 길들이셨습니다. 그 무시무시한 벨슈타인의 공작님과 전대 공작님 모두를요. 그뿐입니까. 드래곤이신 큰 마님과 작은 마님, 키제프 도련님과 레오니 도련님까지. 그러니 아가 마님은 벨슈타인에서 가장 강한 분이 틀림없습니다.”

루시엘이 말갛게 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칭찬이 과해요?”

“그냥 함께 일을 돕는 동안 즐거웠단 이야기를 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그리고 다른 일을 하신다면 그것도 제가 보좌하고 싶습니다. 저에게 이런 마음이 들게 하는 분은 각하 다음으로, 처음입니다.”

엘링턴의 진지한 말에 루시엘은 눈을 깜빡였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그 말은 제 사람이 되겠다는 뜻인가 싶어서. 하지만 그는 현 공작의 가장 유능한 보좌관이 아닌가.

“응? 그건…… 잠깐만요.”

“사탕으로 아가 마님 편 하자면서 꼬실 때는 언제고요? 그러니 책임지세요. 열과 성을 다해 보좌하겠습니다.”

“……제 사람이 되겠단 거예요? 엘링턴은 이미 주군을 모시고 계시잖아요. 배신하면 아빠가 엘링턴을…….”

가만두지 않을 텐데. 루시엘이 뒷말을 삼키자, 엘링턴이 초록빛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뇨, 각하를 배신하는 일은 꿈에서도 없습니다. 사실 개인적인 흥미도 생겨서 말입니다. 아가 마님이라면, 많은 일을 해내실 분이라고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이번 유리공예 말고도 기꺼이 도우라고 각하께 명받았습니다.”

“아, 그런 거였구나. 천재에게 칭찬받으니 기분은 좋네요.”

루시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좋아요.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엘링턴.”

루시엘이 도톰한 단풍잎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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