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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137)화 (137/282)

<137화>

공작성에는 식당이 몇 군데 있었지만, 창문 너머로 정원이 한눈에 보이는 본성의 플레르 홀은 가장 멋진 전경을 자랑했다.

홀에 들어선 두 사람은 공작과 솔리아페를 발견했다. 키제프의 옷깃을 루시엘이 잡아끌며 속삭였다.

“두 분 데이트하시니까 다른 데로 가자.”

“……그래.”

요즘 들어 부쩍 함께 있는 모습을 자주 보는 것 같아 보기 좋았다.

‘지난번 마물 토벌 이후로 더 애틋해지셨어.’

“……가긴 어딜 가.”

그러자 매의 눈을 가진 공작에게 들키고 말았다. 결국, 네 사람은 사이좋게 원형의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시작했다.

구운 연어와 아스파라거스, 망고와 토마토를 곁들인 양상추 샐러드, 치즈를 얹은 가리비찜과 고소한 안심 스테이크까지.

세 접시째 비워 가는 루시엘의 입가를 냅킨으로 닦아 준 키제프를 보며 두 부부도 흐뭇한 눈빛을 교환했다.

공작과 솔리아페가 말했다.

“먹는 양에 비하면 참으로 안 크는군.”

“루시엘은 작으니 산만큼 쌓아 놓고 먹어도 돼.”

“……크고 있어요.”

“아 참, 다음 주에 열리는 황성의 여름밤 살롱에 나와 솔리아페, 그리고 너희들 이렇게 넷이서 참석하면 좋을 듯한데.”

“……앗, 정말요?”

“예전에는 나만 혼자 갔었지만. 이젠 달라졌지. 우리 새아가가 왔고, 준비하는 일들도 있으니까.”

솔리아페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우리가 같이 가서 힘을 보태 줄게. 루시엘.”

“……감사해요.”

“루시엘, 네 글도, 공예품도 기대하고 있다.”

“으, 공예품은 분명 아름다울 테지만 제 글은 너무 기대하진 말아 주세요.”

“난 기대되는데. 잘 쓰잖아, 너. 소질 있어.”

키제프도 턱을 괸 채 루시엘이 보내던 전서구를 떠올리며 그리 말했고, 솔리아페도 동조했다.

“다들 너의 문장력에 놀랄까 봐 그러나?”

“……설마요, 아빠.”

루시엘의 입에서 나온 호칭을 들은 공작이 눈매를 나붓이 접었다.

“다시 듣고 싶군.”

“아…… 아빠.”

“안 되겠군. 루시엘, 그냥 아빠 딸 할까?”

어느새 흐물흐물 풀어진 공작의 입가가 다물어질 줄 몰랐다.

그때였다. 공작의 통신구가 빛나자 그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와 루시엘에게 말했다.

“……잠시 중요한 연락이 와서 가봐야 할 것 같군. 루시엘, 바쁘지 않다면 같이 갈까.”

“앗, 저도요?”

“그래, 네가 확인해 줄 일이 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루시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긴장한 채 공작을 따랐다.

공작의 집무실에 다다르자 안에는 다른 손님이 도착한 모양인지, 엘링턴과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공작은 보좌관들에게 루시엘을 잠시 맡긴 후 말했다.

“루시엘, 보좌관들과 잠깐만 있어라. 헨드릭 황실이 소유한 마검 리스트가 도착했다는군.”

“네.”

몇 분이 지나서야 집무실 문이 열렸다.

안에 있던 목소리의 주인공은 보이지 않았다.

“아…… 손님이 계시는 줄 알았어요.”

“호크아이라는 정보 조직원이 다녀갔다. 보통 창문을 이용하더군. 그에게는 굳이 네 모습을 밝힐 필요는 없어서 밖에서 잠시 기다리라고 했단다.”

공작이 루시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의 배려였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 마님. 자주 뵙습니다.”

엘링턴이 루시엘에게 인사하고는 곧장 마법 두루마리의 암호를 해제했다.

안에는 방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헨드릭 황실이 소유한 마검의 이름과 사진, 어떤 힘을 가졌고 어디에서 발견되었는지에 대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었다.

루시엘은 자료를 하나씩 자세히 들여다보며 과거 황자가 지니고 있던 마검이 있는지 찾았다.

“혹시 이것 아닌가?”

“아뇨, 아니에요.”

루시엘이 입술을 꼭 깨문 채 고개를 저었다.

방대한 자료를 한 시간이 넘게 들여다보려니 눈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이윽고 한참 동안 뒤적이던 끝에 루시엘의 눈에 낯익은 모습이 들어왔다.

푸른색의 긴 날, 쭉 뻗은 검신을 가진 검이었다. 다만 루시엘이 보았을 때처럼 홈이 파여 있지는 않았다.

“앗, 이 검인 것 같아요.”

루시엘이 손으로 가리키자, 공작의 눈도 가늘어지며 그것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블루 익스큐션. 처형검이라.”

“잠깐만요, 각하. 블루 익스큐션은 황성에서 소유했다가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잃어버렸다니. 빌어먹을, 그럼 왜 소유 리스트에 넣어 온 거지?”

“워낙 극비로 진행되는 일이라 파악이 어려웠을 겁니다.”

“잃어버린 연도나 경위는?”

엘링턴이 자료를 뒤적였지만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황자가 소유한 건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군.”

공작이 입술을 혀로 축이며 말하고 나서 말했다.

“스캐빈저 쪽은 별다른 소식이 없나?”

실드의 가짜 정보와 함께 까마귀 대신에 독수리를 황자에게 선물로 보냈다.

테오 자작의 이름으로 보냈으니 전혀 눈치는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드루이드 주술사와 멀리서도 정신을 교감할 수 있어 황자의 감시를 위해 보낸 독수리였다.

“황자가 따로 쓰는 첩자가 있다는 정보는 알아냈습니다. 그자는 팔로스와는 별개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독수리이니 내부적인 면까지 파악하려면 한계가 있긴 합니다.”

“그래. 슬슬 심을 만한 세작을 알아봐. 아니면 끌어들일 만한 황실 사람도 좋고.”

“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루시엘도 속으로 생각했다.

‘레이븐이 오면 황자에게 마검이 있는지 물어봐야겠어.’

* * *

“아가 마님, 이리 오세요. 주무시기 전에 안마랑 피부 관리를 받기로 하셨지요?”

꽤 느지막한 밤, 마법 랜턴의 노란 불빛이 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루시엘은 베시의 부름에 책상에 엎어져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 그건 나중에 받아도 되지 않을까. 내일 아침에…….”

“안 돼요, 아가 마님. 살롱에 참여하는 귀족들의 외모와 패션은 꾸준히 입에 오르내린답니다. 다들 관리에 힘쓰고 있을 게 틀림없어요.”

그건 루시엘도 알고 있었다. 그나마 루시엘은 어린 나이인 데다 사교계에 정식으로 데뷔한 것도 아니었기에 이 정도 관리로도 괜찮았다.

“하지만……. 아무리 예쁘게 꾸미고 가도 소용없어.”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가요?”

“……그게, 여름밤 문학 살롱에 발표할 글이 안 떠올라.”

루시엘은 종이와 깃펜을 붙잡고 곰곰이 생각했지만 한 문장도 떠오르지 않았다.

베시는 글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한 가지는 알 것 같았다.

“……거창한 글보다는 한 줄이라도 마음을 움직이는 글이 어떨까요?”

“그게 어려운걸.”

“그렇지만 아가 마님은 편지를 잘 쓰셨으니, 일상 편지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써 보시는 게 좋을 거예요. 자, 제가 힌트를 드렸으니 이리 오세요. 잠시 머리를 식히시는 것도 좋겠어요.”

“응. 알겠어.”

베시가 웃으면서 로즈에게 손짓했다. 두 사람은 루시엘의 옷을 편안한 가운으로 갈아 입힌 다음 소파로 데리고 와서 부드럽게 팔과 다리, 어깨 근육을 풀어 주었다.

얼굴에 싱그러운 허브와 약초로 시원한 팩을 해 주자 루시엘은 잠시 눈을 감고 졸았다.

팩을 마치고 상큼한 오렌지 향이 나는 크림을 얼굴과 피부에 바를 때쯤, 루시엘은 깨어났다.

“어머, 아가 마님. 피부가 촉촉하고 보들보들해졌어요.”

잠시 휴식을 취해서일까. 한결 피로가 풀리고 머리도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루시엘은 아까 베시가 말해 준 편지에 대해 생각했다.

항상 다른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기뻐했다. 그 사람에게 제 이야기를 전하는 게 좋으니까.

하지만 누구보다 자신의 이야기에 가장 귀 기울여 줄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편지를 써야지. 내가 좋아했던 꽃들에 대해서.’

“고마워, 베시. 나, 생각났어.”

“잘됐어요. 이제 저희는 가 볼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아가 마님.”

“응, 잘 자. 좋은 밤.”

베시와 로즈가 루시엘의 볼에 뽀뽀하고 나갔다.

루시엘은 사각사각,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단어들을 하나씩 적어 나갔다.

* * *

다음 날 아침 루시엘은 일어나자마자 솔리아페와 함께 살롱에 입고 갈 드레스를 고르기 위해, 카탈로그를 둘러보았다.

살롱이 가까워지는 만큼 마음이 분주해지는 것 같았다.

그사이 할아버지께 요청을 드려 에리카에게 연락하자, 그녀는 곧장 루시엘을 찾아왔다.

“에리카 언니! 스피넬의 힘을 알아냈어요. 바로 축복이었어요.”

“축복이라고요?”

“네. 마음으로 빌어 주는 거예요. 그래서 실험에서 육안으로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던 건가 봐요.”

“아…… 그랬군요. 저도 한 가지 알아낸 게 있어요.”

“뭔데요?”

“자, 보세요.”

에리카가 핀셋을 사용해서 스피넬을 마력 측정기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그냥 눈금 200을 가리켰다.

“지금은 200이지요?”

“네. 보석들 중에는 가장 적은 수치네요.”

“아니에요.”

에리카는 스피넬을 손안에 쥐었다가 다시 놓았고 수치를 재는 일을 반복했다. 이번에는 한 바퀴를 돌았다.

다음엔 더 오랫동안 쥐었다가 수치를 재자 계속해서 더 큰 수치로 올라갔다.

“이건 살아 있는 생명체의 온도에 반응해서 담고 있는 마력이 점점 커지는 것 같아요.”

“정말요?”

에리카의 말대로 그녀와 에리카가 동시에 스피넬을 만지자 눈금이 핑핑 돌았다.

“……이거 고장 난 거 아니에요?”

루시엘이 불안한 듯 눈동자를 데룩 굴렸다.

“정상이에요. 하지만 최대 수치는 1000 정도인 듯해요.”

“그렇구나. 이걸 발견해 낸 에리카도 놀라운데요.”

“저는 보통 핀셋을 사용해서 연구하는 편이지만, 마음이 급해지니 손으로도 보석을 여러 번 만져서 수치가 달라지는 바람에 더 혼란스러웠어요. 마탑 제 사무실에 고양이 한 마리가 자주 놀러 오는데, 그 아이가 이 보석을 한번 핥는 바람에…… 알게 되었어요.”

“귀여워라. 고마운 고양이네요.”

옵시디언과 스피넬의 마력은 전에 만든 보석들보다 훨씬 높은 수치였다.

그나저나 루시엘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내 보석이 점점 강해지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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