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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136)화 (136/282)

<136화>

제발 모른 척해 달라는 듯, 루시엘은 커다란 눈망울로 말똥말똥 그를 바라보았다.

누가 저를 잡아먹기라도 하나?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도망치려는 루시엘을 보자니 심술이 삐죽 솟아났다.

게다가 루시엘이 그 분홍빛의 보석을 만들어 내는 순간마다 자아내던 수줍은 분위기는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말랑말랑했다.

가까이 마주한 루시엘에게서 나는 달콤한 베리류의 과일 향기.

붙잡은 손목은 소동물의 그것처럼 연약하고 보드랍다. 놓아줄까 싶다가도 알 수 없는 욕심이 생겼다.

그렇게 열심히 검을 훈련했던 것도 다 루시엘을 위해서였는데…….

지난번 마법 수업이 끝났을 때, 할 말이 있다던 루시엘은 그렇게 말했었다.

“키제프, 검술 훈련에 더 열중하고 있다는 거 알아. 마법 수업은 들을 필요 없다는 것도. 새로 오신 스승님은 엄청 엄격하다고 들었어. 키제프가 약속도 어기고 기합받으면서까지 여기 오면 나도 마음이 아파. 우리가 함께 지낼 시간은 많으니까, 지금은 각자의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게 좋겠어.”

그 뒤로 루시엘의 말대로 일부러 자주 보러 가지 않고 꾹 참았는데.

이 애는 알까.

언젠가부터 자신의 하루는 누군가의 생각으로 시작하고 끝이 난다는 것을.

이내 루시엘의 은빛 눈썹이 축 늘어졌다.

“……키제프, 내 말 안 들려? 아프니까 그만 놔줘.”

“미, 미안…….”

키제프가 놀란 듯 루시엘의 손목을 얼른 놓아주었다.

“다른 생각 했어?”

“아무것도 아니야.”

키제프가 옅은 미소를 흘리면서 말했다.

“근데 나, 루시엘 말대로 검술 훈련에 집중하려고 노력했어. 찾아가는 것도 참았어. 별궁에 가고 싶은 발길을 돌려서 기사단에서 지냈어.”

키제프가 자신도 모르게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꼭 칭찬해 달라고 하는 것 같잖아. 뭐야, 이게.’

키제프는 말하고 나서 쑥스러운지 얼굴이 붉어진 채 가만있었다. 그러자 루시엘이 맑게 웃으면서 말했다.

“좋아. 내 말대로 잘했으니까 칭찬해 줄게. 잘했어.”

사르르 지어 주는 예쁜 미소가 그의 눈에 콕 박히는 듯했다. 이걸로는 무언가 모자랐다.

조금 더 관심을 주었으면 좋겠어.

부족해.

“그게…… 전부야?”

“음……. 이리로 와 봐.”

일어선 루시엘이 키제프의 머리를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었다.

“잘했어, 키제프.”

어쩐지 강아지가 된 기분이었지만 기뻤다. 고개를 숙여서 웃는 걸 감출 수 있어 다행이었다.

가족 외에는 누군가 닿는 걸 싫어하는데, 이상하게 루시엘과 닿는 건 그렇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분이 좋아서 문제지.’

자그맣고 아늑한 손길이 쓰다듬을 멈추고 나서 루시엘이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이 스피넬,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냐면 실은 나도 대답…… 해 주고 싶은데 사실 모르겠어.”

“……적어도 설명은 해 줄 수 있잖아.”

키제프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며 물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 드는지. 너도 나와 같은지 말이야.’

“응? ……루시엘?”

키제프가 루시엘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허공에 바로 그 보석이 또롱 하고 영롱하게 맺혔다.

분홍빛의 스피넬.

보석을 만들어 낼 때마다 루시엘은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거나, 움찔할 때가 있는데 방금은 둘 다였다.

“……만들었다.”

키제프는 스피넬이 떨어지기 전에 붙잡았다. 지난번보다 더 큼지막하고 다채로운 빛을 머금고 있는 스피넬.

“이걸 만들어 낼 때 심장 두근거렸어?”

루시엘은 차마 부정은 하지 못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면 됐어.”

“응. 그, 그치만 어떤 보석을 만들어도 전부 심장이 두근거리는걸!”

루시엘이 재빨리 그렇게 덧붙였지만 이미 뒷말은 키제프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흡족한 얼굴로 그대로 작은 몸을 가만히 껴안았다.

한편 루시엘은 홍조를 띄우며 재잘거렸다.

“막 따뜻하고, 몽글몽글 기분이 좋아. 그 누구보다 키제프가 잘되었으면…… 하고 바라게 돼.”

“그건 나도 그런데……. 루시엘,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렇다면 조금쯤은 기대해도 될까.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인지.’

키제프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루시엘은 머릿속에 무언가 떠올랐다.

두근두근.

키제프가 알려 준 이 설렘.

낯설지만 간지럽고 숨기고 싶은 이 감정. 하지만 숨길 수 없는, 상대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

그건 어쩌면 ‘축복’이 아닐까.

루시엘은 스피넬을 꺼내서 매만지면서 속마음을 중얼거렸다.

‘……나도 키제프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 순간 스피넬에서 뿜어져 나온 분홍빛이 퍼지며 키제프의 몸을 바람처럼 감쌌다.

“……역시! 나 스피넬의 힘이 뭔지 조금 알 것 같아. 바로 축복이야.”

루시엘이 그렇게 감탄하면서 외쳤다. 키제프를 만나고 나니 역시 보석의 의문점이 해결되어 기뻤다.

더불어 그와 나누는 교감이 진해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러기가 무섭게 그 순간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요동을 쳤다. 루시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밥부터 먹으러 갈까?”

“응. 두 그릇 먹을 거야.”

“대식가로군.”

두 사람은 산들거리는 풀밭을 내려가며 말했다.

“방금 스피넬의 힘으로 키제프가 행복하게 해 달라고 축복을 빌어 줬어.”

“아까 느낀 따뜻한 바람이 그럼 루시엘 너가 걸어 준 축복인가?”

“응.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으니까.”

과거에서 알았던 키제프의 생에서는 행복했던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서. 루시엘은 그걸 꼭 바라고 싶었다.

루시엘이 키제프의 손을 붙잡은 다음, 스피넬을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 온기와 마음을 담아 너에게 줄게. 이건 거절하지 말기!”

“응.”

키제프의 눈이 부드럽게 접혔다.

* * *

한동안 귀족들의 발길이 뚝 끊겼던 카빌 후작가의 저택에 뜻밖에도 여러 명의 귀족이 찾아왔다.

중년의 귀부인과 신사들. 그들은 하나같이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카빌 후작 부인. 이렇게 불쑥 찾아와 죄송합니다만, 더는 두고 볼 수 없어서 말이지요. 저희는 폴리체 아카데미의 학부모위원회에서 나왔습니다.”

“폴리체 아카데미의 교장입니다. 부인.”

학부모위원회와 교장까지 찾아오다니, 후작 부인이 놀라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로 이렇게 오셨지요?”

“예, 아드님 문제로 말씀드릴 용건이 있습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카빌 후작 부인은 심상치 않은 손님들이 들이닥친 탓에 흐린 표정으로 사람들을 안으로 들였다.

층계를 내려오다가 그들을 본 페넬로페는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이 동그래졌다.

“폴리체 아카데미라면, 막시무스 오빠의 학교잖아? 또 뭔 사고를 친 거야.”

후작의 서재에서 긴 대화가 이어졌다. 페넬로페는 귀를 댄 채 문에 바짝 달라붙었다.

“자, 잠깐만요. 우리 막시무스가 다른 아이를 폭행하고 밀었다고요?”

“예, 현재 그 학생은 다리가 부러지고, 이빨이 빠져 치료 중입니다.”

“죄…… 죄송합니다.”

“폴리체 아카데미는 제국 최고의 상위층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입니다. 그런 우리 아이들의 정서를 해치는 아드님의 폭력적인 행동은 용납이 될 수 없습니다. 다수결에 의해 퇴학 처분이 결정될 예정이니 그때까지는 자택에서 아드님을 쉬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막시무스는 어디 있소?”

“마차에 있습니다.”

“알았으니, 내 당장 그놈부터 만나지요. 그럼 이만들 돌아가 주시오.”

카빌 후작이 불편한 기색으로 말하자 사람들이 수군거리면서 돌아갔다. 이어 제 아들을 끌고 오다시피 한 카빌 후작이 매섭게 진노했다.

“네 놈이 감히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해? 폴리체 아카데미의 학비가 얼만지 모르겠느냐?!”

사실 아버지의 분노가 무서워 마차에서 내리지 않고 있었던 막시무스는 냅다 무릎부터 꿇었다.

“아, ……아, 아버지! 아, 그게 말이죠. 이렇게까지 될 게 아닌데.”

평상시에도 아이들을 괴롭히고 폭행해 온 것은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니었다.

그런 막시무스의 잘못들이 이렇게까지 수면 위로 떠오른 건 최근 카빌 가문에 대한 명성이 추락했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다들 꾹 입 다물고 있던 놈들이 이제 가만히 있지 않고 터트려서……. 아, 근데 이게 전부 제 잘못은 아니잖아요. 가문의 명성이 이렇게 된 거 말이에요.”

막시무스는 아버지를 올려다보면서 뻔뻔하게도 그리 말했다. 카빌 후작이 눈썹을 사납게 찡그리면서 물었다.

“이놈이! 그래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전부 내 책임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막시무스가 시선을 피하자, 카빌 후작의 온몸이 바르르 떨렸다. 그가 시종에게 명했다.

“뭣들 하는 거냐! 당장 막시무스를 방에 가두고, 물 한 모금 주지 마라!”

“여, 여보…… 그래도 우리 아들인데.”

카빌 후작 부인이 말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미안하지만 같이 일을 도모하기는 어렵겠소, 후작. 다음 기회에 같이 하지.’

‘……우리를 믿을 수 없다면서 고객들이 자금을 다 빼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벨슈타인 공작가에 수모를 당한 후부터 모든 일이 꼬여 가고 있었다.

오랫동안 함께 일을 도모하던 사업 파트너까지 등을 돌리고 끌어모았던 자금도 줄줄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러다가 준비하는 사업은커녕 굴리던 일도 접어야 할지도 몰랐다.

“제기랄.”

일 스트레스로 빠진 머리가 수북하게 쌓였는데 저 모자란 아들놈까지 보태고 있었다.

“크리스털 페어리 계집애만 있으면 그야말로 한 방에 해결이 될 터인데…….”

짙은 한숨을 내쉬면서 파이프에 불을 붙이려는데, 페넬로페가 슥 종이 하나를 보여 주며 말했다.

“아버지. 저 머저리…… 아니, 오라버니는 원래 저랬어요. 기왕 이렇게 된 거 비싼 학비도 아낄 수 있잖아요. 그보다는 우리 가문도 살길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얘야, 지금 이 아비가 기분이 많이 좋지 않구나.”

“이거 한 번만 봐 주세요.”

“……그게 무엇이냐.”

“황성에서 열리는 문학 살롱이요. 여기에 가고 싶어요.”

페넬로페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어차피 우린 황성에 출입을 하지 못한다.”

“정식적으로는 그렇겠지만, 다른 방법을 찾아보면 되지 않을까요?”

가만 보면, 제 딸아이는 저를 닮아 그쪽으로는 머리를 잘 굴리는 것 같단 말이지.

후작이 페넬로페를 향해 엷게 웃었다.

“문학 살롱인지 뭔지에 왜 가려고 하는 게냐?”

“실은 제가 들은 소문이 있어서요.”

“소문?”

“클로디아 황녀와 공자비가 친구가 되었다고 해요. 그러니까 즉, 이번 문학 살롱에 그 공자비 계집애가 올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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