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에리카가 유리 샬레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것 보세요. 잠깐 페리도트를 씨앗에 반응시켰더니 이렇게 싹을 틔웠답니다. 연두색 페리도트에는 나무 속성의 힘이 담겨 있었어요.”
“와아, 신기해요.”
루시엘은 감탄하다가 그만, 자신이 만든 보석이라는 이야기까지 할 뻔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정말 신기했다. 제 보석이 씨앗의 싹을 틔우다니. 푸릇푸릇한 싹과 하얀 뿌리를 보면서 루시엘은 직접 키운 것만 같은 뿌듯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나무 속성은 길리아트 할아버지의 속성이야.’
게다가 일반 4대 원소보다 더 상위 속성이라고 수업에서 배웠다. 그럼 더 강한 마력을 가졌을까?
“에리카 언니, 페리도트에는 마력이 얼마나 들어 있나요?”
“루비와 비슷한 5~600 정도일 거예요.”
“그렇구나. 그럼 옵시디언은요?”
루시엘이 새까만 보석으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이건 딱 봐도 알겠더라고요. 어둠 속성이에요.”
마법 플라스크에 옵시디언을 넣고, 구멍을 막자 이내 어두운 연기로 가득 찼다.
어둠은 막연하게 무언가를 죽이거나 파괴하는 힘이라고 생각했는데 나타난 반응은 생각보다 육안으로 확인하기 좋은 결과였다.
그야말로 순수하고 근본적인 힘.
“어둠 속성은 정말 주변을 어둡게 하는 거였어요?”
“음, 어둠 속성은 사실 강하게 발현되면 조금 더 복잡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요. 다만 어둠과 악은 다르지요. 어둠이라고 해서 사악한 것이 아니니까요.”
“맞아요.”
루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옵시디언을 가져가던 키제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깊고 아득한 눈동자로 루시엘을 마주 보았었다.
마치 고통을 어루만져 주듯 다정하고 애틋한 눈으로.
그러고 보니 키제프의 속성이 바로 어둠, 그리고 바람이었다. 어둠 속성의 마법을 쓴다고 해서 그는 아카데미에서도 늘 혼자였다.
벨슈타인에 대한 복수로 모두를 파멸시킨 미래를 맞이한 적도 있었다.
분명 괴롭고 고독했을 길이었다.
‘어둠의 힘이란 건 어쩌면 외로움이라는 지평선을 따라가는 것인지도 몰라.’
이번 생에서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루시엘은 에리카의 말에 상념을 떨쳐 냈다.
“옵시디언의 마력은 700 정도로 아주 많은 양의 마력을 머금은 것으로 추정되네요. 측정 도구에 한계가 있지만요.”
“와…… 엄청난 보석이었네요.”
‘만들긴 괴롭지만 말이야.’
“스피넬은 조금 더 연구를 이어 갈까요?”
“네, 부탁해요. 저도 스피넬을 다시 살펴보면서 무언가가 생각나면 알려 줄게요. 지난번에 성수처럼 무언가 다른 돌파구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루시엘은 지난번에 강한 자신감에 차올라서 만들었던 보석도 맡길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아직 스피넬의 연구도 마치지 않았고 하나뿐인 귀한 보석이니까. 이건 아직 시간이 있어.’
그래도 에리카가 노력해 준 덕에 보석에 대해 많은 걸 알아 가고 있었다.
“에리카, 고생 많으셨어요. 덕분에 편하게 많은 정보를 얻었어요.”
“별말씀을요. 아직 연구할 보석들이 남아 있겠죠? 갈수록 연구가 막혀 도움이 되어 드리지 못하는 듯해 아쉽지만 최선을 다해 볼게요.”
에리카는 자신이 보석의 비밀을 전부 풀어내지 못해, 조금 속상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루시엘은 고개를 붕붕 저으며 에리카의 손을 잡고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아뇨, 에리카 언니가 없었더라면 저는 속성 마법도 하지 못했을 거예요. 지팡이에 보석을 세공하게 되었으니까요.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루시엘을 바라보며 에리카는 엄마 미소로 화답했다.
“흑, 이제 속성 마법을 하시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에레스에게 들었어요. 너무 축하드려요! 제가 도움이 되었다는 것만으로 너무 기뻐요. 우리 귀여운 루시엘 님! 하고 싶은 거, 원하는 거 다 하셨으면 좋겠어요.”
과거에는 사실 황자에게 도움을 주는 에리카를 원망하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연구에 대한 순수한 열망만 가득한 사람이라는 것을.
에리카에게도 언젠가는 제 비밀을 밝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그녀가 루시엘을 안아 주고 나서 두루마리를 하나 내밀었다.
“아, 이것 가져가세요.”
루시엘이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뭐예요?”
“지금까지 연구한 보석들의 결과치를 마법 두루마리에 정리해 두었어요. 아무나 열람할 수 없게 암호도 걸어놨고요. 1004로.”
루시엘이 두루마리를 봉인한 매듭을 풀자, 초록색 암호 마법진이 떠올랐고 10개의 숫자를 순서대로 손으로 건드렸다.
두루마리에는 그간의 연구 결과는 물론이고 실험했던 방법도 적혀 있었다.
“와, 언제 이런 걸 다 하신 거예요?”
“제가 늘 하는 일인걸요.”
“고마워요. 사실 비밀리에 연구 중이니, 이걸 어디 발표하실 수도, 에리카의 이력으로 남는 일도 아닌데 이렇게 열심히 해 주시니까요.”
“마도학자로서 보람찬 작업이었어요. 또 맡기실 일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알겠어요. 에리카 언니. 잘 가요.”
“네, 또 뵈어요. 아, 저. 아기 영지에 있는 딸기랑 라즈베리 좀 따 가도 될까요?”
“응. 완전요. 먹고 싶은 만큼 가져가세요.”
어린애처럼 소리치며 에리카는 바구니를 양팔에 하나씩 끼고, 라즈베리 밭으로 달려갔다.
“조심해요, 에리카 언니!”
어느새 든든해지는 마음에 루시엘은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이번 생에서는 좋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루시엘은 별장의 보석 방으로 잠깐 들어가서 고이 보관해 둔 보석을 다시 꺼내 보았다.
“이만큼 예쁜 보석은 처음 봐.”
알아보니 이 보석의 종류는 핑크 다이아몬드.
다이아몬드처럼 무지개를 품은 듯 찬란하게 빛나면서도 빛깔은 달콤한 분홍색이었다.
분홍빛 장미에 금빛을 덧씌우면 이런 색이 나올까?
아니면 이벨린 할머니가 자주 드시는 샴페인의 색깔이 이랬던 것도 같아.
분명한 건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보석이란 점이었다.
‘이 보석은 어떤 힘을 가졌을까?’
보석을 어루만지면 왠지 눈앞이 살짝 일렁거리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날 기분 좋은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루시엘은 핑크 다이아몬드와 스피넬을 나란히 비교해 보았다. 두 보석은 크기와 모양, 빛깔, 머금고 있는 빛들도 달랐다.
스피넬이 조금 더 진한 분홍빛이었고, 다이아몬드보다는 아무래도 덜 화려했다.
‘성수나 다른 자극에도 반응이 없었다면…… 어떻게 찾지?’
키제프 때문에 만들어진 거니까, 그에게 물어보는 게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요즘 키제프는 새로운 스승님이 도착한 후로 부쩍 더 만나기 힘들어졌다.
별궁에도 잘 들어오지도 않았으니까. 곧 점심시간이니까 그냥 딱 가서 같이 밥 먹자고 하기에도 자연스러울 것 같았다.
“그래, 최대한 자연스럽게. 지금 가 보자. 근데 키제프는 어디 있을까?”
그때 루시엘의 눈에 손가락에 끼고 있던 결혼반지가 들어왔다.
스르르.
반지의 힘으로 순간이동 한 루시엘은 눈앞에 있는 키제프의 금빛 뒤통수를 확인하곤, 활짝 웃었다.
하얀 셔츠와 검은 팬츠를 입고 있는 키제프는 잠시 풀밭 나무 그늘에 앉아 쉬고 있었다.
‘다행이야. 방해한 거 같지는 않네.’
나무에 세워 둔 검 한 자루와 물통 하나가 보였다. 그런데 그는 무언가 하고 있었다.
루시엘은 뒤에서 몰래 살짝 다가가 그가 뭘 하고 있는지 엿보았다. 키제프는 자그만 책에 스케치를 슥슥 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을 크게 부를까 하다가 말았다. 키제프가 너무도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어서.
‘역시 방해했나 봐. 근데 뭘 그리는 거지? ……눈토끼? 잘 그린다.’
하얗고 몽실몽실한 털, 길쭉한 귀를 가진 토끼였다.
루시엘은 눈을 깜빡이다가 그만, 뒤를 돌아본 키제프와 시선이 마주쳤다.
“앗…….”
“루시엘.”
키제프는 별로 놀라지 않는 얼굴이었다. 대신 입꼬리가 평소보다 올라가 있었다.
“아, 내가 온 거 알고 있었구나.”
키제프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턱을 짚었다.
“신기하다. 네 생각 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네가 나타났어.”
“……? 정말?”
“응.”
그 순간 키제프가 눈을 곱게 휘면서 웃었다.
그사이 머리가 너무 자란 건지, 키제프의 앞머리가 바람에 휘날리며 그의 볼까지 닿았다.
루시엘은 발그레진 볼로 그의 옆으로 가서 풀밭 위에 앉았다.
나무 그늘 아래라 시원하고, 바람이 솔솔 불어서 쉬기에 딱 좋았다.
키제프는 약간 귓불을 붉히면서 다시 그림을 그렸다.
‘봐도 봐도 미소년이야. 이건 그림이 그림을 그리는 상황이랄까.’
루시엘은 키제프의 옆모습을 보다가 그가 그리던 토끼를 다시 보았다. 이제 막 꼬리털을 몽실하게 그리고 있었다.
그냥 슥슥 그리는 것 같은데 세밀한 선들이 부드러웠다.
“그림 잘 그린다.”
루시엘이 칭찬하자, 키제프가 잠시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맑게 일렁이는 눈동자가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반짝반짝 빛이 났고, 입꼬리는 내려오질 않는다.
그는 몸을 살짝 기울이면서 연필을 움직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루시엘을 보면서 말이다.
루시엘은 이내 키제프의 기분이 몹시 좋다는 걸 알아차렸다.
마치 안 보이는 꼬리가 붕붕 흔들리는 것 같달까.
‘모든 감각을 나에게 집중하는 듯해서, 왠지 마음이 간질간질해.’
“저기, 키제프.”
“응.”
“나 사실 궁금해서 왔거든. 이 보석에 대해서.”
“…….”
그렇게 말하고 나자 묘하게 살짝 풀이 죽은 듯한 표정이 되었지만, 키제프는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루시엘이 주머니에서 스피넬을 꺼내 보여 주었다.
“어, 그건…….”
키제프가 스피넬을 보자 짓궂은 눈빛이 되었다.
“나랑 있을 때 자주 만들던 보석인가?”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 보석들에는 마법의 힘이 있으니까. 에리카가 이 스피넬은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지 연구가 풀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래서 널 보면 스피넬에 대해서 의문이 풀리지 않을까 싶었어.”
“……같이 고민하기 전에 말해 줘야겠어.”
“……으응?”
루시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감정으로 만들어 낸 건지 말이야.”
키제프가 입매를 틀며 말하자, 루시엘은 어쩐지 한참 잘못 찾아온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 그건 말이지. 잠깐만! 아, 키제프, 배고프지 않아?”
루시엘이 진홍빛 눈망울을 굴리며 간절하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