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시기가 너무 적절하게 소식이 왔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다음 주가 문학 살롱이니까요.”
루시엘은 소식을 전해 듣고 곧장 엘링턴과 함께 기대에 부푼 얼굴로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어느새 갈리우스의 작업실에 다다랐다. 오늘은 친절하게도 갈리우스가 입구로 나와 두 사람을 맞이했다.
“어서들 와.”
“안녕하십니까, 기다렸습니다.”
“안녕하세요, 갈리우스 백작님. 저 조금 기대해도 되지요?”
갈리우스는 마치 자신이 만든 작품을 선보이기라도 하는 양 들떠 보였다.
“흠흠. 물론이지, 루시엘.”
그의 자신감에 놀란 루시엘이 엘링턴과 눈을 마주쳤다.
남에게는 인색한 평가를 주는 것으로 유명한 그가 저렇게까지 자신 있게 말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런데 작업실에는 막스가 보이지 않았다.
“막스 씨는 어디 갔나요?”
루시엘의 물음에 갈리우스 백작이 안경알 너머로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본인이 없을 때 비로소 작품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법이지. 작업실에 틀어박혀만 있는 것 같아서 잠시 근처 찻집에 가서 머리 좀 식히고 오라고 했다.”
“아하, 그럼 작품들부터 볼까요?”
엘링턴의 말에 갈리우스가 두 사람을 작업실 안으로 안내했다.
“이쪽으로.”
새하얀 작업실 내부는 촛대나 마법 랜턴도 켜 두지 않고, 자연광이 그대로 비치게 만든 상태였다.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지난번에 막스 씨가 만든 튤립 창문이네요.”
그냥 봤을 때는 같은 것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빨간 튤립 세 송이가 탐스럽고도 산뜻해 보였다. 강한 색들이 많이 쓰였는데도 촌스럽지 않고 조화로웠다.
도안도, 유리도, 납땜한 기술도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이거 새로 제작한 거군요? 확실히 정교해졌어요.”
루시엘의 말에 갈리우스가 진열대를 가리켰다.
“진짜는 이쪽이지.”
“와아…….”
루시엘은 이내 절로 감탄을 흘리고 말았다. 진열대에는 지난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고 아름답고 영롱한 유리공예품들이 놓여 있었다.
스테인드글라스로 이렇게 다양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 수 있었다니…….
크기와 종류도 각양각색인 유리공예품들은 개수가 많지 않았지만 공들여 만든 것들이라 하나같이 눈을 사로잡았다.
꿀벌과 꽃을 표현한 접시부터 백합 모양의 화병, 부엉이 벽 장식품.
영롱한 태양 모양 브로치와 달 귀걸이, 우아한 장미 목걸이까지 보석에 견주어도 밀리지 않을 만큼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막스는 그동안 여성들의 장신구에 대해서도 많이 공부한 듯했다.
또 보랏빛 밤하늘과 별자리를 표현한 샹들리에는 로맨틱해 보였다.
“이걸 전부 막스 씨가 직접 만든 겁니까?”
“그렇다네. 어떤가, 내 제자의 솜씨가.”
갈리우스가 우쭐대며 말하자, 루시엘이 인정한다는 뜻으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좋은 스승님 밑에서 배워서 그런지 너무 훌륭해요.”
엘링턴도 바다를 표현한 액자 장식품을 눈여겨보면서 말했다.
“예, 저도 하나쯤 가져다 놓고 싶을 정도입니다.”
이런 장식품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엘링턴이 그렇게 말할 정도로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것들이었다.
“특히 이번 공예품들은 하멜 공방에서 공수해 온 유리들을 사용했지. 삼 일에 한 번씩 그렇게 가져오고 있다네.”
“아하, 그래서 더 반짝거리는군요.”
네이플 해초의 비법을 직접 알려 주었으니 루시엘도 그 차이가 눈으로 느껴졌다.
“막스는 정말이지 성실한 친구야. 이것 봐. 가게에 가서 귀부인들과 영애들에게 인기 많은 액세서리들을 조사까지 하더군. 나는 이렇게까진 못했는데 말이지.”
막스의 책상에서 자료들을 꺼내 보여 주는 갈리우스의 눈동자에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이제 보니 앞에서 대놓고 칭찬하기 부끄러워서 막스 씨를 찻집으로 보내신 거였어요?”
루시엘이 놀리듯 말하자, 갈리우스가 정색했다.
“예끼, 녀석아. 그런 게 아니라. 큼큼. 막스가 실력은 없지만 성실하고 노력하니 이만큼 왔다 이거지.”
“……결국 칭찬인데요?”
루시엘이 눈을 초롱이며 싱그레 웃었다.
“그게 어디 칭찬이냐.”
그때 작업실로 막스가 돌아왔다. 갈색 체크 재킷에 서스펜더가 달린 팬츠, 모자를 푹 눌러쓴 그는 제법 말끔한 차림이었다.
그를 보자마자 갈리우스가 또 타박을 해 댔다.
“왜 벌써 온 건가. 하여간에 말을 안 듣는다니까.”
막스가 모자를 벗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찻집에 빈손으로 가니까 영 허전해서……. 그리고 두 분은 저도 꼭 다시 뵙고 싶었습니다.”
“유리 공예품을 보여 주고 어차피 그리로 이동하려고 했다만…….”
“사실은 저도 반응이 궁금해서…….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지난번에 쑥스러워만 했던 막스도 이번에는 자신감을 보이고 있었다. 달라진 결과물도 좋았지만 루시엘은 그 모습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갈리우스 백작님이 막스 씨 칭찬을 아주 많이 하더라고요.”
“저, 정말요? 평소에는 한마디도 안 하시는데…….”
막스가 놀라 갈리우스 백작을 바라보자 크흠 하고 그가 다시 딴청을 부렸다.
루시엘이 흐뭇하게 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동안 노력을 많이 한 성과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아요. 정말 영롱하고 세밀해요. 눈을 뗄 수 없을 만큼요. 지난번에는 사실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번엔 그런 게 없었어요!”
“저도 이렇게 아름다운 유리공예품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 황성에 계신 분들도 좋아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말입니까?”
루시엘과 엘링턴의 극찬에 막스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이내 허리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이제야 갇혀 있던 울타리에서 벗어나 진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잘됐어요. 막스.”
이렇게 꾸준히 발전하는 걸 보면, 정말 그는 타고난 인재임에 틀림없었다. 그걸 이끌어 낸 갈리우스 역시 마찬가지였고.
이 정도 기술력과 아름다움을 가진 공예품이라면 황후 폐하와 클로디아 황녀 전하에게 선보일 수 있을 듯했다.
루시엘은 결정한 듯 말했다.
“다음 주에 황성에서 글을 발표하는 살롱이 열린대요. 황후 폐하가 주최하시는데, 거기에 막스 씨가 만든 유리공예품을 가져가서 선보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예에? 버, 벌써 말인가요? 아, 하지만 아직 황성에 가져갈 정도로 고급스러운 공예품은 없어서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만들어 보겠습니다……!”
막스가 욕심과 열정을 보이자 루시엘이 말했다.
“음, 고급스러움은 이미 충분해요. 하지만 가능하면 새로 제작을 부탁드리고 싶긴 해요. 문학 살롱과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살롱 분위기에 어울리는 물건으로요.”
“밤에 열리는 겁니까?”
“아쉽게도 그럴 것 같아요.”
그 점은 루시엘도 아쉽게 생각했다.
“햇빛이 비치는 낮이라면 어떤 스테인드글라스 장식품을 가져가도 다 예쁠 테지만, 밤에는 아무래도…….”
막스도 고민스러운 모양이었다.
“저 별자리를 담은 샹들리에도 꽤 멋진 것 같은데요.”
엘링턴이 의견을 제시했지만 루시엘은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야외에서 열릴지도 몰라요. 샹들리에는 실내조명이잖아요. 실내와 실외 두 공간을 다 고려해야만 해요.”
뭐가 좋을까. 깊이 생각에 젖은 루시엘을 보며 엘링턴이 씩 웃으며 물었다.
“아가 마님, 달콤한 디저트를 드셔야 또 생각이 나지 않겠습니까? 케이크 가게로 갈까요?”
“케이크를 사양하고 싶진 않지만, 오후엔 약속이 있어요.”
“아, 그렇군요. 근데 발표할 글은 쓰신 겁니까? 각하께서 자랑하실지도 몰라요.”
“앗…… 그렇지! 글과 연결되는 유리 공예품이라면 더 좋을 것 같아요!”
귀를 쫑긋 세운 루시엘의 머릿속에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 나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했던 그게 있었지. 그걸로 글을 써 보아야지.’
“그치만 아이디어는 떠올랐어요. 막스 씨, 잠시 종이하고 펜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루시엘은 생각난 유리공예품의 디자인과 설명을 슥슥 적어서 막스에게 전달했다. 그는 알겠다며, 웃어 보였다.
“삼 일이면 제작이 완료될 것 같습니다.”
“잘 부탁해요, 막스.”
부디 모두가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루시엘은 엘링턴과 함께 공작성으로 출발했다.
엘링턴이 문득 떠오른 듯 루시엘에게 작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그런데 아가 마님, 저한테 이런 걸 주시면 어떡합니까.”
그건 루시엘이 그에게 선물했던 에메랄드와 토파즈였다.
“……응? 이제 봤어요?”
그에게 보석을 준 건 한 달도 더 된 일이었다.
“사탕이라고 하셔서 어린 동생에게 줬다가…… 버려져 있는 걸 이제야 도로 찾아왔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귀한 보석은 받을 수 없습니다.”
엘링턴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시아빠께서 그 역시 가족이라고 말씀하셨으니 루시엘의 사정을 들은 모양이었다.
이렇게 또 보석을 줄 수 없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루시엘의 마음이 따스해졌다.
“고마워요, 엘링턴.”
“뭘요. 본성으로 들어가실 예정이지요?”
루시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약속이 있으니 아기 영지에 내려 주세요.”
“알겠습니다. 저는 각하께 오늘 유리공예에 대해 보고드리겠습니다.”
마차가 아기 영지에 도착하자 루시엘은 엘링턴과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미리 정해 둔 건 아니지만 오늘은 에리카가 아기 영지에 오는 날이니까, 약속은 맞는 셈이다.
연구소 건물에 들어가 보니, 에리카가 마법 플라스크와 서류를 보면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잘 풀리지 않는지,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스피넬과 페리도트, 그리고 옵시디언이 관측 도구 위에 놓여 있었다.
루시엘이 먼저 그녀를 불렀다.
“에리카, 벌써 와 있었네요.”
“아, 루시엘 님. 오셨어요?”
그녀치고는 기운이 빠진 표정이었기에 루시엘이 걱정스레 물었다.
“……연구가 잘 안 풀리나요?”
“아뇨, 결과가 조금 이상해서 말이에요.”
“응? 뭐가요?”
“이상하게 스피넬은 측정할 때마다 마력 수치가 달라지네요. 그리고 어떤 효과인지, 이것만 알아내지 못했어요. 성수를 부어 보았지만, 육안으로 치유가 된다거나 하는 점도 없었고요. 혹시 짐작 가는 바가 있으세요?”
“……음, 글쎄요. 저도 한번 고민해 볼게요. 그럼 다른 보석들의 힘은 알아내셨어요?”
“네, 물론이죠.”
에리카가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