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주르륵.
길리아트가 작은 다이아몬드 위로 투명한 유리병에 담긴 액체를 부었다. 그러자 다이아몬드에서 은은한 초록빛이 뿜어져 나왔다.
길리아트가 건넨 다이아몬드를 이벨린이 받아서 솔리아페의 심장 위로 올려 주었다.
“다이아몬드에 성수를 뿌리면, 곧바로 효과가 있더구나. 마탑에서 에리카와 몰래 보석을 조금 더 연구해 보던 중에 신전 사제가 주고 간 성수를 부어 보았다. 다이아몬드에서 느껴지는 생명력이 언뜻 성스러운 힘과 맞닿아 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이렇게 효과가 있다는 걸 발견했지.”
길리아트의 말을 증명하듯, 이내 솔리아페의 몸 전체로 초록빛이 한 겹 덧씌워지듯 잔잔하게 퍼져 나갔다.
말라 가던 솔리아페의 몸이 온기와 함께 생기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가족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루시엘은 할아버지에게 부탁했다.
“할아버지, 아까 제가 만든 엄청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있잖아요. 그것도 사용해 주세요.”
“오냐, 저 다이아몬드로도 효과가 있으니 이것은 더하겠구나.”
다들 루시엘의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경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루시엘, 이걸 만들었다고?”
키제프의 물음에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나중에 설명해 줄게. 우선 어머님이 깨어나실 때까지 치유에 집중하는 게 좋겠어요.”
성수를 적시자, 이번에는 다이아몬드가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루이비드가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조심스레 건네받아 솔리아페의 심장 위로 올려 주었다. 세 가지색의 빛이 퍼져 나가 그녀의 온몸을 감쌌다.
“……!”
가족들이 숨을 죽이면서 지켜보았다. 모두 저마다 속으로 제발 솔리아페가 깨어나기를 기도했다.
이내 눈꺼풀이 움직이고 몸이 달싹이더니 마법처럼 솔리아페가 눈을 반짝 떴다.
“솔리아페…… 정신이 들어?”
루이비드가 그녀의 손을 꼭 겹쳐 잡으면서 걱정스레 물었다.
“……여보? 아버님, 어머님까지 다들 왜 이렇게 모여서…….”
민망해하면서 일어나려던 솔리아페를 이벨린과 길리아트가 막았다.
“우리 큰 새아가, 그대로 누워 있거라.”
“그래,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네. 그런데 제가 왜 여기에…….”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영문을 몰라 하는 솔리아페의 얼굴이 정말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다 죽어 가던 사람 같지 않았다.
창백했던 낯빛은 옅은 홍조를 띠었고 상태도 매우 안정적으로 보였다. 실로 기적과도 같은 치유 효과였다.
“정말 모르겠나?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가?”
“아…… 기억나. 토벌은 어떻게 됐지? 그 괴상한 마물은? 맞아, 그놈이 내 마나를 빼앗아 갔는데…….”
솔리아페의 다급한 말에 루이비드가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그래, 그놈에게 당해 쓰러진 당신을 성에 데려왔어. 루시엘이 당신을 위해 만들어 낸 다이아몬드로 당신의 생명력을 치유했고. 루시엘이 당신을 살린 셈이지.”
그의 말에 솔리아페의 푸른 눈이 자그만 아이에게 닿았다. 루시엘은 기다렸다는 듯, 솔리아페에게 다가가서 폭 안겼다.
“어머님, 깨어나셔서 그리고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루시엘은 그렁그렁 고이는 눈물을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그녀가 무사함에 얼마나 안도했는지…….
감동으로 만들어진 토파즈가 바닥을 데구르르 굴러다녔다.
솔리아페는 그런 루시엘을 귀엽다는 듯 등을 토닥였고, 눈시울이 붉어진 제 아들 키제프에게도 팔을 벌렸다.
폭 끌어안은 세 사람은 한참 동안 온기를 나누었다.
솔리아페가 부드럽게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미안하고 고마워. 아니, 분홍색 말은 이럴 때 해야겠지?”
코끝이 빨개진 두 아이가 솔리아페를 보며 물었다.
“……분홍색 말이요?”
“아…… 그거, 기억하고 계셨어요?”
예전에 그런 쪽지를 보낸 적이 있었지.
“사랑한다, 얘들아.”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렵사리 말을 꺼낸 솔리아페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음, 역시 조금 어렵구나.”
“……!”
“어머님, 제가 더 사랑해요!”
놀란 키제프는 말문이 막혔고, 루시엘은 그녀를 더욱 끌어안으면서 외쳤다.
포근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길리아트와 이벨린, 루이비드도 그제야 밝은 얼굴이 되었다.
“루시엘, 근데 이제 엄마라고 부르기로 했던 것 같은데?”
“에……?”
“그날 온실 정원에서 산책 마친 다음 약속했었단 말이지?”
“앗! 맞아요.”
뒤늦게 기억해 낸 루시엘이 활짝 웃고 나서 조심스레 그 호칭을 불러 보았다.
“어…… 엄마!”
왠지 긴장하며 불렀는데 솔리아페가 사르르 미소 지었다.
“……딸이 생긴 것 같고 좋은걸. 어머님 소리보다 친근하고.”
뒤에 있던 루이비드도 눈이 동그래지더니 말했다.
“엄마의 남편이니까 나도 이제부터 아빠가 되겠군.”
묘하게 루시엘이 이 집 딸이 되어 가는 분위기에 위기감을 느낀 키제프가 정색했다.
“……다들 이러지 마시죠. 루시엘은 엄연히 저와 결혼을……!”
뒤늦게 아차 싶어 키제프가 입술을 꼭 다물었으나 루이비드와 길리아트가 이때다 싶어 농을 주고받았다.
“그래, 남매는 싫다 이거군.”
“오호라, 가족이 되면 큰일 날 정도로 루시엘이 좋아진 거로구나. 키제프. 귀여운 녀석들.”
“……아, 그런 게 아니라.”
“걱정 말렴. 너희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부부니까.”
이벨린이 그리 토닥이기까지 하자 얼굴이 화끈거리는 모양인지 키제프가 고개를 푹 숙였다.
루시엘도 쑥스러워진 분위기에 눈을 깜빡이면서도 그에게 궁금증이 생기긴 했다.
‘키제프가 진짜 그런 걸까……? 그치만 다들 못 말리셔.’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가족들을 바라보던 솔리아페가 루시엘의 눈을 맞추며 말했다.
“잠시 루시엘과 둘이서 이야기하고 싶어요.”
“오, 그러려무나. 자, 우리는 잠시 자리를 비켜 주자꾸나.”
이벨린이 세 남자를 데리고 나갔다.
이제야 조용해진 분위기에서 솔리아페가 루시엘을 한 번 더 가볍게 그러안고는 떨어졌다.
“루시엘, 정말 고마워. 네가 날 살렸어. 마나리스에 걸린 내가 마물에게 마나를 빼앗기기까지 하니까 순간,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단다. 정말…… 다 끝이구나 싶었거든.”
솔리아페는 위스프에게 당했던 괴로웠던 때를 회상하며 말했다.
“이렇게 무사하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러니 오늘은 마음껏 기뻐할래요. 우선은 다시 주치의의 진단을 받아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병이 완전히 치유되셨는지 말이에요.”
“그래, 그게 좋겠어. 주치의를 불러 주렴.”
“네.”
루시엘이 힘껏 고개를 끄덕인 다음, 방문 밖에 대기하고 있던 주치의를 데려왔다.
그리고 진찰 결과, 놀라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 이건 실로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마나리스의 병세가 말기를 지나 손쓸 수 없을 만큼 악화된 상태였습니다만.”
“지금은 어떤가요?”
“지금은 병세가 거의 잡혔습니다. 아주 미미하게 남아 있는 정도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요? 마나리스는 불치병이라, 치료를 받아도 낫기 힘들 터인데.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솔리아페는 루시엘과 눈빛을 주고받은 후, 그에게 엄중히 말했다.
“가문의 비밀일세. 이 일을 외부에 알리지 말아 주게.”
그동안에도 비밀을 누설하지 않고 잘 지켜 준 의사였다. 그러겠다 약속한 그는 병세가 호전된 것을 축하하며 돌아갔다.
루시엘은 다시금 솔리아페에게 말했다.
“사실 끝까지 비밀로 하시는 줄 알고, 제가 대신해서 불치병에 대해 밝히려고 했는데.”
“알고 있어. 너에게 그 무거운 짐을 맡길 수 없었어. 그래서 내가 말하려고 한 거란다.”
“아…… 역시 그때 알고 말씀하셨던 거였군요.”
솔리아페가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때는 마나리스에 대해서 밝히려고 했는데, 이제 이렇게 해결되었으니 가족들에게 더는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 비밀로 묻어 두고 싶구나. 루시엘도 그렇게 해 줄래?”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마나리스의 병세는 거의 잡혔으니까, 조금만 더 회복하시면 완전히 건강해지실 거예요.”
신전에 가서 성수도 더 얻어 오는 게 좋을 터였다.
아니면 아예 신전으로 모셔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솔리아페를 완전히 낫게 하는 일이 현실로 다가왔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솔리아페 역시 설렘 가득한 얼굴이었다.
“내가 다시…… 건강하게 살 수 있게 된다니.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
솔리아페는 자신의 손을 비롯해서 몸을 여기저기 살피면서 말했다. 한층 기운이 샘솟고, 마나의 흐름도 무척 안정적이었다.
무엇보다 늘 지끈거리는 두통과 정신적 고통이 사라지니 날아갈 듯 상쾌한 기분에 절로 미소가 감돌았다.
“꿈 아니니까 볼 꼬집지 마세요.”
“알았다, 루시엘.”
“그럼 쉬세요, 엄마.”
루시엘이 방긋 웃으면서 방을 나왔다. 정신적 행복감이 커서일까.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도 배가 부르다.
루시엘은 아기 영지의 별장으로 이동했다. 소파에 누워서 아늑한 휴식을 즐겼다.
‘어머님이 나으셨다니 정말 꿈만 같아…….’
오랫동안 루시엘의 마음을 무겁게 했던 일이었는데, 이걸로 벨슈타인이 불행해지는 결말의 씨앗이 또 하나 사라졌다.
막혀 있던 일들이 한꺼번에 전부 풀린 것만 같았다.
‘게다가 더 강한 보석을 만들게 되었는걸.’
마치 또 한 번 새롭게 각성한 듯한 경험이었다. 모양도, 크기도 다른 보석은 왠지 더 강한 힘을 지녔을 것만 같았다.
‘만약 이게 두 번째 각성이라면, 어쩌면 다른 감정의 보석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루시엘은 차오르는 기대감을 누르면서 가볍게 미소 지었다.
과거에는 저주받았다고 생각했던 이 보석의 힘……. 이번 생에서는 그야말로 축복이었다.
‘이 힘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나조차도 궁금해.’
두근두근.
불안한 미래 대신에 완벽히 새로워질 미래에 대한 기대감.
스스로의 힘을 증명할 기회들.
루시엘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 어느 때보다 강해진 자신을 믿고 싶었다.
‘아니, 자신 있어. 해낼 수 있어.’
순간 시야를 가로막을 만큼 출렁이던 마나의 파도.
닫혀 있던 머리가 열리고 가슴 어딘가가 새롭게 트이는 감각.
심장에 들어찬 마나가 퐁 터지며 뽀글거렸다.
파아아앗!
또로롱!
루시엘은 처음 보는 보석을 손안에 거머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