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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128)화 (128/282)

<128화>

불안감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것도 모자라 숫제 제 손톱을 씹고 물어뜯던 레이놀드가 신경질적으로 탁상을 쾅 내리쳤다.

그 탓에 탁상 위에 있던 물건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나동그라졌다.

메이너드와의 정략혼으로 클로디아를 보내 버리고, 자신이 황위에 오르는 것이야말로 가장 깔끔하고 완벽한 엔딩이었다.

메이너드의 왕세자와도 미리 말을 맞춰 적당히 무카스만 쥐여 주기로 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 메이플을 진짜 내놓을 맹약을 들이대면, 그들은 뒤도 안 돌고 갈 것이다.

어머니께서 메이너드는 제법 주무르기 좋은 왕국이라고 일러주셨었기에 미리 길을 터놓으려 했거늘. 클로디아 하나로 모두 물 건너간 일이었다.

“거의 다 된 일이었는데! 망할 계집애가 다 망쳐 놓았군.”

제 완벽했던 계획이 비틀리는 꼴을 보자니 속이 뒤집힐 것만 같다.

‘그럼 무카스도 필요 없겠지요? 우울증은 마음의 병이에요. 그래서 전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 주고 답을 찾아 주는 치료소를 나라 곳곳에 세우고, 그곳에서 일할 우울증 치료사 양성 사업을 추진할 생각이에요.’

당당하게 의견을 피력하던 클로디아의 모습, 그리고 그런 그녀를 주목하던 황제와 대신들을 상기하던 레이놀드는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아니야! 자격도 없는 것이, 그렇게 잘난 척을 해 대 봐야 아무 소용 없지! 황위는 내 것이니까.”

실성한 것처럼 혼자 지껄이던 레이놀드가 중얼거렸다.

“확실해. 이건 분명……!”

멍청한 황녀가 혼자 꾸몄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여러 계책을 준비해 왔다. 분명 뒤에 누군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게 도대체 누구지?”

반드시 배후를 밝혀내야 한다. 레이놀드의 자안이 번뜩이며 굴렀다.

* * *

날이 밝아 오자, 토벌은 시작되었다. 문라켕의 소굴이 총 네 곳이었으니 기사와 마법사들은 균형을 맞춰 네 무리씩 나누었다.

첫 번째 소굴은 자르가 단장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고, 두 번째 소굴은 아나스타샤 마법단장, 세 번째와 네 번째는 각각 기사단 부단장과 마법단 부단장이 선두에 나섰다.

막사에는 공작과 솔리아페가 남아 통신구로 지시를 전달했고 그들을 호위하기 위한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자리를 지켰다.

―1번 소굴. 함정에 잡힌 놈이 있습니다.

미리 작업해 둔 함정에 붙잡힌 문라켕 한 마리가 입구부터 매달려 기다렸다. 놈들의 큰 몸체에 비해서 입구는 좁았던 탓에 쉽게 함정에 걸려든 모양이었다.

놈이 발버둥 치자, 자르가 단장이 목에 검을 찔러 넣었다.

키에에엑!

쿠웅!

귀를 찢는 기묘한 울음을 토하며, 문라켕이 쓰러졌다.

―2번에도 한 마리가 함정에 걸렸습니다.

―1번. 하나 사살 완료.

―4번. 함정이 비었습니다.

솔리아페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흐르며 추가로 지시를 내렸다.

―사체의 피를 몸에 묻히고 전진한다.

각 대장이 이끄는 검은 날개와 마법사들은 계속해서 안으로 전진해 나갔다.

탐지 마법으로 길을 파악한 마법사와 척후병 덕분에 미로 같은 소굴도 파악했다.

구석에 모여 잠든 문라켕은 검이나 창, 도끼로 숨통을 끊어 냈다.

키에엑!

밤에 활동하고 낮엔 수면을 취하는 습성 덕에 토벌은 순탄히 진행되었다.

간혹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 문라켕이 덤벼들면 빛으로 놈들의 시야를 차단하고 제압했다.

한 번에 두세 놈이 있을 때는 불이 붙는 물을 뿌리고 불화살이나 화염 마법으로 처치했다.

―다섯 사살 및 정찰 완료. 1번은 끝났습니다. 부상자는 1명입니다.

자르가 단장이 선두로 이끌었던 첫 번째 소굴이 가장 먼저 끝났다.

―좋아. 잘하고 있네. 자르가 단장, 부상자는 치료 불가하면 막사로 보내고, 나머지 인원은 다른 곳을 지원하라.

―다른 곳도 상황 보고 바란다.

―3번…… 1마리. 사…… 완료.

―2번. 2마리 사살.

네 번째 소굴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냄새를 지우지 못한 데다 실수로 떨어뜨린 물건에서 난 소리가 잠든 문라켕을 깨운 모양이었다.

키에에엑!

불빛에 드러난 붉은 털로 뒤덮인 몸체. 흉흉한 샛노란 눈.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기사가 검을 휘둘렀으나 발톱에 맞부딪쳤다. 앞발로 기사를 제압한 문라켕이 군침을 흘리며, 머리부터 씹어먹으려 아가릴 벌렸다.

“으아아악!”

눈앞에서 동료가 당하자 당황한 마법사들이 화염 마법을 일제히 날렸다.

“파이어 볼!”

화르륵!

겨우 한 마리를 쓰러뜨렸지만 진격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른 문라켕도 그 소란을 듣고 접근하는 중이었다.

키에에엑.

달려든 문라켕의 날카로운 공격에 순식간에 기사가 둘이나 당했다.

―4번, 지원 바랍……. 윽.

―무슨 일이지? 자르가 단장, 곧장 4번 지원하라.

―예.

자르가 단장과 기사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네 번째 소굴로 들어가 단숨에 문라켕의 몸을 검으로 갈랐다.

츠칵!

슷!

키악!

그렇게 약 한 시간이 흐른 후.

자르가의 투입으로 네 번째 소굴도 상황이 종결되어 갔고, 두 번째 소굴도 힘겹게 토벌에 성공했다.

―3번, 상황을 보고 바란다.

그러나 아까부터 세 번째 소굴이 잠잠했다. 통신 상태가 좋지 않던 곳이었다.

솔리아페가 불안한 듯 안절부절못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리아페는 과거를 떠올렸다. 놈들은 본능적으로 인간의 맛을 알기에 민가를 덮치는 일이 빈번했다.

문라켕은 두 달만 두어도 그 수가 급격히 불어나 마을 하나를 초토화시킬 수도 있다.

지금도 적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감당할 수는 있는 수준. 현재 사상자가 적은 이유는 마커스가 막았기 때문이겠지.

그러니 그의 희생을 쓸모없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번에 완전히 끝을 내야만 했다.

“세 번째 소굴이 자꾸 통신이 끊기는데,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불안하게 중얼거린 솔리아페를 보며, 루이비드가 그녀의 어깨를 살짝 짚어 주고는 갑옷과 무기를 점검했다.

“내가 다녀오지.”

“나도 가겠어.”

솔리아페의 말에 루이비드가 침음을 삼킨 후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여기 있도록 해. 아직 토벌이 완전히 끝난 게 아니니, 상황을 통제하고 계속 지휘를 내려. 그게 당신 할 일이야.”

“……알겠어.”

등을 돌린 그의 망토 자락이 흔들리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솔리아페가 달려와 그를 돌려세웠다.

애틋한 푸른 눈에는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루이비드는 그것이 못내 기꺼워 입꼬릴 올렸다.

“루이. 무사히 돌아와.”

“내가 그딴 여우 새끼에 당할 거라고 보는 건가.”

그러나 가끔 이렇게 그녀의 걱정을 사는 일을 벌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고 생각했다.

루이비드는 호위로 남은 기사와 마법사들을 향해 경고하듯 명을 내렸다.

“솔리아페의 안전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살아남을 생각은 하지 마라.”

“예, 각하!”

호위들은 눈동자의 떨림을 감춘 채 대답했다. 루이비드가 말을 타고 세 번째 소굴로 떠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피네 설원의 마지막 골짜기 근처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떼 지어 나타났다.

마법사 한 명에 궁수는 둘, 나머지 넷은 전사였다. 얼굴 반쪽에 문신을 새긴 전사 하나가 서슬 퍼런 눈으로 중얼거렸다.

“지긋지긋한 문라켕 놈들……. 마커스의 원수는 반드시 갚아 주겠다.”

그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도 비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 * *

「현재 연구소에 있는 마법 플라스크와 관측 도구로는 한계가 있어 마탑에서 추가로 몰래 연구를 진행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어요. 다이아몬드 안에 치유력이 있는 건 분명한데 그 힘을 제대로 확인하기가 어렵습니다.

확실한 건 이번에는 마력 수치가 다른 보석보다는 적게 나왔더군요. 아무래도 치유력이 더 큰 것이 아닐까 추측이 됩니다.

어서 빨리 연구를 마무리 짓고 싶은데 다음 휴가까지 조금 걸릴 것 같아요. 어쩌죠?」

그녀의 말에 루시엘도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에리카가 주말 동안 연구를 마치지 못했다고 해 다이아몬드를 마탑에 가져갈 수 있게 허락했는데도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이럴 수가, 큰일이네. 어쩌면 좋을까?’

지금껏 잘해 준 에리카였기에 루시엘도 그녀가 결국 알아내리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다이아몬드는 루시엘이 과거에는 만든 적 없던 보석이었다. 그러니 에리카가 알아내기 전까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치유력이 어느 정도일까.

‘미미하다면 별 효용 가치는 없는 걸까……?’

마력도 다른 보석보다 적은 수치로 나타났다니 의외였다.

‘조금 실망스럽기도 하고.’

어쩌면 막연하게 큰 기대를 하고 있던 보석이어서일까. 품고 있는 힘이 어마어마할 거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찬란한 무지갯빛의 다이아몬드.

손에 쥐었을 때도 생명력이 느껴졌고, 크기도 다른 보석보다 압도적으로 크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게 전부 착각이라면…….

루시엘은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가 이내 다시 눈동자를 굴렸다.

‘그래, 아직 속단하기엔 일러. 할아버지라면 무언가 도움이 될 방법을 알고 계시지 않을까?’

에리카의 쪽지를 가방에 넣은 후 루시엘은 길리아트의 서재로 돌아가 그와 다시 마주했다.

“할아버지, 아무래도 에리카가 보석을 연구하는 데 어려움이 생긴 것 같아요.”

“어려움이라니? 어떤 보석이냐?”

“그게…… 제가 이번 생에서는 처음으로 보석의 힘을 각성하면서 만든 다이아몬드요. 그때, 불의 제단에서 할아버지가 다치실 뻔해서 구하려던 마음에서…….”

“아, 그 찬란한 다이아몬드를 말하는 거구나!”

“네, 맞아요.”

길리아트도 기억이 난 모양이었다.

“그 아름다운 다이아몬드가 나를 구하려고 만든 보석이었다니…….”

왠지 모를 뭉클함에 심장을 누른 길리아트가 루시엘의 머리를 쓰다듬고 나서 말했다.

“루시엘, 그 다이아몬드를 그럼 다시 한번 보여 줄 수 있겠니?”

“아, 그거 지금 에리카가 가지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받아다 주실 수 있을까요? 에리카는 다음 휴가가 늦어질 것 같다고 해요.”

“오냐. 중요한 물건이니 당장 가져다주마. 기다리고 있으렴.”

“부탁드려요, 할아버지.”

그리 대답하고 별궁으로 돌아왔지만 루시엘은 여전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루시엘의 낯빛이 어두운 걸 본 베시가 다가와 손을 감싸 주며 말했다.

“아가 마님, 왜 이렇게 손이 차가우셔요? 따끈한 우유를 데워 드릴까요?”

“응, 부탁해. 베시.”

곧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순간, 쩌저적 잔에 금이 가더니 이내 깨져 버렸다.

“앗, 이게 왜 혼자서…….”

깨져 버린 도자기 잔 사이로 우유가 줄줄 흘러 루시엘의 스커트 자락에도 쏟아졌다.

로즈가 달려와 우유 잔을 살펴보았고, 베시가 루시엘의 손을 끌어당겼다.

“세상에, 아가 마님. 우유 잔에 작은 실금이 가 있었나 봐요.”

“다치지 않으셨어요? 괜찮으니 이리로 오세요. 옷부터 갈아입으셔요.”

“…….”

다이아몬드도, 어머님의 문제도. 어느 것 하나 해결되지 않아서일까. 작은 것 하나에도 루시엘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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