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보석을 이렇게 당당하게 지팡이에 세공해 다니게 될 줄은 몰랐어.’
루시엘은 지팡이를 빙빙 돌리면서 이리 보고 저리 보았다.
드디어 속성 마법을 하게 되었다는 기쁨에 루시엘은 할아버지의 허락하에 공작성 곳곳을 총총 다니면서 마법으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아가 마님, 이제 마법까지 잘하시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사용인들의 반응에 뿌듯함을 느끼면서 답례로 받은 과자를 먹고 나서 루시엘은 중얼거렸다.
“온실 정원에도 가 볼까.”
사실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다.
루시엘이 보석을 심어 준 이후로 피닉스의 장미는 잠잠했으니까. 그럼에도 한 번씩 이렇게 와서 들여다보고는 했다.
루시엘은 여전히 꽃봉오리를 닫고 있는 피닉스의 장미에게로 다가가 말을 걸어 보았다.
“피닉스 님, 어떻게 된 거예요?”
그때였다. 루시엘의 지팡이가 가까워지자 피닉스의 장미가 파르르 몸을 떨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루시엘의 보석이 박힌 지팡이라 마력을 머금어서 반응하는 듯했다.
“……왜 그러는 거지?”
루시엘이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고 있자, 새빨갛던 장미의 봉오리가 살짝 열렸다.
이내 잠에 푹 잠긴 듯한 피닉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냐…… 루시엘? 잘 자고 있었는데 왜 깨운 것이니?
루시엘은 다급하게 물었다.
“앗, 피닉스 님! 주무셨던 거예요?”
―그래, 나도 모르게 잠들었구나. 네 보석이 주는 마력 때문에 푹 잤다.
“아…… 그럼 괜히 깨웠나요?”
―그렇지. 그러니 그 김에 마나 한 모금 부탁한다.
파아.
루시엘이 마나를 끌어모아서 피닉스의 장미에게 전해 주었다. 그러자 장미 꽃잎에서 별 가루가 더 총총 빛났다.
―음음! 힘이 나는구나.
루시엘은 내내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부활은 언제 할 수 있어요?”
―기운을 채우면서 기다려야지. 잠 좀 자다 보면 더 빨라질 듯해.
“그럼 더 주무세요. 보석 더 드릴 테니까요.”
―고맙구나.
피닉스의 장미가 춤추듯 몸을 산들산들 흔들었다.
루시엘은 가지고 있던 보석 전부를 피닉스의 장미 곁에 함께 묻어 주었다.
흙을 도닥이는 손길에는 강한 바램을 담아서.
‘어서 부활하기를.’
그러자 피닉스의 장미의 봉오리가 다시 꼭꼭 닫혔다. 황금 물뿌리개를 이용해, 물도 준 다음 루시엘은 정원을 나서며 중얼거렸다.
“맞다, 오늘은 마법 수업이 있구나! 완전 잊고 있었어.”
다행히 한 시간 여유가 있었다.
장서관에 가서 잠시 공부할 시간은 될 것 같았다.
루시엘은 언제나처럼 전용 소파가 있는 서가로 갔다. 루시엘이 지난번 읽었던 무거운 마법서가 소파 옆 테이블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베론 할아버지가 놔 주신 건가. 답례로 쿠키를 놓아야지.’
팔락, 팔락.
책장을 바지런히 넘기며 읽던 루시엘이 습관처럼 가방을 열려고 하자 바람 냄새 같은 것이 훅 끼쳤다.
그러나 루시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집중해 책을 읽었다. 너무 깊이 빠져 읽은 탓일까.
자신의 위로 그늘이 진 줄도 모르던 루시엘이 중얼중얼 입으로 내뱉으며 글을 읽는데, 문득 나지막한 미성이 들려왔다.
“루시엘.”
“……키제프?”
고개를 들자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키제프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곱게 휘는 눈매와 살짝 올라가는 입술이 예뻤다.
‘웬만한 여자보다 예쁘다니까.’
생각할수록 그와의 인연은 신기하기만 하다. 과거에 루시엘은 벨슈타인을 망하게 만든 부속품에 지나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이렇게나 많은 것이 달라졌다.
키제프와 마주할 때마다 그 아득하게 달라진 차이가 주는 기묘한 심장의 울림이 있었다.
두근.
잠시 상념에 젖어 있던 루시엘이 키제프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그는 루시엘이 앉아 있던 소파를 보며 중얼거렸다.
“어릴 때 쓰던 건데 오랜만이네.”
잠시 추억에 젖은 듯한 키제프가 눈을 깜빡였다.
“맞아, 들었어. 키제프, 이거 봐. 너무 편안해.”
그리 말하면서 루시엘은 소파 안으로 폭 파묻히듯 기댔다. 그 모습이 보들보들한 눈토끼 같아 귀여웠다.
“수업 곧 시작인데 여기서 뭘 하고 있었어?”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시계를 보니 한 시간이 거의 지나 있었다.
“근데 키제프는 여기에 왜 있어? 검술 훈련 받느라 이제 마법 수업 안 오는 줄 알았는걸.”
“……오늘은 들을 거야.”
“왜?”
“……그냥.”
그거야 여기 오면 수업이라는 공식적인 핑계로 루시엘과 잠깐이라도 볼 수 있으니까.
고집을 부려, 훈련을 살짝 빠졌다. 대신 기합까지 받기로 했지만, 그건 루시엘에게는 비밀이었다.
왜냐고 물으니, 키제프는 그저 귓불이 빨개진 채 시선을 괜한 데로 돌리고 물었다.
“……지팡이 안 보여 줘?”
“아아, 맞다. 보여 주기로 했었지.”
“그래. 벌써 나 말고는 다 본 것 같던데…….”
사실 사용인들이 하는 말들을 들었다. 베론에게도 요즘 루시엘이 다시 책 읽으러 자주 오신다고 들어 기다린 참이었다.
요즘은 거의 마주치는 시간이 적으니까, 이렇게라도 잠깐 볼까 해서 온 거였는데.
“…….”
왠지 샐쭉해져서 말하는 키제프의 표정에서 두 사람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약간 서운한 공작의 얼굴과 잔뜩 뿔이 난 레오니의 얼굴.
‘역시 가족이라 서로 닮았구나. 귀여워…….’
루시엘은 살짝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이럴 때가 아니었다.
“수업하러 가야지!”
“알았어. 진짜 늦었는데…… 뛸까?”
“응.”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키제프가 곧 루시엘의 손을 꼭 잡았다. 머잖아 길리아트의 서재에 도착했다.
“응? 둘이 같이 오는구나. 어서 오거라.”
“……커플 티 내지 맙시다.”
나란히 들어서는 두 사람을 보고 길리아트와 에레스가 한마디씩 했다.
오늘 수업 내용은 기본 4대 속성 말고 더 상위 속성에 대한 것이라, 매우 흥미로웠다.
“상위 속성을 얻으려면, 두 가지 이상의 속성을 가져야 한단다. 나는 기본 속성인 땅을 가진 후, 다른 방법으로 물 속성을 얻어 두 가지 속성 조건을 충족한 다음, 나무 속성을 가지게 되었단다.”
“아, 할아버지의 나무 속성은 상위 속성이었군요. 이제야 의문이 풀렸어요.”
루시엘의 눈이 댕그래져선 고개를 주억거렸다. 에레스는 입을 벌리면서 감탄했다.
“와…… 하나도 힘든데 둘이라니. 역시 길리아트 스승님!”
“…….”
기본 속성인 바람과 상위 속성인 어둠, 두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는 키제프를 보며 루시엘은 그 역시 엄청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수업을 마치고 루시엘은 슬그머니 지팡이를 소환했다.
“나도 이제 원소 마법 쓸 수 있어.”
“뭐야, 속성 발현했어? 이 보석들은! 어떻게 한 거야?”
“비밀이야.”
“……그럴 거면 왜 말했어, 루시엘.”
에레스는 답답하면서도 약 올라 했고, 키제프는 루시엘에게 지팡이를 건네받아서 한번 휘둘렀다.
반짝반짝 빛나는 네 개의 보석이 주변마저 환하게 밝히는 듯했다.
‘루시엘의 맑은 마력이 느껴져. 주인을 닮아서 투명하고 예쁘네.’
키제프는 왠지 루시엘의 마력이 기분 좋았다.
“나도 만져 볼래.”
“어딜.”
루시엘의 이 상큼한 마력을 에레스도 느낀다니 왠지 싫은 마음.
키제프는 손을 뻗는 에레스를 피해, 지팡이를 한 바퀴 휙 돌려서 루시엘의 손에 고이 돌려주었다. 그러곤 루시엘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네 지팡이, 아무에게나 넘겨주지 마.”
“어? 으응.”
루시엘은 무심결에 지팡이를 꼭 쥐곤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모르게 볼이 붉어졌다.
“……너희들, 애정 행각은 둘만 있을 때만으로 좀 부탁한다.”
에레스가 가자미눈이 되어 꿍얼거렸지만 키제프는 못 들은 척 먼저 나갈 참이었다. 그러나 에레스가 루시엘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자 발이 절로 뚝 멈췄다.
“아, 루시엘. 우리 누나가 이거 전해 달래. 뭐 연구에 어려움이 있다나 뭐라나.”
에레스가 건넨 쪽지를 받은 루시엘의 표정이 불안감에 흐려졌다.
“그래?”
“응, 근데 대체 뭔 연구이길래 그렇게…….”
빠르게 분위기를 읽은 키제프가 훅 다가와 무슨 일인지 물으려다가 루시엘이 눈빛을 보내자 입을 꼭 다물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에리카 다음 휴일이 언제인지 알아?”
“아…… 누나, 저번에 주말 휴가 써서 당분간은 바쁠 텐데. 다음에 물어봐 줘?”
“아냐, 고마워. 에레스, 잘 가.”
루시엘은 키제프의 옷깃을 붙잡았다. 할 말이 있다는 뜻이기에 키제프도 에레스에게 인사했다.
“가라.”
“그래, 인마.”
둘을 흘끔 훑더니 에레스가 몹시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중얼거렸다.
“……나 오늘 되게 외롭다. 벨슈타인 성에 괜히 왔나 보다.”
* * *
솔리아페의 지휘 아래 문라켕 토벌은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이틀 정도는 지휘에 맞게 전략을 짜고 지형을 파악한 후 실제로 문라켕이 어디 있는지 근거지를 탐색하기로 했다.
1차로 정찰조와 마법사들이 흩어져 문라켕의 근거지를 찾아내기 위해서 탐색을 시작했다.
마지막 골짜기를 넘어 새하얀 소금 동굴 인근에 다다른 그들은 드디어 흔적을 찾았다. 발자국과 배설물, 털 뭉치 등이 발견되었다.
―놈들의 소굴을 찾은 것 같습니다. 적의 움직임은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 깊이 수면 중입니다.
―대부분 성체이고, 그 수는 네다섯 마리 정도.
―여기도 소굴이 있습니다. 여긴 네 마리 정도 됩니다.
그렇게 소금 동굴 인근에서 발견한 근거지만 무려 네 군데였다.
각 소굴은 입구는 달랐지만 내부의 미로 같은 길들은 전부 중앙 소금 동굴로 통했다.
마치 개미굴 같은 곳이었다.
―생각보다 수가 적어. 인근을 더 샅샅이 살펴 주게.
솔리아페가 통신구를 통해 전달했다.
―소금 동굴 근방 외에는 따로 없는 것 같습니다. 솔리아페 님 말씀 그대로입니다. 다른 마물도 혹여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현장으로 나간 자르가의 보고였다.
―소금 동굴 내부 상황은 어떤가.
―큰 샘이 있는 것 외에는 이상 없습니다.
―샘은 원래 있었어. 소금 동굴의 내부 마력 흐름은?
솔리아페의 물음에 정찰대원의 대답이 잠시 끊어졌다.
―내 말 안 들리나? 소금 동굴의 마력 흐름을 파악해 주게.
그러자 곧장 다른 마법사가 마도구를 사용해 마력을 측정한 후 보고했다.
―마력 수치가 70으로 제법 높습니다.
―방금 전 통신구가 끊어졌던 건 뭐였지?
―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정상입니다.
이틀 동안의 탐색이 끝을 보였다. 야간에 활동을 시작하는 문라켕은 전체의 절반 정도였다.
후방 막사에서 솔리아페와 함께 통신구를 통해 보고를 듣던 공작이 말했다.
“전부 합치면 이십여 마리가 되겠군.”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그리 많은 수도 아니야. 이보다 많은 숫자를 감당한 적도 있었으니까.”
“이제 치는 일만 남았나.”
솔리아페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탐색을 마쳤으면 냄새와 흔적을 지운 후에 전원 귀환하도록.
그날 밤 문라켕을 상대해 본 적이 있는 솔리아페와 자르가 단장이 교대로 전투와 약점 등에 대해서 기사들에게 자세히 설명하고 연습과 훈련을 거듭했다.
잠들기 전 루이비드가 솔리아페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내일 밝아지면 공격을 개시한다.”
“예, 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