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루이비드의 너른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대답한 솔리아페가 다시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쳤다.
“물론이지. 이제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당신이랑 애들을 위해서라도.”
루이비드는 믿겠다는 말 대신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짧지만 깊게 입을 맞췄다.
오랫동안 부부로 살면서 뜨겁게 달아오른 사랑을 한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 사랑이 식은 적은 없었다.
서로 간의 오해로 거리가 멀어졌을 때조차 그의 마음에는 항상 솔리아페뿐이었다.
다만 일에 치여 산단 이유로 전부 표현하지 않아서, 솔리아페는 그것을 잘 모르는 듯했다.
‘참으로 무던한 여자지. 방을 꽃으로 장식해도, 사랑한단 고백에도 미소 한 번이 다였으니.’
이렇게 가끔 제게 온전히 열려 있는 듯하다가도, 무언가 닫아 놓은 것이 느껴져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때가 있었다.
아주 저를 길들이는 데 선수라고 해야 할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면서 본능적으로 그러는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날 안달 난 짐승으로 만드는 데에는 성공한 것 같군.’
루이비드는 솔리아페를 안고 시간을 보내고 싶은 욕구가 들었지만, 애써 그것을 종잇장처럼 구기듯 짓눌렀다.
지금은 이럴 여유 따위 없다.
솔리아페는 루이비드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녀에게서 제 것과 같은 욕망을 찾기란 늘 힘든 일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지?”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솔리아페는 그의 단단한 가슴에 안겨 아까 전서구를 떠올렸다.
마커스의 복수를 함께하자는 동료의 말에는 답을 보내지 않았다.
또다시 말없이 사라진다면 이 남자는 무슨 수를 써서든 자신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다시 떠날 마음을 먹었었지만 가족들과 지내고 몸이 나아지면서 달라졌다.
무엇보다 루시엘이 했던 말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솔리아페 님의 병이 늦게 밝혀질수록 시아빠와 키제프, 레오니 세 사람에게 그 영향이 더 크게 갈 거예요. 그것도 매우 안 좋은 쪽으로요.’
아직도 밝히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때와는 다르게 나아지고 있으니 몸과 마음이 편했다.
치유의 기운을 받다 보면 아무리 불치병이라도 나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도 들었다. 루시엘, 그 아이가 피닉스의 장미를 통해서 그녀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기도 했다.
그 덕에 이제 오러를 사용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마나가 거의 정상화되었다.
‘놀라울 정도로 마나의 상태가 괜찮으십니다. 병세가 더는 진행되지 않고, 도리어 호전이 되고 있습니다.’
따로 불러서 진찰받은 주치의도 그렇게 말했다. 다만 마나리스가 완쾌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 병은 불치병이었으니.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증세가 호전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했다.
이렇게 기운을 차려서 움직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겼는데, 검까지 쥘 수 있다니 모든 걸 누리는 기분이었다.
예전처럼 건강해졌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역시 문라켕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동료의 복수도 복수지만, 그 마물에 대해서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과거 문라켕을 소탕할 때 선봉에 섰던 그녀였다.
솔리아페는 조심스레 루이비드에게 청했다.
“몰래 사라지진 않을게. 대신 나도 이번 토벌에 같이 가게 해 줘. 여보, 응?”
“여보라는 말을 그렇게 써먹을 건가.”
루이비드가 그녀를 마주 보며 손목을 움켜잡았다.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녀가 제멋대로 사라질 거 같았다.
그러느니 차라리 함께 가는 편이 낫긴 하다.
게다가 솔리아페 역시 오러를 다룰 줄 아는 강한 검사였다. 검사들은 전투에 대한 갈급증이 어느 정도 있다는 것쯤은 자신도 안다.
“문라켕은 강한 마물이야.”
“그놈들에 대해선 내가 잘 알아. 문라켕 소탕에서 선봉에 섰었으니까 도움이 될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과 같이 가잖아. 검은 날개 기사들과 마법사도 전부 가니까, 위험한 일은 없을 거야.”
“……기어이 가겠다는 거로군.”
그 말에 루이비드가 잠시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한참 말없이 고민하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알았어. 같이 가지. 대신 마물과의 직접적인 전투에서 전면엔 나서진 말았으면 좋겠군.”
“고마워, 루이비드.”
솔리아페가 엷게 웃으면서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어서 준비하지. 동이 트기 전에 출발할 테니까.”
* * *
한편 길리아트는 밤의 대장간에서 세공에 필요한 재료들을 조달하며 류프델을 돕고 있었다.
지지직, 스파크가 튀었다.
평소의 안경 대신 커다란 고글을 착용한 류프델이 마도구를 사용해 지팡이에 마법 세공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뭐가 문제인지, 자꾸만 마정석이 파사삭 깨지면서 세공의 기초 단계부터 막히고 말았다.
“마정석 다 썼다.”
“……최상급의 마정석을 벌써 말이냐?”
길리아트가 벨슈타인에서 가져온 마정석의 숫자는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러나 마법 세공 과정에서 마정석들이 자꾸 깨지는 바람에 뭘 해 보기도 전에 사라지고 말았다.
“스무 개도 넘는 양을 벌써 다 소모하다니.”
“요정 꼬맹이가 만든 보석이 품고 있는 힘이 너무 강해서, 일반 마정석과는 상성이 안 맞는 모양이다. 크흠.”
약간 미안하긴 한 모양인지, 류프델이 그렇게 변명하고 돋보기로 루시엘의 보석을 들여다보았다.
다행히 루시엘이 만든 보석들은 넉넉한 양을 가져와 이것저것 실험해 보기 충분했다.
‘연구를 진행한 보석들은 전부 최상급 마정석 이상의 마력 수치를 가지고 있다는 게 확인되었습니다.’
‘현존하는 최상급 마정석의 수치가 200인걸 감안했을 때, 이 보석들의 마력 수치는 최소 두 배 이상, 가장 마력이 컸던 루비의 경우는 세 배 이상이 아닐까 추정됩니다.’
길리아트는 문득 에리카의 보고를 떠올렸다.
‘그렇지. 루시엘의 보석에도 강한 마력이 있다고 했었으니 그걸 마정석 대신 활용하면…….’
루시엘의 보석을 마정석으로 사용하기엔 아깝긴 하지만, 기존 마정석이 전부 실패하고 있으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도해 보아야 할 것 같았다.
“류프델, 루시엘의 보석을 마정석 대신에 한번 사용해 보는 게 어떠냐. 그 애의 보석은 최상급 마정석의 두세 배에 달하는 마력 수치를 기록했다.”
“뭐라고? 그걸 왜 이제 이야기하냐!”
알려 줘도 도리어 화를 내는 난쟁이가 얄밉긴 했으나 길리아트는 꾹 참고, 루시엘의 보석을 주머니에서 하나 꺼내어 류프델에게 건네주었다.
영롱한 에메랄드와 토파즈였다. 길리아트는 루시엘이 보석을 내어줄 때 볼우물이 패는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에메랄드와 토파즈가 제일 많아요. 에메랄드는 기쁠 때, 토파즈는 감동을 느낄 때 만들어요. 벨슈타인에서 기쁠 일도, 감동받을 일도 많았거든요.’
루시엘이 즐거웠던 감정으로 만든 보석이라니 그도 기분이 좋아졌다.
류프델은 에메랄드를 건네받아, 다시 마도구의 뚜껑을 열어 야광초와 수정을 빻은 가루를 비롯한 여러 재료를 넣고는, 마력의 주파수를 맞추기 위해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다이얼이 소수점까지 정확히 맞춰져야 지팡이의 마력 주파수가 일치해 지팡이가 마법 세공이 가능한 상태로 10초간 열리게 된다.
그 틈에 사파이어를 얼른 띄워 세공 위치를 자리 잡는 것이 류프델의 손기술이었다. 이것 역시 손끝에 마력을 방출하며 움직여야 했다.
지팡이의 마력 주파수가 열려 있을 때는 접촉을 조심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실패였다.
타아앗, 파직!
그러자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커다란 스파크가 튀겨 류프델과 길리아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동시에 보랏빛 연기가 펑 하고 터져서 일이 크게 잘못된 줄 알고 엎드렸는데, 아니었다.
이윽고 루시엘의 지팡이 가장자리에 푸른색 사파이어가 푱, 하고 박혔다.
이노센트 지팡이가 더욱 빛을 발하면서 허공에 둥실둥실 떠올랐다.
“오오!”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어떻게 되긴, 성공이다!”
“드디어!”
놀란 류프델과 길리아트가 서로를 얼싸안으며 외쳤다. 둘은 기뻐하더니 일 분만에 서로를 밀어내듯 떨어졌다.
“그래, 그럼 성공했으니 이 기쁜 소식을 루시엘에게 알려 주러 가야겠구나.”
길리아트가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가려고 하자, 류프델이 말했다.
“잠깐.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음?”
“루시엘이 준 다른 보석도 내주게나.”
“……?”
길리아트가 영문을 모르겠지만 순순히 보석을 내주었다.
“왜 그러는 거지?”
류프델이 씩 웃으면서 고글을 다시 내려 썼다.
“잘 하면 보석 네 개를 전부 박을 수 있을 것 같다.”
* * *
벨슈타인의 검은 깃발을 든 기수가 선두를 달리자, 그 뒤로 검은 날개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말을 타고 따랐다.
그 뒤로 백마를 타고 갑옷을 입은 공작 부인 솔리아페와 흑마를 탄 공작, 자르가 단장까지 모두 떠났다.
마물 토벌을 떠나는 긴 행렬을 보며, 키제프와 루시엘은 걱정이 되어 마음이 복잡했으나 이벨린은 말했다.
“걱정할 것 없단다, 얘들아. 마물 토벌이야 한두 번 가는 것이 아니지 않니. 두 사람이야 원체 강하고.”
이벨린의 다독임에 키제프도 말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루시엘, 너도 걱정하지 마. 두 분은 아무 일 없이 돌아오실 테니까.”
“응, 지난번에도 무사히 오셨으니까 이번에도 그러시리란 걸 알아.”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불안함에 자꾸 입술을 꼭 깨물게 되긴 했다.
‘강력한 마물이라고 했는걸. 게다가 어머님도 아직 병이 다 낫지 않으셨으니까.’
그러나 모든 것이 기우이길 바라면서 루시엘은 밝게 말했다.
“우리 오늘은 다 같이 아침 식사할까요?”
“그것도 좋겠구나. 하지만 아침 먹기에는 아직 시간이 이른걸? 너희들은 좀 더 자지 않고?”
이벨린이 웃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정말 이제야 막 해가 동쪽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루시엘이 고개를 붕붕 저었다.
“이미 잠이 다 깼어요.”
“아, 나 때문에 깬 모양이네.”
키제프가 미안한 듯 말했다. 사실 먼저 일어났다 이 사실을 들은 그가 놀라 물건을 떨어트린 탓이었다. 그 바람에 루시엘도 잠에서 깬 것이다.
“괜찮아. 나도 잠이 안 오는걸. 근데 할아버지는 왜 안 오실까.”
마법 세공에 필요한 마정석을 챙겨서 떠난 지 하루가 꼬박 지난 터였다.
“지팡이 때문에 가신 거지?”
“응.”
“잘 되고 있을 거야. 네 보석은 너처럼 강하니까.”
“응, 그럼 좋겠다.”
“오면 나도 보여 줘.”
이런저런 일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아침이었다. 루시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기도했다.
‘모두 잘되게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