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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122)화 (122/282)

<122화>

“그렇구나. 그런데 왜 대신들은 왕세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걸까요?”

루시엘은 아무래도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나라 사이의 일이라 하나하나 검증하는 건 위신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서 그럴지도 모릅니다. 괜히 상대를 의심하거나 하면 잘될 것도 안 될 수 있다고 믿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럴수록 확실히 해야 할 텐데. 나랏일이니까요.”

“저도 아가 마님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쪽에는 꽉 막힌 분들이 좀 많더라고요.”

엘링턴도 어깨를 으쓱거렸다. 루시엘이 물었다.

“결혼 전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면요. 그럼 절대로 깨뜨릴 수 없는 약속도 있을까요?”

“아, 고대 제국에는 그런 맹약을 나누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전통이요?”

“초대 황제 폐하께서 평원을 평정하고 야만족의 딸을 신부로 맞이하려고 했는데, 족장이 계속 거짓말을 하고 딸을 주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서로의 목숨을 걸고 맹약을 했답니다. 그 증표로 하얀 월계수 잎으로 만든 관을 쓰고 결혼을 했고 제국에선 영원한 맹약의 상징으로 하얀 월계수가 쓰인다네요.”

“……오, 그런 게 있었구나.”

‘옳지. 전통을 구실로 하얀 월계수 맹약을 제시하면서 메이너드 왕국의 속내를 떠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메이너드 왕국은 메이플 영지를 내어주진 않을 테니까.

엘링턴의 대답에 힌트를 얻은 루시엘은 클로디아 황녀에게 뭐라고 서신을 적을지 생각하면서 주스를 마셨다.

“근데 무슨 얘깁니까? 누가 결혼해요?”

엘링턴에게 딱히 비밀로 할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공개적인 장소에서 마구 떠벌릴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건 나중에 알려 줄게요. 근데 엘링턴, 저기…… 이 크레이프 케이크, 커다란 홀 케이크로 포장해 가도 될까요? 가족들에게도 나누어 주고 싶어요.”

지갑이 얇아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루시엘이 또랑또랑한 눈으로 쳐다보며 부탁하니, 또 안 들어줄 수 없었다.

“좋습니다. 그 정도야.”

“그럼 두 개?”

“…….”

“농담이에요. 홀 케이크는 제가 살게요.”

“아닙니다. 아가 마님에게 뭔들 아깝겠습니까. 이 정도야 무리 없습니다. 더 좋은 걸 사 드려야 하는데.”

엘링턴이 귀여운 조카 보듯 루시엘의 포슬포슬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나저나 엘링턴이 잘 도와줘서 유리공예도 진행이 잘 되고 있었다.

“오늘 작업실 데려가 줘서 고마웠어요. 생각보다 빨리 완성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뭘요, 아가 마님이 신경 쓰시는 일이니 당연하지요. 생각보다 두 사람의 합이 잘 맞는 듯해서 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갈리우스 백작님이 사람은 깐깐해도, 막스 씨의 능력을 끌어 올려 줄 겁니다.”

“맞아요. 참, 엘링턴.”

루시엘이 웃으면서 무언가가 든 작은 주머니를 하나 그에게 내밀었다. 엘링턴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가 지레짐작했다.

“뭡니까, 딸기 사탕?”

“응, 뇌물. 집에 가서 먹어요.”

사실 자신이 만든 보석을 넣었으니 진짜 그랬다가는 이빨이 나갈지도 몰랐다.

설마 사탕인 줄 알고 정말 입에 넣진 않겠지?

루시엘이 잠시 걱정했다.

* * *

클로디아 황녀의 정략결혼에 대한 보고를 들은 공작이 턱을 짚으며 말했다.

“너무 조급하게 움직이는군. 대신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한 거라면 나름 성공이겠어. 하지만 거기 넘어가면 안 될 텐데. 메이플 영지를 그리 쉽게 내어줄 리가…….”

“클로디아 황녀를 압박하려고 그랬던 걸지도 모르겠어요. 어쨌든 월계수 맹약을 말하면 대신들도 납득시키면서 메이너드의 속내가 드러날 것 같아요.”

“월계수 맹약은 괜찮은 의견이군. 고루한 대신들은 그런 것에 약하니까.”

공작의 말에 루시엘은 엘링턴이 알려 주었다고 공을 돌린 후 말을 이었다.

“다음은 무카스 찻잎 교역권인데, 무카스에는 미량의 독성이 나중에 발견되거든요. 장기간 복용 되면 위험해져요.”

“그 위험성을 단기간에 증명하기란 어렵겠군.”

“네. 약초에 능통한 자도 알기 어려울 거예요. 그래서 무카스를 대체할 것이 있다면 좋을 것 같은데…….”

“어머니께 한번 물어보는 것이 좋겠군.”

루시엘이 미간까지 좁히면서 고민에 잠겨 있자, 공작은 크레이프 케이크 접시를 힐끔 보았다.

“근데 저건 나더러 먹으라고 사 온 건가?”

“네, 포실포실 부드럽고 달콤해요.”

느른한 자세로 앉아 있던 공작이 케이크로 손을 뻗었다. 단 것을 입에 넣은 그가 살짝 녹여 먹고는 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루시엘, 처음으로 내 입맛을 사로잡은 케이크였다.”

그가 케이크를 먹고 찬사를 하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 * *

엘링턴이 사 준 크레이프 케이크는 가족들에게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루시엘의 디저트 선물이라는 말을 듣고는 전부 케이크 홀릭이 된 것처럼, 크레이프 케이크를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마싯어, 이고 천사 케이쿠야. 퐁당퐁당해!”

“원래 훈련 중에 이런 거 먹으면 안 되는데…….”

입 주변이 생크림 범벅이 된 레오니가 말했고, 키제프는 안 된다면서도 접시를 비워 낸 후 입가를 냅킨으로 닦고 일어섰다.

“앗, 정말? 미안. 그치만 너무 황홀하게 맛있지?”

양손을 붙잡고 사르르 녹는 눈으로 말하는 루시엘의 눈을 보면서 키제프가 그녀의 머리를 가만 쓸고 작게 중얼거렸다.

“하여간 해롭다니까……. 적당히 먹어, 루시엘.”

“으응. 훈련 힘내!”

루시엘은 벌써 저 멀리 달려가는 키제프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길리아트는 외출을 나갔고, 솔리아페는 침실에서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사용인들을 통해 들었다.

“할머니께 가져다드려야지. 무카스에 대해서 여쭈어볼 것도 있고.”

루시엘은 케이크를 들고 이벨린을 찾아갔다. 금세 시녀들이 티테이블을 차려 주었다.

이벨린의 취향을 반영한 티포트와 찻잔은 그녀처럼 우아했다.

물결 문양의 레이스 그릇들은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처럼 어여뻤다.

“우리 손주 며느리 덕분에 이런 것도 다 먹어 보는구나. 어머, 보드랍고 맛있는걸. 밀크티와 마시니 아주 딱이구나.”

“입맛에 맞으셔서 기뻐요.”

맛있게 먹어 주는 이벨린을 보자 루시엘은 뿌듯해졌다. 얌전히 차를 홀짝이는 루시엘을 보면서 이벨린이 슥 물었다.

“루시엘, 뭔가 고민이 있니?”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간의 사정은 이벨린도 전해 들었을 터였다.

그 이후로 가족 회의가 어른들 사이에서 자주 열리는 모양이었으니까.

“할머니, 무카스 찻잎보다 더 좋은 우울증 치료제가 없을까요? 그러면 황성의 대신들도 납득할 테니까요.”

“음, 이 할미 생각에는 가장 좋은 우울증 치료제는 그거지. 내 이야길 들어 줄 누군가. 드래곤들도 오랜 세월을 살면서 공허함과 외로움, 우울증을 느끼곤 하거든. 인간들과는 상황이 다르겠지만.”

“아……. 무슨 말씀이신지 알 것 같기도 해요.”

과거의 루시엘도 언제나 적막하고 고통스러웠다.

그때 루시엘의 이야기를 들어 줄 누군가가 있었더라면, 조금은 덜 힘들었을지도 모르지.

루시엘은 과거를 생각했다.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작 상상의 상대에게 말하는 게 전부였지.’

실제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도 누군가에게 털어놓기 어려운 고민을 안고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 주는 사람들이나 도구가 있다면 좋겠어. 마음이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거야. 의사랄까, 해결사랄까.’

물론 무카스처럼 간단히 치료할 수 방법은 아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훨씬 자연스럽고 건강한 방법이었다.

해답을 찾은 루시엘은 이벨린에게 인사를 올린 다음, 방으로 돌아가 클로디아에게 보낼 서신을 부지런히 적었다.

‘부디 그녀에게 도움이 되기를.’

그러나 클로디아의 소식을 듣기도 전에, 잠잠하던 공작성을 뒤흔드는 일이 일어났다.

* * *

“각하, 큰일입니다. 북부 설원과 닿은 마을 인근에서 거대한 마물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정찰조들의 보고를 공작에게 전달하는 자르가의 표정도 예사롭지 않았다.

일반적인 마물이라면 굳이 보고까지 할 필요가 없을 터. 게다가 이런 한밤중에 더더욱 보고할 리 없었다.

“거대 마물이라니? 발견된 적이 있었던 종류인가?”

“……여우 마물입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문라켕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문라켕이라면 아주 강력한 마물이 아닌가. 희생자나 피해자가 있나?”

“민간인 4명과 과거 자유 연합 길드 토벌대원이었던 자가 1명 사망했습니다.”

“이런, 큰일이군. 한데 그 길드는 해산했다고 하질 않았나?”

“예, 아마도 단독 행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군. 한시라도 빨리 퇴치를 해야겠다. 검은 날개 기사단을 최정예로 꾸리고, 아침이 되기 전에 출발한다.”

“예, 각하.”

자르가를 내보낸 후 루이비드는 서둘러 솔리아페가 잠든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자유 연합 길드 토벌대라면, 솔리아페가 몸담았던 길드였다. 그녀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겠지.

혹여 말없이 사라졌을까 봐 그는 초조한 마음으로 그녀의 방문을 열어젖히려는데 잠겨 있었다. 그가 다급히 문을 두드렸다.

“솔리아페, 제발 문 좀 열지.”

일 분 정도 답이 없자 문을 부숴 버릴 심산으로 다가섰는데, 달칵하고 열렸다.

파자마 위에 숄을 걸친 그녀가 말간 얼굴로 나왔다.

“……루이?”

“문은 왜 잠갔지?”

“오늘 당신이 철야한다고 했으니까 안 올 줄 알았어. 게다가 항상 바빴으니까.”

“…….”

미안하다는 말을 차마 못 하고 할 말을 잃은 그에게 솔리아페가 웃으며 말했다.

“알아, 항상 일에 치여 바쁜 거. 그런 미안한 표정 지을 거 없어.”

“……이해해 주니 고맙군.”

루이비드가 침실 안으로 잠시 들어서자, 솔리아페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잠깐 쉬러 왔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던 루이비드가 답했다.

“내일 설원에 다녀와야 해.”

“설원에? 무슨 일로?”

“골치 아픈 마물이 생겼다는군.”

루이비드의 말에 솔리아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도 조금 전 토벌대 동료 한 명에게서 날아온 매를 통해, 소식을 들었다.

‘문라켕은 분명히 과거에 전부 죽인 줄 알았는데, 어떻게 된 걸까.’

게다가 마커스가 홀로 상대하다가 당했다고 들었다. 이건 토벌대가 제대로 사후 처리를 하지 못한 책임도 있었다.

솔리아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런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루이비드가 낮게 속삭였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응?”

“당신 또 말없이 사라지면 안 돼. 그러니 마음먹었다면 지금 포기해. 누구 미치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루이비드의 붉은 눈이 집요하게 달라붙더니 솔리아페를 당겨 품에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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