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에바 집사장님이 기다리고 계신다네요, 아가 마님.”
“앗, 정말?”
에바가 아침부터 별궁까지 와서 기다린다는 건 루시엘에게 특별한 볼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베시, 오늘은 대충하고 나갈래. 에바가 기다리니까…….”
루시엘은 에바가 신경 쓰여 베시에게 재촉했지만, 그녀는 느긋하게 말했다.
“잠깐만요. 그래도 파자마 차림으로 나가실 수는 없어요.”
블루베리처럼 보라색이 감도는 파란 원피스에 헤어밴드를 두르고 나서 루시엘은 베시가 문을 열어 주기도 전에 포르르 뛰어나갔다.
“에바! 무슨 일이에요?”
응접실 소파에서 로즈와 대화를 나누던 에바가 일어나더니 다가와 루시엘과 눈을 맞추었다.
“아가 마님, 천천히 나오셔도 되는걸요. 급한 게 아니니까요.”
“아……. 그럼 다행이지만.”
“한 잔 드릴까요?”
“응.”
루시엘이 전용 소파에 걸터앉자, 로즈가 예쁜 꽃이 그려진 찻잔에 꿀자몽티를 따라 주었다.
“황성의 클로디아 황녀님께서 보내신 서신을 전해 드릴게요.”
“클로디아 황녀님!”
황가의 금색 인장을 보자 루시엘의 얼굴이 단박에 밝아졌다. 황성의 우편 마차는 일반 마차보다 더 먼 거리까지 이동 가능한 게이트를 사용해서 빠른 편이었다.
클로디아 황녀가 황성에 잘 도착했는지, 잘 지내고 있는지도 궁금해서 얼른 편지를 열어 보고 싶었다.
그런 루시엘의 표정을 읽은 탓인지, 에바는 서둘러 다른 용건도 말했다.
“그리고 큰 마님께 전달받았는데 아가 마님의 매월 수익금은 어떻게 할까요?”
“당장은 쓸 계획이 없는데 그냥 보관해 두고 싶어요.”
“그렇다면 계좌를 개설해 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추후 준비가 되면 마도사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좋아요.”
“네, 그럼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응! 고마워요, 에바.”
이내 루시엘은 에바에게 배웅을 해 준 다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클로디아의 서신을 열어 보았다.
기분 좋은 인사로 시작된 서신이었지만 고민을 털어놓은 내용이 계속되자 루시엘의 표정도 덩달아 흐려졌다.
서신을 다 읽은 루시엘은 고민에 잠겼다.
클로디아 황녀가 벌써 정략결혼을 할 수도 있다니, 큰일이었다. 게다가 레이놀드 황자가 메이너드의 알프레도 왕세자와 친구였다고?
그렇다면 역시 레이놀드가 클로디아 황녀의 정략결혼에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자신이 황태자가 되려고 일부러 그렇게 했던 거야.’
클로디아 황녀는 황후의 적통이자, 황후 폐하도 살아 있어 든든한 외가라는 큰 뒷배경도 있었다.
더군다나 힐스 후작가는 몇 대째 황후를 배출해 온 힘 있는 가문이었다. 다만 그만큼 다른 대신들의 강한 견제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정무 회의에서 큰 소리를 내지 못했겠지.’
그에 비해 레이놀드의 외가인 하만 자작가는 내세울 것이 없는 평범한 가문이었다. 왕위 계승권마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얻은 자격일 뿐이고.
참으로 빈약하면서도 보수적이고 고루한 이유였다. 루시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클로디아 황녀의 정략결혼을 막아야 해. 그래야 벨슈타인에도 도움이 되는 길로 갈 수 있어.’
메이플 영지와 무카스 교역권이라.
무카스 찻잎은 우울증에는 좋지만, 십 년 후에 독성이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미량의 독이라 당장 죽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복용하면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었다. 이건 굳이 필요 없는 조건이지만 대신들을 납득시킬 다른 대체 방안이 있다면 좋을 텐데.
메이플 영지에 대한 것도…….
루시엘은 머리를 굴리며 고심했다.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던 루시엘은 머리를 붕붕 흔들었다.
아무래도 영 생각이 안 나는 게 달달한 걸 먹어야 해결이 날 것만 같았다.
‘주방에 직접 가서 세스 주방장에게 특별 간식을 달라고 해야지.’
가끔은 직접 가서 요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것도 유쾌한 경험이었다.
맛있는 향기가 나는 부엌을 둘러보는 것도, 주방 사람들이 제게 먹을 것을 하나씩 쥐여 주는 것도 재미있었다.
어느새 다시 들뜬 기분으로 루시엘은 본성의 식당으로 향했다.
그러나 곧 누군가와 마주쳤다. 선한 눈매를 곱게 접으면서 엘링턴이 얼굴을 쏙 내밀었다.
“앗.”
“아가 마님.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엘링턴, 무슨 일이에요?”
“봉급 탔으니 맛있는 걸 사 드리려고요. 그리고 좋은 구경거리도 있습니다.”
엘링턴이 뒷짐 지며 잠시 헛기침을 에헴 했다. 지난번에 그가 맛있는 걸 사 준다던 약속이 떠올랐다.
“그 약속 오늘 지키시는 거예요?”
엘링턴이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웃자 루시엘이 꼬치꼬치 캐물었다.
“근데 좋은 구경거리라는 건 뭐예요……? 일과 관련된 거죠? 아, 혹시 갈리우스 백작님?”
그러자 김이 팍 샜다는 듯 엘링턴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아니, 너무 눈치 빠르신 거 아닙니까. 어쨌든 오늘은 제가 납치하겠습니다.”
엘링턴이 방긋 웃으며 농담하자 뒤에서 어둠의 기운이 느껴졌다. 지나가던 사용인들이 힐끔거리기도 했다.
‘감히 우리 아가 마님을!’
하는 시선들이었지만 루시엘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포르르 그를 따라갔다.
“……얼른 가요! 나도 궁금해요.”
갈리우스가 벨슈타인의 후원을 받게 된 일까지는 알고 있었지만, 이후에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전혀 몰라 아쉬웠는데. 먼저 소식을 듣다니 반가웠다.
루시엘은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엘링턴을 따라나섰다.
이윽고 마차를 타고 다다른 곳은 벨슈타인성 근처에 마련된 갈리우스 백작의 개인 작업실이었다.
온통 하얀 커튼으로 둘러싸인 곳에는 여신의 흉상, 액자 두 개, 벽에 세워진 활엽수 화분 하나. 그리고 기다란 테이블과 의자만이 있었다.
작업실이라고 하기에는 단조롭고 휑한 공간.
순간 너무도 조용해서 루시엘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엘링턴의 뒤에 있었다.
루시엘이 엘링턴을 톡톡 두드렸다.
“여기, 맞아요?”
“네. 아가 마님.”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해요? 아무도 없는 것 같아요.”
“그러게 말입니다.”
다른 방으로 이어진 듯 바람이 부는 복도를 엘링턴이 먼저 뚜각뚜각 갔고 루시엘이 총총 따라갔다.
그러자 익숙하면서도 낯선 뒷모습이 보였다.
갈색 더벅머리에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 있던 청년 막스 하멜이 간이침대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의 뒤로 스테인드글라스의 도안이 수십 장도 넘게 그려져 있었고, 건축물을 직접 답사하고 왔는지, 현장을 그려 온 스케치들도 잔뜩이었다.
‘그동안 엄청 열심히 배우고 다녔나 봐.’
한쪽에는 제작 중인 스테인드글라스 창문도 보였다.
조금 어설픈 부분도 보였지만 막스가 만든 튤립 그림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아름다웠다.
물고기 모양의 쟁반이나 동그란 접시를 만든 것도 있었다.
유리들을 잇는 납땜이 균일하지 않고 비뚤거렸지만 나름의 정성이 느껴졌다.
‘와, 예쁘다. 역시 스테인드글라스는 건축물에만 통하는 게 아니었어. 이걸 얼마 만에 배운 걸까? 솔직히 기대 이상이야.’
아마도 막스가 여기서 지내면서 부지런히 배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밖에서 갈리우스 백작이 잔소리를 퍼부으면서 들어왔다.
“이봐, 제대로 배워 보겠다는 사람이 그렇게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나? 그만 일어나!”
“……예? 예예! 오셨습니까, 백작님.”
군기가 바짝 들었는지 잠에서 깬 막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게을러 터져. 어느 세월에 저 창문을 완성할 건가? 나도 바쁜 몸이란 말이다. 자네에게 기술을 전수하는 것 말고도 할 일이 아주 수두룩해. 남은 건축 계약이…… 응?”
커튼에 가려져 엘링턴의 모습을 뒤늦게 본 갈리우스가 말을 멈췄다.
“아, 엘링턴, 자네 이제 왔군. 근데 왜 거기 고양이처럼 숨어 있는 것이지?”
엘링턴이 잠시 들른다는 이야기는 전해 둔 터라, 작업실을 개방해 놓은 참이었다.
“하하, 안녕하십니까, 갈리우스 백작님. 그냥 너무 조용해서 말이죠.”
“안녕하세요. 저도 왔어요. 감시하러.”
루시엘도 커튼 옆으로 얼굴을 쏙 내밀었다.
“오냐, 루시엘.”
“어, 오랜만입니다. 아가 마님.”
갈리우스도, 막스도 루시엘을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막스 씨, 갈리우스 백작님께 스테인드글라스를 잘 배우고 있는 것 같네요. 여기서 지낸 지 얼마나 되었어요?”
“……보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정말이에요? 보름 만에 저 뒤에 있는 창문이랑, 접시랑 쟁반 다 만든 거예요?”
막스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네, 아직은 어설프지만 갈리우스 백작님께서 많이 도와주십니다.”
“그렇군요. 오늘은 살펴볼 겸 왔는데 격려의 인사를 드리고 갈게요.”
루시엘은 애써 기쁜 티를 내지 않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 몇 년 정도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막스의 열정과 성과를 보니 그 시기가 앞당겨질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가면 생각보다 유리 공예품을 빨리 완성시킬 수 있겠어.’
그렇게 된다면 잘하면 이번 여름 살롱에서 자그만 유리 공예품이라도 선보일 수 있지 않을까?
루시엘이 진홍빛 눈을 빛내며 혼자서 히히 웃고 있자, 엘링턴이 물었다.
“아가 마님, 혼자 왜 그렇게 웃으시는 건데요. 우리 같은 편이잖습니까, 공유 좀 해 주세요.”
“음, 엘링턴. 우선 우리는 자리를 비켜 줄까요?”
어느새 갈리우스 백작의 조언을 받으면서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 막스를 보며 두 사람은 작업실을 나왔다.
이윽고 시내의 케이크 가게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루시엘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도도도 진열대 앞으로 가서 걸음을 멈췄다.
유리 진열대에 놓인 케이크들은 하나같이 먹음직스럽고 알록달록 예뻤다.
어떤 것은 무지개처럼 일곱 가지 색으로 된 것도 있었고, 어떤 것은 층마다 켜켜이 생크림이 쌓인 황홀한 케이크도 있었다.
케이크에 홀린 루시엘이 진열대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걸 보던 엘링턴이 웃겨서 그만 이마를 짚고 말았다.
“누가 보면 공작성에서 굶기는 줄 안다니까요.”
“엘링턴…….”
꽤 비싼 가게였지만 이미 먹고 싶어 죽겠다는 눈으로 루시엘이 쳐다보니 안 사 줄 수가 없었다. 엘링턴이 말했다.
“제 봉급은 이제 아가 마님 거니까, 원하는 거 다 드세요. 아, 그래도 가게는 못 사 드립니다. 그건 각하께 사 달라고 하세요. 아셨죠?”
“엘링턴 최고예요!”
루시엘이 방긋 웃으면서 문을 열려고 낑낑 매달리는 걸 엘링턴이 가볍게 열어 주었다. 딸랑, 하고 문이 열렸다.
“큭, 아 그 말을 각하와 도련님이 들으시면…… 저는 최소 사형이겠죠?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즐기겠습니다. 마음껏 고르세요.”
“진짜?”
엘링턴은 왕처럼 루시엘이 고르는 케이크를 잔뜩 사 주었다. 루시엘은 레인보우 케이크와 크레이프 케이크, 딸기 생크림 케이크까지 달콤한 케이크의 향연에 정신을 못 차리고 즐겼다.
케이크를 오물오물 먹은 다음, 자몽 주스를 마신 루시엘은 문득 클로디아 황녀의 정략결혼 문제가 생각났다.
달콤한 게 들어가니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그래! 내가 갇혀 있던 방 안 천장화에 제국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는데……!’
가물거리는 기억이지만, 황녀가 시집을 간 후였음에도 메이플 영지가 타이라 제국의 영토에 속해 있지 않았다.
“엘링턴. 정략결혼을 할 때 내거는 조건을 상대가 안 지키기도 하나요?”
“……비일비재하죠. 사실 결혼식 끝나 봐야 아는 거니까요. 그래서 보통은 조건을 미리 계약으로 체결하곤 합니다.”
“그럼 입으로 말한 건 아무 효력이 없는 거네요?”
“엄밀히 따지자면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