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120)화 (120/282)

<120화>

클로디아는 조바심에 국정 회의가 열리는 대회의장 앞을 서성거렸다. 문을 지키는 경비병이 제대로 문을 닫지 않은 탓일까.

문이 저절로 살짝 열렸다. 이에 클로디아는 문에 바짝 붙어 귀를 기울였다.

끼이이.

국정 회의장의 열린 문틈으로 대신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들은 지도까지 펼쳐 놓은 채, 메이너드의 왕세자가 제시한 것들을 얻으면 무엇이 좋은지, 제국에 가져다주는 이점이 무엇인지, 제 혼담에 대해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었다.

“이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최상의 조건들입니다. 메이플 영지가 벌어들이는 엄청난 수익은 가히 황금보다도 더 가치가 높습니다.”

“무카스 교역권은 또 어떻고요. 두 가지 다 거머쥘 좋은 기회입니다. 폐하.”

대신들이 토론을 이어 가는 동안, 침묵하던 노이슈반이 말했다.

“물론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만, 너무 성급하게 황녀를 보내고 싶진 않은 게 사실이다. 그 아이의 나이는 고작 열여섯이 아닌가.”

“폐하, 외람된 말씀이오만 열여섯이면 그리 어리신 것도 아닙니다.”

“경들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정식 청혼이 도착한 것도 아니질 않은가. 시간을 갖고 기다려 보도록 하지.”

경비병이 회의장의 문을 확인하려는지 이쪽으로 다가오자 클로디아는 입술을 살짝 베어 물며 그 자리를 떠났다.

다행히 아버지는 제 편을 들어 주고 계시지만, 대신들의 목소리가 저리도 거세면 결국 꺾일 수밖에 없었다.

어두운 복도 벽면에 비스듬히 기대 있던 레이놀드가 클로디아를 보자 몸을 바로 세웠다.

“이거, 알프레도가 돌아가기도 전인데 회의장이 아주 뜨겁군.”

“레이놀드? 너는 여기 웬일이야?”

“그냥. 지나가던 길에 들렀어.”

황자궁과 정무궁은 정반대의 방향인데 그럴 리가.

레이놀드는 자신이 결혼하길 원하고 있으니 염탐을 하러 온 것이겠지.

회의장의 분위기든, 클로디아의 표정이든 말이다.

“누이 의사는 어떤데?”

몰라서 묻는 것일까.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일부러 묻는 듯한 어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미 누구보다도 클로디아의 의사를 잘 알고 있을 그가 물으니 말이다.

“……어떨 것 같은데?”

“아아, 물론 결혼의 결정은 오롯이 누이 몫이 아니겠지만, 그냥. 난 누이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정말 그녀를 걱정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클로디아는 이제 더는 믿지 않았다.

“……레이놀드.”

“음?”

“더 듣고 싶진 않구나. 이만 실례할게.”

클로디아가 싸늘하게 돌아서자 레이놀드가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클로디아는 정무궁을 빠져나와 손톱을 깨물며 생각에 젖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입술을 깨물며 드넓은 황성의 회랑을 거닐었지만, 해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싶지만 생각나는 이가 없다.

라라 부인과 어머니에게 말하면 걱정만 늘어날 것이 뻔했고, 황성의 스승도, 시녀로 들어와 있는 명문가의 영애들도 전부 대신들과 맞닿아 있었다.

그러니 누구에겐들 속내를 털어놓기란 어려웠다.

이 커다란 황성에서 속마음을 시원하게 털어놓을 친구 한 명 없다니 참으로 적막했다.

클로디아는 한숨을 폭 내쉬며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유리병에 꽂혀 있던 실거베라 꽃을 바라보았다.

루시엘.

문득 그 자그맣고 어리지만 하얀 얼굴을 가진 소녀가 보고 싶어졌다. 맑은 눈망울과 귀여운 볼살은 보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졌다.

무엇보다 루시엘과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안했다.

어려서부터 남을 경계하는 것이 몸에 밴 자신이지만 그런 경계 따윈 소용없이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신비한 힘을 가진 아이였다.

“참으로 이상하지. 공자비를 만난 것은 단 한 번이었는데……. 편지라도 보내 볼까?”

클로디아는 금세 기분이 산뜻해진 얼굴로 책상에 앉아 종이와 깃펜을 들었다.

* * *

루시엘은 이벨린 곁에 서서 건너편에 있는 기사단 연무장을 살짝 구경 중이었다. 기사들 몇몇과 가볍게 몸을 푸는 키제프의 모습이 보였다.

드래곤의 땅이자 이벨린 할머니의 고향, 드락카에서 키제프의 새로운 검술 스승이 온다고 기사들도 소란스러운 것 같았다.

“도련님의 검술 스승이 드래곤이라니. 키제프 도련님, 괜찮으실까.”

“드락카의 검법은 소드 마스터도 상대하기 까다롭다던데.”

“엄청나겠구만……. 과거 스콰이어 무투대회에서 1등을 거머쥔 자도 드락카의 검법을 썼다는 소문이 있잖아.”

이벨린의 정체에 대해서 모르는 평기사들의 두런두런한 말소리에 이벨린은 그저 나긋하게 웃을 뿐이었다.

루시엘도 키제프의 검술 스승이 어떤 분인지 궁금했지만 기사단 내부에서 공작과 새로운 스승, 자르가 단장까지 어른들의 이야기가 길어지는 모양이었다.

대기하던 키제프는 살짝 긴장했는지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루시엘과 눈이 마주치자, 이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다가 안에서 자르가 단장이 그를 부르자, 경직된 채로 몸을 돌려 돌아갔다.

루시엘은 힘내라는 뜻으로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루시엘, 너무 걱정하지 말렴. 새로운 스승이 좋은 자라는 건 내가 보장하지. 키제프는 강한 아이니 잘 적응할 거란다.”

“네, 저도 분발해야겠어요.”

“루시엘도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하렴.”

“나중에요. 할머니.”

“그래, 그래. 네가 바쁜 것은 알고 있지. 혹시 필요한 것이 생기거든 할미에게 얼마든 요청하렴.”

“아, 아니에요. 그 금화 지갑. 마법이 걸린 줄도 모르고 덜컥 받았어요.”

“하지만 퍽 유용하지?”

루시엘은 그 의견에는 부정할 수 없어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요긴하게 잘 썼어요.”

루시엘이 수줍게 웃자 이벨린이 아이의 뺨을 쓰다듬으며 작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번 달부터 네 이름으로 된 플로린 부티크와 아기 영지의 수익금, 그리고 네 몫의 예산이 배정될 거란다. 부티크 수익은 그동안 밀린 것들도 한 번에 들어가겠지.”

“앗, 용돈을 주셨는데 또요?”

“앞날을 대비하려면 이런저런 것들을 해야 하잖니.”

그녀 말대로 돈이 들어갈 일들은 많긴 했지만, 루시엘은 봉투를 열었다가 너무도 커다란 숫자에 도로 닫아 버렸다.

“응? 액수가 마음에 안 들어?”

“이…… 이게 일 년치인가요?”

“아니, 부티크를 제외하고 매달 지급금이란다.”

이벨린이 싱그레 웃었다.

“하, 하지만 너무 많은데.”

“돈 쓰는 법은 얼마든지 나에게 물어보렴. 그리고 할머니는 볼일이 있으니 먼저 성으로 돌아가겠니?”

“네. 저도 제 영지에 다녀올래요.”

루시엘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 기사 랄프에게 다가갔다. 미리 마차를 준비해 놓은 그가 쾌활하게 물었다.

“아가 마님! 어디로 모실까요?”

“아기 영지로 가 주세요, 랄프.”

루시엘은 근거리용 이동 마차를 타고 아기 영지로 향했다.

호위 기사와 함께 있을 때는 보통 이렇게 이동하는 편이었는데, 루시엘은 밖이 뻥 뚫려서 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달릴 수 있는 이 이동 마차를 타는 일이 퍽 재미있었다.

옆으로 지나가는 벨슈타인의 너른 정원이나 영지의 한가로운 정경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도 기분이 좋았다.

쨍하게 반짝이는 햇살도, 하늘하늘 불어오는 실바람도 완벽하다.

오늘은 중요한 용건이 있었다.

마탑에서 에리카가 연구를 하러 오는 날.

오기 전부터 에리카는 수업 시간에 만나는 남동생 에레스를 통해서 루시엘에게 쪽지를 전달했었다.

「이번 주는 마탑에서 휴가까지 얻어서 주말을 온통 연구에 할애할 수 있겠어요. 너무 행복해요. 그날 만나요♡」

‘휴가를 온통 연구에 쏟아붓는 게 행복하다니, 에리카는 정말 뼛속까지 마도사라니까.’

루시엘은 그녀의 쪽지를 생각하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동안 별장 안 보석 방에 차곡차곡 모아 놓은 보석들을 쭉 둘러본 루시엘은 왠지 뿌듯해졌다.

날이 갈수록 보석을 채운 상자와 자루 주머니들은 가득해졌다.

‘곧 이걸로도 부족해지지 않을까?’

그런 걱정이 잠시 들 만큼.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 토파즈는 각각 4대 원소―불, 물(얼음), 바람, 땅―의 힘이 들어 있었으니 이제 나머지 보석들도 연구가 필요했다.

루시엘은 가장 안쪽에 보관해 놓은 검은색 상자를 열었다.

휘황찬란한 무지갯빛을 가진 투명한 보석. 다이아몬드였다.

그동안 가장 그 힘이 궁금했던 보석이자, 루시엘이 이번 생에서 처음으로 보석의 힘을 각성하고 만든 의미가 깊은 보석이었다.

무엇보다 이 보석에서 느껴지는 생명력은 피닉스의 장미에게서 느껴지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더 강렬했다.

아직 솔리아페의 병은 낫지 않았으니, 그녀를 지킬 수 있게 미리 연구를 해 두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연구소 앞에는 이미 에리카가 도착해 있었다. 역시 그녀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루시엘 님!”

“에리카 언니!”

서로의 이름을 부르면서 마주한 두 소녀는 함께 연구소 건물로 들어섰다.

“언니가 연구해 준 보석들을 제 지팡이에 세공할 방법을 찾았어요. 지금 의뢰를 해 놓았는데 어떻게 결과가 나올지 두근두근해요. 어쩌면 실패할지도 모르지만요.”

루시엘의 말에 에리카는 절대 안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실패하면 안 돼요. 꼭 성공하실 거예요. 귀한 보석들이니까요.”

“그럴까요……? 아 참! 이건 오늘 연구해 줄 보석이에요. 이 보석은 하나뿐이라 연구하기가 망설여졌지만, 그래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커다랗고 신비로운 힘을 가진 것 같거든요.”

루시엘의 말에 에리카의 눈도 커다래졌다.

“이건 다이아몬드잖아요? 게다가 하나밖에 없다니……. 아아, 긴장되네요. 다른 보석들과는 좀 다른 힘을 가진 듯해서 연구가 더 오래 걸릴 수도 있겠어요.”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에리카의 손을 붙잡았다. 둘은 비장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네, 꼭 부탁해요. 다이아몬드에 어떤 힘이 숨어 있는지 알고 싶어요.”

“걱정 마세요. 이 날을 위해서 제 휴가가 존재했던 거예요!”

에리카가 주먹을 발끈 쥐면서 소매를 걷어 올렸다.

“고마워요. 에리카 언니가 최고예요.”

이렇게 제 일에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니 무척 든든했다.

루시엘은 그녀를 꼭 끌어안았고, 에리카는 그대로 얼어붙었다가 곧 사르르 녹아내릴 듯 웃었다.

“아아, 인형이 껴안는 것 같아요. 몽실몽실 부드러워! 우리 루시엘 님, 주머니에 넣어서 제 방에 데려가고 싶잖아요. 아니, 뒷말은 잊어 주세요.”

“응? 아니에요. 저도 좋은걸요. 다음에 꼭 초대해 주세요.”

루시엘이 눈을 초롱 빛내며 말하자, 에리카가 흐흑, 하고 감격의 신음을 쏟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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