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황가라면 마검을 접할 기회가 많은 건 사실이다.”
호크아이 조직원의 정보에 의하면 헨드릭 황실의 보물 중 세상에 공개된 백여 점의 물건들은 빙산의 일각이라고 했다.
그중 특별한 힘을 가진 검은 세 자루였다. 초대 황제가 사용했다는 마검, 성스러운 치유의 힘을 가진 신전과의 우호를 증명하는 성검, 고대 유적에서 발견된 불꽃을 일으키는 마법이 깃든 마검.
공개된 검은 대부분 상징적인 의미의 검들이었고, 진짜 귀중한 마검이나 성검은 모두 숨기고 있다고.
그러니 황자가 마음을 먹으면 다른 마검은 얼마든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선 황가가 어떤 특별한 검을 소유하고 있는지 따로 더 조사해 보아야겠군.”
바쁘게 굴러가는 그의 속내를 파악했는지 루시엘이 공작의 팔목을 흔들었다.
“아직 미래를 바꿀 시간은 많이 있어요. 그가 벨슈타인을 치러 왔던 시기는 9년 뒤니까요.”
“그렇군. 하지만 고작 검 하나로 내가 죽고, 벨슈타인이 망했다니 믿기지 않는데.”
공작은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한다는 투로 말했다. 루시엘은 다시금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 검에는 열두 개 홈이 있었어요. 그 홈은 사람의 영혼을 삼켜서 소울 이터로 만든 흔적이래요. 그 위에 제 보석을 박은 거고요.”
“아, 그 빌어먹을 소울 이터에 대해선 들었다.”
공작이 분노를 누르듯 차가운 음성으로 말하자 루시엘도 씁쓸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마검에 소울 이터, 그리고 제 보석의 힘이 합쳐져 어떤 작용을 한 것 같아요. 황태자는 제가 보석을 만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마도사를 시켜 보석의 힘을 연구하게 만들었으니까요.”
“음…… 루시엘 네 보석의 힘이 검의 힘을 증폭시킨 모양이군.”
공작의 추측에 루시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몰라요. 지금 마도사 에리카에게 제 보석에 대한 연구를 부탁했는데 엄청난 마력과 원소의 힘을 품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보석을 네 지팡이에 세공할 방법을 찾으려고 다녀온 것이고.”
“네. 반드시 그를 막을 거예요.”
자그만 아이의 눈동자에 가득 찬 증오의 건너편에는 그것이 있었다.
미래를 향한 걱정과 조급함, 불안감. 그걸 본 공작이 느긋하게 말했다.
“루시엘, 황자든 악마든 그 누가 나타난다고 해도 겁먹지 마. 모든 건 대비하면 된다.”
“만약 대비를 못 할 일이 일어나면요?”
“그땐 너 자신과 벨슈타인을 믿어야지.”
공작이 씩 웃으면서 루시엘의 어깨를 토닥였다. 루시엘은 그 말이 류프델에게 자신이 했던 대답임을 기억하곤 마주 웃어 주었다.
한편 루시엘과의 대화에서 공작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지난번 팔로스의 기억에서 최면으로 뽑은 여러 가지 정보들.
‘한시라도 빨리 검의 힘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크리스털 페어리의 보석이 필요하다!’
“루시엘, 황좌의 보좌관 팔로스의 기억에서 알아낸 정보 중 몇 가지 의문스러운 것이 있었다.”
“어떤 정보인가요?”
“황자 말고 팔로스에게 크리스털 페어리를 찾으라는 명령을 내리는 다른 자가 있는 것 같군. 안 그래도 내내 이상하단 생각을 했다. 아직 어린 황자가 전부 계획한 일이라기에는 몸집이 큰 일이다.”
“그렇다면 황자 뒤에 누군가 있을 가능성이 높겠네요.”
예상치 못한 일에 루시엘도 놀랐으나 일리가 있었다. 그 모든 걸 지금 고작해야 열여섯 살인 어린 황자가 전부 계획했다고 하기에는.
표면에 드러난 자는 황자지만, 그 이면에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게 누구일지 단서라도 떠올려야 한다.
“과거에 황자의 최측근 중 인상적인 자가 있느냐?”
공작이 물었지만 루시엘이 고개를 저었다.
“팔로스 보좌관 말고는 모르겠어요. 가장 인상적인 사람은 황자를 낳은 카일라 황비인데, 그녀는 이미 죽었으니까요.”
루시엘은 그렇게 씁쓸하게 말하면서 과거를 회상했다.
레이놀드는 죽은 황비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극도로 꺼렸었다.
황태자가 루시엘을 장식품처럼 거느리며 파티에 두세 번 데리고 간 적이 있었다.
유리관에 가두는 대신 감시하는 시녀들과 족쇄 마법이 걸린 신발을 신긴 채 루시엘은 인형처럼 웃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노 후작이 인사차 건넨 말 한마디에 그가 이상하게 반응한 적이 있었다.
‘돌아가신 황비 전하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시면서 아주 기뻐하실 만큼 장성하셨습니다. 황태자 전하.’
‘……뜬금없는 말이군요. 되도록 내 어머니의 이야긴 꺼내지 마시오. 그분은 아직 내겐 살아 계신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죄, 죄송합니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의 죽음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였달까.
그는 종종 황성을 빠져나갔는데 그럴 때마다, 시큼하게 익은 향기가 나곤 했었다.
그러곤 술에 잔뜩 취해서 루시엘에게 보석을 만들라고 닦달해 댔다.
도리질을 치면서 과거의 상념들을 지우고 난 루시엘이 말했다.
“시아빠. 근데 과거의 황태자는 조금 이상했어요. 죽은 황비의 이야기를 하는 걸 싫어했어요. 마치…….”
“마치?”
“죽은 사람으로 대하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았어요. 꼭 어딘가 살아 있는 것처럼요.”
“그래?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일단 더 조사를 해 보아야겠다.”
공작의 말에 루시엘이 책상에서 챙겨 온 서류를 건넸다.
“네! 아 참, 그리고 이것도 드릴게요.”
루시엘은 카빌 후작가가 벌이는 불법 사업을 정리해 둔 문서를 내밀었다.
“과거 레이놀드 황자는 훗날 카빌 후작과 손을 잡았던 적이 있었어요. 그의 불법 사업이 황태자에게 도움을 주지 않도록 미리 망쳐 놓으면 좋을 것 같아요.”
공작이 문서를 받아 훑어내리더니 입매를 끌어 올렸다.
연도별로 카빌 후작가가 회귀 전 벌였던 불법 사업들이었다. 그중에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사업들도 있었고, 이미 한참 재미를 보고 있는 것들도 있었다.
“아주 좋은 무기가 되겠군, 잘했다. 루시엘. 망치고 부수는 건 내 전문이니까.”
공작의 믿음직한 말에 루시엘도 한결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모든 걸 풀어놓은 듯해 가벼워졌달까.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지만, 든든했다.
믿고 의지할 가족이란 이런 존재구나 싶었다.
* * *
점원이 무언가를 잘못 들은 것처럼 화들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카빌 후작 부인과 영애라고 하셨습니까?”
“네.”
“……죄송하지만 자리가 없습니다.”
“밖에 있는 저 테이블들은 뭐죠?”
“그건 관상용입니다.”
“뭐가 어째요?”
이런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시내의 가게에서 거절을 당하는 것이 벌써 여덟 번째.
시내 고급 의류점과 신발 가게에서도, 인기 많은 카페와 제과점, 레스토랑마저도 들어가지 못했다.
마치 이 샤를로테 거리에 있는 전부가 카빌가를 밀어내기라도 하듯, 갖가지 변명을 대면서 받아 주지 않았다.
연신 거절당하는 바람에 결국 페넬로페와 카빌 후작 부인은 샤를로테 거리 바깥에 있는 촌스러운 인테리어의 식당에 자리를 잡아야 했다.
페넬로페는 물론 짜증이 있는 대로 치밀어 올랐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 아니에요, 어머니?”
“그러게 말이다. 그러게 괜히 벨슈타인에 밉보여서 이게 무슨 망신이니. 에휴.”
후작 부인이 탄식을 내뱉었다. 페넬로페도 창피해 죽을 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티 파티나 사교 모임만 몇 번 거절당하고, 사람들이 말을 섞지 않고 수군거리는 것도 며칠이면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건 시작일 뿐이었다.
카빌 후작가가 벨슈타인 공작가의 눈 밖에 났다는 소문이 온 제국을 점령했다는 것도 모자라 자신이 공자비의 머리채를 쥐었다는 헛소문까지 사교계에 퍼져 나가고 있었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그래서 이제 그들을 티 파티에 초청하는 귀족은 아무도 없었고, 그 소문이 더욱 퍼져 고급 귀족을 상대하는 샤를로테 거리의 상점은 카빌 후작가를 받아 주지 않기에 이르렀다.
“아우, 진짜 머리채를 흔들었으면 억울하지도 않지. 고 밤톨처럼 쬐깐한 계집애 하나 때문에 이게 뭔 고생이야.”
카빌 후작 부인은 아직도 억울해하는 페넬로페를 보면서 손수건으로 코를 팽 풀었다.
벨슈타인만 보면 이를 바득바득 갈아 대는 남편과 아들, 딸 덕분에 그녀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언제까지 우리가 이렇게 무시당하면서 살아야 해요?”
페넬로페가 칭얼거리자 후작 부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글쎄다. 페넬로페, 네가 황녀 전하의 인정을 받지 않는 한 이번 생은 어렵지 않을까.”
후작 부인은 가능성 없다는 뜻으로 농담 삼아 한 것이었는데, 페넬로페가 눈을 반짝 빛냈다.
듣자 하니 소문에 공자비 계집애와 클로디아 황녀가 좋은 친구가 되었다고 했다.
‘좋은 친구는 무슨! 제깟 게 뭐라고.’
* * *
방으로 돌아온 루시엘은 이제야 여유를 틈타 책상에 고이 모아 놓았던 친구들의 편지를 꺼냈다.
두 사람은 함께 황도에 있어서 그동안 두 번이나 만난 모양이었다. 부럽기도 하고, 루시엘을 그리워하는 진심 어린 친구들의 말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보고 싶어요. 루시엘이 황도에 온다면 정말 재미있을 거예요. 같이 쇼핑도 하고 맛있는 디저트 가게에도 가요.」
그리고 뜻밖의 소식도 전해 들었다. 바로 페넬로페의 이야기였다. 황도에서는 어린 영애들끼리 모임이 자주 열리는 모양이었는데.
지난번 피로연에서 사교계의 웃음거리가 된 이후로 그 누구에게도 초대를 받지 못해 울상을 짓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어린 페넬로페조차 그렇게 사회생활이 가로막혔는데, 카빌 후작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남의 불행을 즐기고 싶진 않았지만, 루시엘은 그들만큼은 마음껏 비웃어 주고 싶어서 헤헤 웃었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카빌 후작가가 몰락하고 재산을 모조리 탕진하는 그날까지 복수를 멈추지 않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카빌 후작이 미리 사들여 오랫동안 사업을 벌이던 섬이 있었다. 그곳에서 많은 일이 있었다.
침묵의 섬. 사일런트 아일랜드.
풍경은 무척 아름답다고 들었지만 그곳은 제국 수도에서도 매우 떨어진 외진 위치에 있어 불법적인 일들을 벌이기에 좋았다.
그야말로 무법지대.
그곳에서는 카빌 후작의 말이 곧 법이었다. 그러니 이번엔 그가 손을 뻗기 전에 그 섬을 먼저 선점해야 했다.
그리고 그 제안은 루이비드에게 준 문서 사이에 루시엘이 쪽지를 끼워 놓은 참이었다.
‘이 섬은 미리 매수해 두시면 카빌 후작이 사업을 벌일 가장 좋은 노른자 땅을 사는 걸 미리 막을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