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118)화 (118/282)

<118화>

아기 영지로 되돌아왔을 때는 어슴푸레 동이 트고 있었다.

아르제온이 쭉 기지개를 켜면서 하품한 다음 슬쩍 눈치를 살폈다.

“이제 난 그만 쉬러 가도 되겠군.”

“옳지. 자고 있을 때 우리에 넣어서 마탑으로 보내면 되겠구나.”

길리아트가 사악하게 입꼬릴 올리며 말했다.

“……지금 내 힘으로는 마탑에 가도 걸리적거리기만 할 뿐.”

투닥거리는 둘을 말리며 루시엘이 말했다.

“아르제온의 봉인을 풀어 주기로 약속했으니, 잠깐은 여기에서 지내게 해도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오늘 고마웠어. 덕분에 류프델을 만났어.”

아르제온은 팔짱을 낀 채 루시엘의 감사를 들으면서 끄덕였다.

“할아버지보다 네가 낫다. 류프델을 상대로 기죽지 않고 제법이더군. 잘했다.”

아르제온은 싱그레 웃으면서 루시엘에게 상을 내리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있었으니까 용기가 난 거야.”

“듣자 하니 심각한 상황이던데, 그 문제부터 의논해 봐라.”

“응.”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제 딴에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길리아트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밤을 거의 지새운 탓에 어린 몸의 체력이 다한 탓일까.

루시엘의 눈꺼풀도 가물가물 무거워졌고 졸린 탓에 정신도 혼미해져 있었다.

“할아버지, ……이 일을 시아빠께 전부 말씀드려야 하는데요……. 그리고 벨슈타인을 몰락시킨 것이 누구였는지도……. 그러니까 집무실로…….”

말도 채 끝마치지 못할 정도로 졸음이 가득 내려와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본 길리아트는 웃으면서 루시엘을 달랑 품에 안아 들었다.

“그건 자고 나서 생각해라, 루시엘.”

여간 피로한 게 아니었는지 루시엘은 몇 번 등을 토닥이자마자 사르륵 잠이 들었다.

‘녀석, 이미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단다. 벨슈타인의 검은 장벽을 무너뜨렸던 자가 레이놀드 황자 그놈인 것이지?’

‘아, 그게 어떤 검을 보았는데…… 홈이 열두 개나 나 있었어요. 그자가 제 보석을 그 홈에 박았더니 검이 엄청난 힘을 갖게 되었어요. 강한 가문을, 아니 어쩌면 나라 하나를 망가뜨릴 만큼 강력한 힘을요.’

‘……꿈의 일부만 기억하지만, 검은 장벽이 무너졌어요.’

길리아트는 루시엘이 류프델에게 했던 말을 다시금 떠올렸다.

검은 장벽이 무너지는 예지몽을 꾸었다던 루시엘의 말도.

최근 황자의 수상쩍은 움직임과 연결시켜 보면 황자가 벨슈타인에 과거 해를 끼친 장본인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추론이 가능했다.

과거의 황자는 인간으로서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죄악으로 가득한 악, 그 자체였던 듯했다.

어느새 길리아트의 붉은 눈이 폭발하듯 화염의 색으로 들끓었다가 가라앉았다.

우선은 아이부터 편히 재워야겠다는 생각으로 별궁으로 향하는 이동 포탈을 열었다.

포근하고 아기자기한 실내 벽면을 차지하는 양말 나무를 발견한 그는 기분 좋게 웃었다.

루시엘을 침대에 눕혀 주고만 가려는 순간, 골이 잔뜩 난 손자가 침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할아버지! 루시엘은…….”

큰 소리를 내려다가 잠든 루시엘을 보고 키제프가 말을 멈췄다.

길리아트와 함께 지팡이를 보완하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 곧 오겠거니 했지만 날이 새도록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는 도저히 가만히 훈련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혹시 몰라 결혼반지로 순간이동을 시도해 보았지만 먹히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지팡이 이야기는 또 무엇이고.”

“일단은 애부터 침실로.”

그의 말에 키제프가 루시엘의 침실 문을 열어 주었다. 루시엘을 데려다 눕혀 놓은 다음 방문까지 꼭 닫아 주고 응접실로 나온 길리아트는 키제프의 손을 붙잡았다.

“루시엘의 지팡이에 보석을 세공할 방법을 찾으러 무기 제작자인 난쟁이 류프델에게 다녀온 거다.”

“혹시 위험한 곳은…….”

“보다시피 이렇게 무사히 돌아왔지. 그리고 내가 있는데 루시엘을 위험에 빠지게 둘 성싶으냐. 너도 잠을 못 잔 모양인데, 그만 쉬는 게 좋겠구나.”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굴었나 싶어 키제프도 고개를 떨어뜨렸다.

“할아버지는요?”

“나는 네 아비와 이야기를 해야겠다.”

“혹시…… 루시엘에 관한 문제인가요?”

“이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지.”

“그럼 같이 가겠습니다. 저도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가자꾸나.”

길리아트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하자, 키제프도 함께 따라나섰다.

* * *

한편 본성 공작의 집무실에는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길리아트를 믿고 루시엘을 맡기긴 했지만, 공작은 잠들 수 없었다.

마계는 추적 마법이 먹히지 않는 곳이었던 터라,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뿐이었다.

드디어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공작은 문을 열어젖히고, 제 아버지를 마주했다.

그의 낯빛이 밝은 것을 보고 루시엘 역시 무사히 돌아왔음을 확인했다.

“……많이 늦으셨습니다.”

“어쩌다 보니 대화가 길어졌지. 역시 다들 안 잔 모양이군.”

집무실에는 공작뿐 아니라 엘링턴을 비롯한 보좌관들도 전부 깨어 있었다.

“이런, 그만 돌아가라. 못 할 짓을 한 것 같군.”

“아닙니다.”

“아가 마님께선 무사히 돌아오셨습니까?”

보좌관들도, 엘링턴도 공작의 강요로 잠을 지새운 게 아니라 루시엘이 걱정되어서 아직 안 자고 있었다.

“물론이다. 루시엘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별궁에 데려다주었다.”

“정말 다행입니다.”

“그럼 저희는 안심하고 퇴근을 해 보겠습니다.”

보좌관들이 밝은 얼굴로 집무실을 떠나는 모습을 보고, 엘링턴은 고개를 흔들었다.

“저리도 눈치가 없어서야.”

어차피 네 시간 후면 출근 시간이었으니, 조금만 더 버티면 각하의 신임도, 봉급도 쑥쑥 오를 텐데 말이지.

속으로 생각하면서 버티고 있는 엘링턴의 어깨를 토닥거리면서 공작이 턱을 괴고 느른히 웃었다.

“자네도 퇴근해.”

“……예? 아뇨, 네 시간 후에 다시 출근하느니, 그냥 있겠습니다.”

“오후 두 시쯤 출근해.”

“왜…… 요? 설마하니 제 책상 치우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저 아직은 돈 많이 벌어야 합니다. 각하.”

“보내 줄 때 가.”

“……옛!”

엘링턴은 그제야 곧 공작이 정말 배려를 해 주었다는 걸 알아채곤, 부리나케 집무실을 떠났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엘링턴이 상큼하게 미소 지으면서 물러가는 걸 보곤 키제프도 들어왔다.

고요해진 집무실 안쪽으로 들어선 길리아트가 소파에 털썩 앉은 후에 입을 열었다.

“루이비드, 할 말이 있다.”

“저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루시엘과 함께 꼭 말씀드리기로 약속했었어요.”

할아버지 옆 소파에 앉으면서 키제프도 어른들을 바라보았다.

“음……. 누구 이야기부터 듣는 게 좋으려나.”

루이비드도 건너편 소파로 가서 앉은 다음 말했다. 길리아트는 조용히 키제프에게 순서를 양보했다.

키제프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루시엘과 보았던 그 이야기를 시작했다.

루시엘의 보석을 검에 박아서, 벨슈타인의 모두를 파멸로 이끌었던 것은 레이놀드 황자이고, 검은 장벽도 그로 인해서 무너진다는 사실을.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고통스러웠어요, 너무…….”

키제프의 눈동자가 멍하니 초점을 잃었다. 이제야 그 무거웠던 짐을 조금 내려놓은 듯했다.

키제프 역시 오랫동안 그 사실을 끌어안고 있었다.

레이븐의 힘을 빌려서라도 벨슈타인을 혼자서 지켜 내려고 했을 정도로 이 무서운 사실을 아무도 몰랐으면 했었다.

사실 루시엘이 없었더라면, 지금까지도 자신은 그 사실을 혼자서 짊어지고 가려 했을 터였다.

과거 속에서 가족들의 시체를 마주했던 그 참담한 순간을 떠올린 키제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런 아들에게 말없이 다가온 공작이 너른 품으로 안아 주었다.

공작의 품에서 키제프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루이비드는 커다란 손으로 아들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더니 놓아주었다.

“아직 남자가 되긴 글렀군.”

아무리 다 큰 척을 해도 아비 눈에는 어린애로만 보일 뿐이었다. 키제프를 애정 섞인 눈으로 바라보던 루이비드가 말했다.

길리아트도 키제프의 손을 꼭 잡으며 위로했다.

“……키제프. 지금이라도 알려 줘서 고맙다. 너희들이 온전히 감당하기엔 너무 커다란 일이었다.”

그리 말하던 길리아트가 혼자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데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구나. 레이놀드 황자 그놈이, 사실 나도 지금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거든.”

공작 역시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말했다. 그간 황자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첩자를 심어 실드까지 파악하려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벨슈타인을 노린다는 증거.

“황자가 벨슈타인을 무너뜨린다는 결말은 저도 예상했습니다……. 과거에는 가능했을지는 모르지만.”

“이번에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이지.”

“자라기 전에 싹을 뽑아야지요.”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 닮은 붉은 눈동자를 빛냈다. 이제부터 나눌 이야기가 더욱 많았다.

* * *

아홉 시간 후.

루시엘이 눈뜨자마자 모든 걸 말하러 집무실로 달려왔을 때는 이미 자리가 파하고 공작만이 있었다.

“시아빠! 저 드릴 말씀이……!”

“무엇이지?”

집무실에 앉아 느른한 얼굴로 루시엘을 내려다보던 공작이 물었다.

“사실은……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있어요. 과거 레이놀드 황자가 검은 장벽을 무너뜨리고, 벨슈타인의 모두를 죽여 파멸하게 만들었어요.”

루시엘이 힘겹게 털어놓았지만, 공작은 놀라지 않았다.

“이미 아침에 키제프와 아버지에게 들었다. 어느 정도 예측한 일이기도 하지…….”

“아…… 정말요? 제가 잠들어 버려서 그만. 그리고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아니다. 루시엘. 이렇게 눈곱도 제대로 못 떼고 달려와서 말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감동이군.”

“앗……!”

루시엘이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가리자, 공작이 손수건으로 부드럽게 눈가를 닦아 주었다.

다정한 말과 행동에 루시엘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말했다.

“그러니 황자를 경계하고, 검은 장벽을 보강해야 할 거예요.”

“그래야지. 이제 갈리우스도 벨슈타인의 후원을 받으니, 차후 장벽을 보강하는 일도 성사시킬 수 있을 거다. 가만…… 혹시 그 일도 미리 염두에 두었나?”

“아……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지만 갈리우스가 훌륭한 건축가라는 걸 알고, 장벽을 보강할 때 벨슈타인에 있으면 좋겠다고는 생각했어요.”

루시엘이 눈을 초롱이며 말하자, 공작이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군. 잘했다.”

공작이 루시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황태자 그놈이 무슨 수로 벨슈타인을 쳤단 말이냐?”

공작의 물음에 루시엘은 어렵사리 입술을 뗐다.

과거 황태자가 가졌던 그 검은 보석을 박아 완성되기 이전에도 강한 마력을 머금은 검이었다.

“황태자는 제 보석을 박아 더욱 강력해진 검을 이용해 귀족들과 연합해서 벨슈타인을 무너뜨렸어요.”

“처음부터 보통 검이 아니었단 거군.”

“네. 푸른색의 긴 날을 가진 검이었어요.”

“마검, 또는 성검이란 건가.”

공작의 추측에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마도요. 그 당시 황자는 검을 이미 가지고 있었어요. 어쩌면 황가의 보물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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