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 * *
풍성한 거품이 가득한 특제 밀주가 먹음직스러워 보였지만, 루시엘은 허니티를 호로록 마신 다음 찻잔을 내려놓았다.
“한 잔 더?”
“네.”
달짝지근한 꿀 향이 진하게 올라오면서 긴장도 사르르 녹았다. 왠지 기운이 샘솟는 기분이었다.
“아, 맞다.”
무언가 떠오른 모양인지 루시엘은 분홍색 딸기 가방을 열어서 꿀이 듬뿍 들어간 오트밀 쿠키와 메이플 시럽이 들어간 쿠키도 꺼내 놓았다.
메이플 쿠키는 루시엘의 손처럼 오동통하고 작았다.
“허니 오트밀 쿠키랑 메이플 시럽 쿠키인데 같이 먹으면 좋을 것 같아요.”
네 개의 쿠키를 하나씩 나누어 먹자 고소함 속 달콤한 꿀과 메이플 시럽이 그대로 느껴졌다. 하지만 한 사람당 쿠키 하나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
“정말 맛있군.”
특히 류프델의 반응이 가관이었다. 그는 몹시 황홀해진 얼굴로 쿠키를 조금씩 아껴먹다가 이내 사라져 버리자 화를 냈다.
“미쳤다. 이 쿠키는 미쳤어. 내가 먹어 본 것 중 가장 맛있는 음식이다. 이걸 이렇게 조금 가져오다니, 망할 꼬맹이. 지금 장난하냐?”
평소처럼 외출하기 전 문득 생각나서 챙겨 왔던 것인데 이럴 줄 알았으면 넉넉하게 가져올 걸 그랬나.
‘난쟁이들이 꿀을 좋아한다는 세스 주방장 말이 맞았네. 다행이야.’
배시시 웃은 루시엘은 이제 지팡이 이야기를 꺼내려고 입을 열었다.
“다음에 가져다드릴게요. 이제 제 이야기 들어 주세요.”
류프델이 짧은 팔로 계속해 보라는 듯 둥글게 손짓했다. 루시엘은 곧장 마나를 끌어모아 푸른빛이 도는 제 하얀 지팡이를 소환했다.
“……그 지팡이의 주인이 너였냐.”
자신이 만든 지팡이였기에 류프델은 대수롭지 않게 지켜보다가 그만 입을 딱 벌렸다.
그 바람에 마시던 밀주가 주르륵 흘러, 턱이며 바닥을 적시고 말았다.
“자, 잠깐. 이건 마, 말도 안 되는!”
지팡이를 만들어 준 것이 불과 몇 달 되지 않았는데 벌써 성장을 시켰어?
류프델의 동공이 크게 뒤흔들렸다. 그뿐이 아니다. 이어서 체감되는 건 저 아이의 주변을 압도할 만큼 거대하고 맑은 마나였다.
두 마법사의 강렬한 마나에도 묻히지 않고 존재감을 드러내는 아이의 청량하고 순수한 마나에 류프델은 눈을 연신 끔뻑거렸다.
“너는……! 지팡이를 단기간에 성장시킨 것도 말이 안 되는데 이렇게 맑게 출렁이는 마나라니. 도대체 이 아이는 뭐냐?”
류프델의 감탄에 길리아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제야 우리 루시엘의 대단함을 알아보는구나. 놀라 기절하겠지?”
“아무리 요정이라고 해도 이건…….”
류프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루시엘은 그의 앞에 루비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이 보석에 들어 있는 힘을 온전히 제 지팡이에 담아 사용하고 싶어요. 그 방법을 물어보려고 왔고요. 이 루비에는 불의 힘과 함께 최상급의 마력이, 나머지 보석에도 각각 원소의 힘들이 깃들어 있어요.”
루시엘은 류프델에게 루비와 함께 나머지 세 가지 보석도 건넸다.
“이봐. 꼬맹아, 너…… 혹시.”
류프델은 코에 걸린 안경을 내려 손에 놓인 보석과 루시엘을 번갈아 보았다.
그 역시 이곳에서 오랜 세월 대장간을 지키면서 살아왔다.
아득한 옛날부터 요정들이 있어 왔고, 그들 중에는 특별한 힘을 가진 이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 요정 중에서도 가장 희귀하고 특별한 존재가 있었지.”
가물가물 희미한 기억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이 밤의 대장간을 지키던 시절, 이곳을 찾아왔던 요정이 바로 보석을 만드는 요정이었다.
왜 찾아왔는지, 어떻게 생긴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그 요정 이야길 종종 했다.
귀하디귀한 크리스털 페어리라고, 그녀의 보석은 억만금의 가치가 있다고 말이다.
그게 벌써 백오십 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낡고 바랜 기억을 더듬던 류프델이 입 밖으로 그 이름을 꺼냈다.
“크리스털 페어리……!”
감정으로 보석을 만드는 요정. 크리스털 페어리가 사라진 건 그 신비로운 힘 때문이었다. 인간들의 탐욕으로 무분별한 이종족 사냥이 자행되었으니.
류프델은 그 전설과도 같은 요정을 다시 마주했다는 것이 놀랍고도 감격스러웠다.
“네, 맞아요.”
루시엘이 긍정을 표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루시엘을 보는 류프델의 눈은 어느새 처음과는 몹시 달라져 있었다.
“크리스털 페어리를 생전에 다시 보게 되다니……!”
류프델의 눈이 촉촉해지자, 길리아트가 아르제온에게 속삭였다.
“내가 지금 뭘 보는 거지, 아르제온?”
“……류프델이 울고 있다.”
“……저 늙은이가 노망이 났나?”
두 사람이 그러든 말든 류프델이 루시엘에게 말했다.
“이 세계에서 희생되지 않고 용케 살아남았구나……. 아가, 손 좀 이리 다오.”
류프델의 말에 루시엘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류프델이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
“그동안 고생했다.”
“감사해요.”
루시엘은 잠시 뭉클함을 느꼈다. 이어 류프델이 보석을 보며 말했다.
“이 보석의 힘을 지팡이로 온전히 가져오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겠군.”
루시엘이 귀를 쫑긋 세우면서 경청했다. 길리아트도 본론으로 들어가자 신경을 곤두세워 집중했다.
“두 가지 방법이요?”
“그렇단다. 이 지팡이만 가능한 방법이지만. 하나는 네 마법 실력으로 지팡이를 또다시 성장시켜서 보석의 힘을 흡수하게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마법 세공으로 물건에 보석의 힘을 입히는 것이란다.”
마법 세공.
‘혹시 황태자가 검에 홈을 팠던 방법이 그것이었을까?’
“아, 류프델. 혹시 무기에 홈을 파서 보석을 박는 것이 마법 세공인가요?”
“무기에 홈을 판다니? 어떤 망할 놈이 그런 고약한 짓을 해?”
류프델이 인상을 찌푸리며 분통을 터트렸다. 무기 제작자인 그는 누구보다도 무기를 소중하게 다루고 아꼈다.
그런 제 몸 같은 무기에 홈을 파낸다니 꿈도 꿀 수 없는 일.
“아, 그게 어떤 검을 보았는데……홈이 열두 개나 나 있었어요. 그자가 제 보석을 그 홈에 박았더니 검이 엄청난 힘을 갖게 되었어요. 강한 가문을, 아니 어쩌면 나라 하나를 망가뜨릴 만큼 강력한 힘을요.”
루시엘은 과거 황태자의 검을 떠올리며 말했지만 류프델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행위였다.
“홈이 하나도 아니고 열두 개였다고? 무기의 밸런스를 망치는 짓이 아닌가!”
“아마 일반 검이 아닌 특별한 검이었던 것 같아요. 검을 보석의 힘으로 강화한 것이고요.”
“마검인가?”
“그건 모르겠어요.”
루시엘이 덧붙인 말을 듣던 아르제온이 중얼거렸다.
“심상치 않은 검이로군. 악하게 사용된다면 큰일 날…….”
그 말에 류프델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중얼거렸다.
“가만, 혹시 그 검 스스로 움직이거나 이상한 소리가 나지는 않든?”
“아…… 웅웅 거리는 소리가 났던 것 같아요.”
“그래? 잠깐만!”
류프델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곧 다른 방으로 가더니 서랍장을 뒤지는 소리가 났다.
그는 얼마 후 오래된 책 하나를 가지고 나타났다. 책장을 펼치자 여러 가지 검이 그려져 있었는데, 손을 대면 진짜 베일 듯 무척 생생했다.
불이 타오르는 듯한 검도, 번개가 치는 검도 있었다. 이윽고 맨 마지막까지 보았을 때였다.
검은색 구멍이 하나 있는 검이 그려져 있고, 그 위로 악마가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혹시 이건가?”
류프델이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이런 식으로 되어 있었어요.”
“그 검이 본래 뭐였든 아주 사악한 기운과 소유자를 만난 모양이구나.”
류프델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이건 마검을 소울 이터로 만드는 방법이다. 네가 말한 보석이 들어갈 구멍, 그건 누군가의 영혼을 삼켜 만들었다는 흔적이지.”
“네? 소울 이터라니.”
루시엘이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쉽게 말하자면 사람의 영혼을 흡수하는 물건이란 뜻이다.”
길리아트도 문득 소름이 끼쳐 말했다.
“그 말은 그 검에 있던 구멍 하나에 사람이 한 명씩 희생되었다는 말이냐?”
“최소로 생각하면 그렇게 되겠군.”
“그럼 최소 열둘을 희생시킨 검인 거네요?”
검이 웅웅 거리면서 울던 그 소리는 제게 반응하던 것이 아니라, 원한이 사무친 영혼들의 목소리였던 모양이었다.
사람을 죽여 만든 검에 자신을 착취해 만든 보석을 박아서 벨슈타인을 파멸로 내몰다니.
루시엘은 믿기지 않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실로 끔찍한 일이었다. 상황을 아는 루시엘과 길리아트만이 충격에 휩싸인 얼굴로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사정은 모르지만 류프델이 충고했다.
“이 검을 만든 놈 말이다. 아주 사악하고 위험한 자로군. 사람을 희생시켜 악검을 제작할 정도라면…… 절대로 살려 둬서는 안 된다.”
루시엘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무지 상상도 하지 못한 악행에 온몸이 떨리고 분노가 차올랐다.
파아아!
또롱, 또로롱.
루시엘은 심장으로 모여드는 마나로 루비와 사파이어, 옵시디언 같은 보석을 만들어 냈다.
옆에서 류프델이 오오, 하고 놀라는 소리가 들렸지만 분노에 휩싸인 루시엘에겐 들리지 않았다.
도대체 사람을 얼마나 희생시킨 것일까? 강한 권력을 움켜쥐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를 묻힌 거지?
‘레이놀드, 당신은 악마라는 말도 아까운 인간이야. 부디, 이번 생에는 그 죗값을 치르게 해 줄게. 아주 가혹하고 처절하게.’
루시엘의 보석안이 불꽃처럼 일렁였다.
“네, 반드시 그를 죽여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 여길 찾아온 거예요. 류프델, 그러니 알려 주세요. 제 지팡이에 보석을 마법 세공할 방법을.”
길리아트는 루시엘의 어깨를 도닥이며 거들었다.
“나도 이렇게 부탁하겠다.”
류프델이 깊은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이미 약속했지 않느냐! 부탁을 들어주기로 말이다. 하지만 마법 세공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금빛 지팡이로 바닥을 툭툭 두드린 류프델이 두 사람에게 말을 이었다.
“일단 마법 세공에 필요한 재료부터 모아야 한다. 이곳 밤의 대장간에서 자생하는 천연 동식물, 그리고 최상급 마력석도 수십 개 필요하다. 그리고…… 지팡이에 보석을 몇 개나 세공할 것이지?”
“앗, 하나만 세공할 수 있는 게 아닌가요?”
“내 생각엔 그럴 것 같다. 일반 지팡이라면 몰라도, 이 이노센트 지팡이는 특별한 물건이니 말이지. 우선 보석의 힘을 담을 공간이 지팡이에 얼마나 되는지 알아봐야 한다. 그러니 지팡이와 보석들, 마력석을 두고 가라.”
“혹시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요?”
지팡이를 맡기고 가려니, 왠지 시원섭섭해진 듯해 루시엘이 물었다.
“글쎄다. 그건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네 지팡이와 보석이 정하는 거다. 상성이 안 맞으면 마법 세공이 실패해 결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길리아트가 걱정스러워하는 루시엘을 대신해 말했다.
“얼마든 사례할 테니, 루시엘의 지팡이를 잘 부탁한다.”
“그 말 꼭 지켜라. 자, 그만들 돌아가라! 다 되면 내가 포탈을 열어 줄 테니 기다려.”
“네, 감사해요. 류프델.”
“그래, 다음에 올 때는 아까 그 쿠키 가져오는 거 잊지 마라.”
“물론이에요!”
루시엘이 생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