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류프델이 험상궂은 얼굴로 욕을 퍼부으며 다가왔다. 금빛 호루라기를 꺼낸 그는 새끼손톱으로 호루라기 끝을 톡톡 두드리곤 삑, 세게 불었다.
그러자 파수견은 정신이 번쩍 드는지 크게 한번 하울링하고는 입구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이윽고 류프델의 금테 안경 너머 작고 새까만 눈알이 이쪽으로 굴렀다.
‘정말 신기해.’
난쟁이를 처음 본 루시엘은 자못 호기심이 동했지만 상대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건 실례인 것 같아서 조심하고 있었다.
고깔처럼 길쭉한 코와 뾰족한 나뭇잎 모양의 귀. 심술 맞고 주름진 노인의 얼굴과 다르게 아이 같은 키. 뾰족한 치아와 긴 손톱도.
더불어 그의 황금 목걸이와 벨트는 유독 번쩍거려 시선을 빼앗았다.
류프델이 투덜투덜 첫인사를 던졌다.
“망할 놈들아. 귀찮게 뭐 하러 왔어? 할 일이 태산이구만!”
뒷짐을 진 채 거닐던 류프델이 이를 딱 부딪쳤다. 길리아트가 루시엘 앞에서 욕먹는 게 민망한지 먼저 중얼거렸다.
“그놈의 성질머리는 여전하군. 흠흠.”
“길리아트, 네 녀석은 다녀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여길 기어 왔어? 앞으로 한 십 년은 보지 말자니까.”
류프델이 꼬장꼬장하게 타박을 했다.
“십 년 후면 내 발로 여길 못 올지도 모르지.”
“그럼 더 잘됐구만. 더는 날 귀찮게 안 할 테니. 그러고 보니 여긴 어떻게 온 거냐?”
아르제온이 슬쩍 품 안에서 보라색 포탈석을 보여 주었다.
“네 손으로 제조한 포탈석으로.”
“……망할. 네가 가진 걸 잊고 있었군. 그나저나 요 솜털 보송한 꼬맹이는 못 보던 얼굴인데.”
류프델이 긴 손톱이 달린 손가락으로 턱을 괸 채, 루시엘을 곁눈질하듯 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류프델 님!”
“그 아이는 내 손주 며늘아기다.”
“……여기가 어디라고 애를 데려와?”
노한 류프델이 눈을 부릅떴다. 루시엘은 잠시 움찔했다.
“여긴 아무나 못 오는 곳이다. 특히 나는 어린애는 질색이야! 뻑 하면 울어 대기나 하고. 거슬리면 그대로 아까 그 녀석의 입안에 던져 줄 거다!”
류프델이 사악하게 겁을 주면서 황금빛 지팡이를 허리춤에서 꺼내, 루시엘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루시엘은 두렵지 않았다. 파수견과는 이미 친구가 되었으니까.
보아하니 류프델은 자신에게 겁을 주어 내쫓으려는 심산이거나, 담력을 시험하려는 모양이었다.
“류프델, 저한테 겁을 주시려면 다른 방법으로 하시는 게 좋아요. 그 아이는 이미 제 친구가 되었으니 절 먹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거든요.”
루시엘이 눈을 초롱이면서 말했다.
“흥, 제법 건방진 꼬맹이구나. 나는 얼마든지 그 녀석을 다시 조종해 너를 삼키게 할 수 있는데?”
류프델이 입매를 틀며 말하자 길리아트가 뒤에서 살기를 뿜었다.
“그럴 분은 아니신 것 같아요.”
“무얼 믿고 그리 까부는 것이냐?”
류프델의 물음에 루시엘은 진홍빛 눈동자를 도로록 굴리더니 이내 방긋 웃었다.
“지금 저를 데려와 주신 두 분, 그리고 저 자신이에요. 제게 무력을 행사하신다고 해도 순순히 당할 생각은 없고요. 길리아트 할아버지도, 아르제온도 같은 생각이실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그저 대화를 하러 왔어요.”
이에 아르제온과 길리아트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루시엘의 의견에 동의를 표시했다.
류프델이 공격한다면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불필요한 소모전보다는 대화로 푸는 것이 최선이었다.
한편, 류프델 역시 제게 밀리지 않는 강한 기운을 가진 루시엘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맑고 영롱한 마나와 보석처럼 빛나는 분홍색 눈동자. 분명 평범한 인간 꼬맹이의 것이 아니었다.
뭣보다 말랑한 것이 속은 제법 단단하구나 싶었다. 무언갈 눈치챈 류프델이 중얼거렸다.
“너, 요정의 핏줄이군?”
이제는 찾기도 힘든 요정의 핏줄을 다 보다니, 그는 콧구멍이 살짝 커졌다. 루시엘은 그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진절머리 나는 게 부탁이다.”
“부탁을 들어달라고 강요하지 안 할게요. 그저 이야기만 먼저 들어 주세요.”
한번 이야기를 들어 볼까 싶었으나 순순히 들어주기엔 제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난쟁이는 본래 쉽게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법, 류프델은 일부러 더욱 힘주어 말했다.
류프델은 마지막으로 심술을 부렸다. 주머니에서 동전을 하나 꺼내 허공으로 튕겼다가 붙잡아 멈춘 다음 말했다.
“좋다. 그러면 동전 던지기로 승부를 하지.”
“치사한 난쟁이 놈.”
길리아트가 이를 아득 갈았고, 아르제온도 비난의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류프델은 낄낄 웃으며 말했다.
“네가 이기면, 이야기를 들어 보도록 하마. 단, 내가 이기면 너는 내 소중한 시간을 빼앗고 귀찮게 한 대가로 무엇을 하겠느냐?”
터무니없이 불합리한 내기인 건 둘째 치고 조건도 별로였다.
루시엘이 말했다.
“당신이 이기면 제가 가진 보석을 드릴게요.”
루시엘은 주머니에서 보석을 꺼내 보여 주었다. 그러자 류프델은 안경알 너머로 보석을 들여다보았다가, 그 가치가 도무지 환산되지 않자 동공이 흔들리고 말았다.
“대, 대체 그 보석은 뭐냐?!”
그는 안경을 벗어 렌즈를 소매로 슥슥 문지르더니 다시 한번 제대로 썼다. 그의 마법 안경은 물건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해서 숫자를 보여 주는 기능이 있었다.
그러나 저 보석은 물음표로만 표시되었다.
“마력과 원소 마법의 힘이 담긴 보석이에요.”
“허, 가치를 논할 수도 없을 만큼 귀한 보석이로군?”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아요. 그러니 류프델 당신도 조건을 달리 해 주세요.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만으로는 이 보석의 가치와 동등한 내기가 성립되지 않아요.”
루시엘은 어떤 우화에서 난쟁이에 대한 구절을 읽은 적이 있었다.
「난쟁이와의 내기에서는 이길 생각은 말라. 반드시 속임수가 있으니 주의할 것. 조건은 두 배를 올려라.」
고전 우화일 뿐이지만,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도 난 이겨야 해.’
코웃음을 치던 류프델은 별수 없다는 듯 말했다.
“제법 배짱이 두둑한 녀석이군. 조건은…….”
“조건은 이거예요. 제가 이기면 이야기를 듣고 부탁까지 꼭 들어주세요.”
“망할, 무보수로 일하란 말이냐! 나는 비싼 몸이란 말이다.”
난쟁이가 씩씩거리자, 루시엘이 다시 그의 승부심을 자극했다.
“그럼 이겨서 보석만 가져가시면 되잖아요.”
“흠, 그러고 보니 그렇군. 알겠다. 그 조건으로 하지.”
다시 흥분을 가라앉힌 류프델의 반응에 루시엘은 짐작했다.
‘그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어.’
그렇다는 건 루시엘이 어떻게 해도 류프델은 자신이 이기게끔 동전에 속임수를 걸고 말 거라는 이야기다. 아니면 이미 마법이 걸려 있는 동전이거나.
그는 특별한 물건을 만드는 데 능한 손재주를 가지고 있으니, 이미 마법이 걸린 상태일 확률이 높았다.
류프델이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모두 보여 주면서 씨익 웃었다.
“자, 아무것도 없지? 꼬맹아, 어느 면을 선택하겠느냐? 앞면? 뒷면?”
길리아트와 아르제온이 금방이라도 다가오려 했으나 류프델은 그들에게 개입하지 말라는 표시로 눈총을 주었다.
“잠깐만요.”
고민하는 듯하던 루시엘이 손을 내밀었다. 동전을 달라는 뜻이었다.
“동전을 조금 볼게요. 처음 보는 주화예요.”
“난쟁이 주화로군.”
앞면에는 숫자 100이, 뒷면에는 망치가 그려진 금화였다.
“흥, 나를 믿지 못하는 거냐? 좋다, 길리아트. 자네가 이 동전을 확인해 주도록.”
류프델이 던진 동전을 길리아트가 탐지 마법으로 살폈다.
“마법은 걸려 있지 않군.”
길리아트가 동전을 되돌려 주었다.
“이제 됐나?”
“네.”
“그럼 선택해라.”
루시엘은 고갤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내가 뭘 선택할지 말하면 시작하겠지.’
“숫자 있는 쪽이 뒷면이던가요?”
루시엘은 아리송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아니다. 그건 앞면이지.”
류프델이 동전을 주먹 안에 꼭 쥔 채, 다른 손톱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럼 해머가 있는 앞면, 아니다. 역시 숫자가 있는 뒷면이 좋겠어요. 아아, 그냥 해머로 해 주세요!”
루시엘이 일부러 갈팡질팡하는 척 구는 동안 그는 동전에 손톱 두드리기를 반복했다.
루시엘이 계속 앞뒤를 혼동하며 결론을 내지 못하자 류프델이 버럭 성질을 냈다.
“아, 그래서 도대체 뭐냐. 앞이야 뒤야?”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루시엘이 눈을 빛냈다.
“그건 중요하지 않겠어요. 동전을 다시 조사해 주세요, 할아버지.”
“…….”
길리아트가 류프델의 손에서 동전을 빼앗았다. 이미 동전은 앞뒤 모두 망치가 그려진 채로 조작된 모습이었다.
루시엘이 확인해 볼 걸 생각해 일부러 검증이 끝난 후 마법을 썼던 것이다.
해제 마법을 걸자, 동전의 마법이 스륵 풀렸다.
“……눈치 빠른 것 같으니. 어떻게 알았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던 류프델이 묻자 루시엘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새끼손톱으로 마법 발동하시잖아요. 아까 호루라기를 불어 파수견을 원래 위치로 보낼 때 유심히 봤어요.”
“츳, 어린 것이라 그런지. 쓸데없이 시각이 좋구나.”
“속임수를 썼으니, 루시엘의 승리로군.”
“그래도 던져 볼까요? 숫자가 있는 앞면으로 할게요.”
자신의 운을 시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 루시엘은 길리아트에게 받은 동전을 허공으로 던졌다가 받았다.
그러자 루시엘이 택한 대로 숫자 100이 적힌 앞면이 나왔다.
“그래,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했으면 네가 이겼겠군. 내가 졌다.”
류프델은 자신의 무례와 심술을 사과하듯, 루시엘에게 악수를 청했다. 자신보다 시선이 낮은 어른은 처음이었다.
“길리아트가 아주 맹랑한 꼬마를 가문에 들였군. 안으로 들어와라. 이야기를 듣지.”
그제야 류프델이 세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동그란 버섯이 줄줄이 이어져 미로 같은 모양의 내부는 여러 물건과 도구들이 잔뜩 있었다.
어떤 방에는 벌레가 가득했고, 또 어떤 방에는 병 안에 담긴 알 수 없는 액체와 부품들, 나무 조각과 돌들이 가득했다.
일행은 류프델이 안내한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낮은 천장 탓에 길리아트와 아르제온은 목을 꺾거나 몸을 움츠려 다녀야만 했다.
동그란 테이블 앞에 겨우 옹기종기 모여앉자 류프델이 밀주용 커다란 잔과 작은 찻잔 두 가지를 보여 주며 물었다.
“잔을 골라라.”
그러자 길리아트가 그를 노려보았다.
“아이한테 술을 권하다니 몹쓸 난쟁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