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여기일세, 여기.”
테오 자작이 반갑게 손을 흔들자 회색의 긴 로브를 푹 뒤집어쓴 마도사가 다가왔다.
상대의 얼굴이 가늠되지 않았으나 이 시간에 만나기로 자신과 말을 맞춘 마도사는 한 명뿐이었다.
테오 자작은 마도사에게 어서 안으로 안내하라고 재촉했다.
“누가 오기 전에 어서!”
“…….”
테오 자작을 내부로 안내하며, 마도사가 워프 위로 조심스레 발을 올렸다.
순식간에 여러 개의 붉은 선이 그를 낱낱이 탐지했고, 곧 안으로 무사히 들여보내 주었다.
먼저 들어간 마도사가 워프에 걸린 통행 시스템을 이리저리 만지더니, 결국 테오 자작까지도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었다.
“고맙네, 고마워.”
안으로 들어가자 이내 수십, 수백 개의 실드가 담긴 거대한 두루마리들이 보관된 방이 드러났다. 마치 작은 장서관을 방불케 했다.
이것이야말로 벨슈타인의 검은 장벽을 단단하게 만든 비결이란 말인가.
알 수 없는 희열과 함께 처음 보는 놀라운 풍경에 테오 자작도 넋을 잃었다가,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하고는 마도사를 보며 말했다.
“이번에 실드의 재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나. 어떻게 되었는지 설명 좀…….”
그러자 내내 말이 없던 마도사가 큭. 하고 조소했다.
마도사가 회색 로브의 후드를 천천히 벗어, 얼굴을 드러냈다.
실로 그 완전무결하게 아름다운 얼굴을 확인한 테오 자작의 눈동자에 짙은 두려움의 그림자가 떠올랐다.
“가, 가, 가, 각하!”
“…….”
테오 자작이 놀라 그 자리에서 떨면서 부복했다.
빤히 바라보는 그 눈빛만으로 숨통이 조여들 것 같았다. 테오 자작이 다리를 떨며, 입을 놀렸다.
저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마구 움직이는 듯했다.
“제, 제가 다 설명하겠습니다. 중앙관리실의 내부가 전부터 궁금하여…… 마도사에게 부탁을 해서 잠시 구경차.”
“설명할 필요 없다.”
공작이 로브 안쪽에 숨기고 있던 죽은 까마귀와 서신을 꺼내 바닥으로 툭 던졌다.
그가 기밀을 빼돌리려고 한 증거였다.
테오 자작의 눈이 커졌다.
“힉! 자, 잘못했습니다. 요, 용서를. 부디 자비를……!”
“그럴 짓을 애초에 안 하면 피차 편할 텐데. 나를 귀찮게도 하는군.”
그의 서늘한 핏빛 눈이 굴렀다. 기대 따위 없었으니, 실망감도 느끼지 않았다.
“각하아…….”
울음인지 신음인지 모를 꽉 막힌 목소리가 자작에게서 터져 나왔으나, 공작이 입매를 틀며 말했다.
내용을 모른다면 자신을 걱정하는 거라 착각이 들 만큼 다정한 목소리였다.
“묻기 전에 말하지 말라. 영원히 소리를 내지 못하게 만들어 주고 싶잖나.”
테오 자작의 목을 단숨에 움켜쥔 공작이 서늘하게 물었다.
“누구와 내통했더냐?”
“……끄허으윽!”
목이 잔뜩 졸려 있던 터라 숨이 막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가늘어진 눈초리의 공작은 테오 자작의 긴 옷자락을 그대로 질질 끌고 중앙관리실 외부로 나왔다.
아등바등하던 테오 자작이 아직도 졸린 목이 답답한지 캑캑거렸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과 자르가 단장이 다가왔다.
“이놈을 데려가 상대가 늙은 너구리인지, 승냥이 새끼인지, 출처를 밝혀내도록.”
너구리는 카빌 후작을, 승냥이 새끼는 황자를 이르는 그들만의 은어였다.
“예, 각하.”
“사, 살려 주십시…….”
곧 테오 자작은 병사들에 의해 입이 틀어막힌 뒤 지하 감옥에 있는 심문실로 끌려갔다.
그로부터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자르가 단장이 보고했다.
“황성의 팔로스 보좌관이 맞답니다, 각하. 명령은 황자가 내리지 않았을까 추측됩니다.”
달그락, 손에 쥔 쇠 구슬을 만지작대던 공작의 붉은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황자가 사냥을 즐긴다고 하였지. 내 아주 좋은 선물을 하나 보내야겠다.”
공작은 그리 말하며 바닥에 죽은 까마귀를 바라보았다.
* * *
일찌감치 별궁으로 돌아간 루시엘은 식사를 한 다음, 모처럼 로즈, 베시와 함께 종이접기를 하며 여유를 즐겼다.
지난번 선물로 받은 종이접기 세트에는 마법이 걸려 있어서 마구 쓰기가 아까웠지만 기분 전환하는 데에는 최고였다.
색색의 종이를 접고 있노라니 가끔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무언가를 하는 것도 좋았다.
두 사람이 접은 종이꽃 위로 곱고 노란 종이 나비가 나폴나폴 응접실 안을 노닐었다.
“예쁘다.”
“아 참, 이번 여름은 가뭄 때문에 분수를 개방하지 못하는 대신에 별을 볼 수 있는 돔형 마법천문대가 열려 있대요, 아가 마님!”
“정말?”
공작성에서 별을 볼 수 있을 만큼 높은 탑은 몇 군데 있었던 것 같지만 천문대는 경험해 보지 못했다.
“그럼 가서 같이 구경할까?”
루시엘의 제안에 두 사람은 별궁 응접실로 조용히 들어서는 키제프를 보고 웃었다.
키제프는 비밀로 해 달라는 듯 입술에 손가락을 슬쩍 올렸다.
“저희보다는 도련님과 놀러 가시는 건 어때요?”
“그럼요. 부부끼리 데이트를 하셔야지요.”
베시와 로즈가 번갈아 놀리듯 말을 이었다.
“아…….”
요즘 들어 키제프는 도통 마주치질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궁에 이미 없었고, 루시엘이 잠들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지난번 마법 수업에도 나오질 않았다. 물론 자신도 하루하루를 무척 바쁘게 보내고 있으니, 키제프가 어디 있는지 구태여 따로 찾지는 않았지만.
‘언제는 자기 눈에서 벗어나지 말라더니?’
그래도 같은 궁에서 지내는데 얼굴 한번 보기 어렵다니, 약간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키제프는 조금 바쁜 것 같아……. 별을 보러 가는 걸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겠어.”
“그야 당연히 좋아하실 거예요, 아가 마님.”
“맞아요, 아가 마님과 함께 하는 시간은 무엇이든 즐거우실 텐데요.”
“그런가.”
루시엘은 뒤돌아 있어 아직까지도 키제프가 뒤에 있다는 걸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그사이 어색하게 대답한 루시엘의 머리 위로 종이 나비가 사뿐 내려앉았다. 루시엘이 나비로 시선을 빼앗기는 사이, 나지막한 미성이 뒤에서 들려왔다.
“……나 안 바쁜데.”
“우앗! 뭐야?”
깜짝 놀란 루시엘의 진홍빛 눈이 댕그래져서 키제프를 올려다보았다.
“키제프! 대체 언제 온 거야? 깜짝 놀랐잖아.”
“방금…….”
키제프가 대답하면서 한 걸음 다가와 루시엘의 은발 위에 내려앉은 종이 나비를 긴 손가락으로 붙잡았다.
“너무해.”
하마터면 놀라서 보석 만들 뻔했다고. 입 모양으로 몰래 중얼거리던 루시엘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로즈와 베시가 웃으면서 슥 조용히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키제프는 급하게 샤워를 마치고 온 모양인지 젖은 금발이 가닥가닥 뭉쳐 있었다. 평소보다 진한 비누 향이 상큼하게 코를 찔렀다.
눈이 마주치자 살짝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가 고왔다.
“나 별 좋아해.”
“…….”
“별 보러 가자. 나랑.”
“응.”
사르르 눈웃음을 지으며 키제프가 손을 내밀었고, 루시엘은 조심스럽게 잡았다.
부드럽지만 손을 놓칠까 조심스레 제 쪽으로 끌어당기는 손길에 루시엘은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곁눈질로 살핀 그는 오늘따라 무척이나 낯설었다.
오랜만에 봐서일까?
눈빛이 조금 달라진 듯도 하고, 왠지 수척해진 듯도 했다.
평소보다 크게 내쉬는 숨도, 급한 듯 성큼성큼 걷는 걸음걸이도, 절대로 놓지 않을 것처럼 자신의 손을 꼭 붙잡은 손목의 힘도.
그래서일까.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한참 동안 키제프를 따라서 자박자박 걸었는데 그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근데 천문대가 어디 있더라?”
둘 다 뭐에 홀렸는지 길도 제대로 안 보고 와 버렸다.
주변을 둘러보던 키제프가 중얼거렸다. 공작성에는 높은 탑이 여러 곳에 있는 데다 밤이라 어느 곳이 천문대인지 헷갈렸다.
“응? 그러게? 둥근 지붕이라고 했어. 로즈 말로는.”
둘은 근처를 한참 더 빙빙 돌고 서야 장서관 뒤쪽에 가려져 있던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새하얀 돔형의 천문대.
왠지 커다란 달걀처럼 타원형으로 생긴 지붕이었다.
“……찾았다.”
다만 천문대로 올라가는 길은 나선형의 긴 층계로 이뤄져 꽤 고역이었다.
“라이트(Light)!”
다소 어두운 천문대 안을 키제프의 라이트 마법이 밝혔다.
그러나 다섯 층 정도 올라가자, 루시엘은 다리에 힘이 탁 풀렸다.
“……헉, 헉. 우리 조금만. ……쉬었다가, 가면 안 돼?”
그러나 앉아서 쉴 마땅한 곳도 없었고, 조금만 더 가면 도착할 듯했다.
“안 돼. 얼른 올라가자. 뒤에서 밀어 줄까?”
“…….”
루시엘이 고개를 저으며 계단에 앉아 버렸다. 그러자 키제프가 등을 내밀었다.
“……얼른.”
“나 업고 가려고?”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아니야. 괜찮아. 나 이제 다 쉬었…… 아얏.”
기세 좋게 계단을 올라가려던 루시엘은 다시 무너졌다. 급하게 일어났더니 발목이 약간 접질린 모양이었다.
“……흑.”
루시엘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키제프가 화를 냈다.
“빨리 안 업히고 버티니까 그렇지. 바보야.”
“……이번에는 바보라고 해도 할 말 없다.”
풀이 죽은 루시엘이 웃기면서도 귀여웠지만, 키제프는 우선 그녀의 발목부터 살폈다.
양말을 벗겨 내자 작고 얇은 발목 아래 복숭아뼈가 있는 곳만 발갛게 부은 것이 보였다.
키제프가 발목을 살짝 돌리려고 하자 루시엘이 아픔을 참으며 꾹 입술을 닫았다.
“아파?”
“응…… 쫌.”
“아무래도 삔 것 같은데.”
“조금 도와주면 걸을 수는…….”
그녀를 부축해 일으킨 키제프는 말 대신, 루시엘을 번쩍 안아 들었다.
루시엘을 안고도 아무렇지 않은지 고른 숨결이 들려왔다.
그렇지만 왠지 싫지는 않았다. 안심이 되는 아늑한 기분이랄까.
“……아, 안 힘들어? 그냥 마법으로 올라가자.”
“요즘 근력을 기르는 훈련 중이니까 너 정도야 끄떡없어.”
아무리 그래도 그냥 오르기도 힘든 계단을 자신까지 안고 오르는 건 무척 힘들 터였다.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는 키제프야말로 고집쟁이 같았지만 루시엘은 입을 다물었다.
‘여기까지 와서 훈련하고 싶은가 봐, 대단하다.’
그에게 안겨 올라가니 어느새 눈 깜짝할 사이에 천문대에 다다랐다.
“금방이네, 뭐.”
키제프는 루시엘을 안아 든 채로 천문대의 닫힌 지붕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공간이었다. 닫힌 내부 천장에 그려진 별자리가 은은하게 빛을 발했다.
천체를 볼 수 있는 커다란 마법 망원경도 있었다.
“근데 천장이 막혀 있는데 별은 어떻게 봐?”
루시엘의 질문에 키제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내 그는 바닥에서 노란빛이 나는 펜타그램 마법진을 찾아냈다.
그걸 밟아서 발동시키자, 둥근 천장이 조금씩 열리면서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