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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111)화 (111/282)

<111화>

약초를 정성껏 돌보면서 열심히 기록 중이던 시클라인은 어느새 빨갛게 익어 가는 열매를 손끝으로 건드려 보았다.

“어? 언제 이렇게 열매가 숙성했지? 조금만 더 있으면 수확을 해도 되겠어. 아가 마님이 기뻐하시겠는걸.”

때마침 온실 정원 안으로 루시엘이 들어왔다.

“시클라인 선생님.”

“어서 오세요, 아가 마님. 마침 잘 오셨어요, 이거 보세요. 티에리 열매를 이제 수확해도 되겠는걸요? 그런데 이렇게 빨리 익다니 신기하네요.”

“아……. 그러네요. 잘됐어요.”

루시엘이 수줍게 웃으면서 빨갛게 익은 열매를 바라보았다.

사실 그녀가 오기 전에 길리아트에게 부탁해, 티에리 열매에 그로우 마법을 써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효력은 바로 나타났다.

‘할아버지의 그로우 마법, 최고잖아. 진작 부탁할 걸 그랬어.’

“아 참, 시클라인 선생님께 제안 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이미 공작님께는 허락을 받아 두었지만, 아마 이 시험에 통과해야 완벽하게 확정이 될 것 같아요.”

“네? 어떤 일인가요? 아가 마님 영지에서 제 약을 판매하는 일 말인가요? 그건 아직 준비가 조금 더 필요하시다고…….”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맞아요. 그 준비 과정 중 하나인데, 벨슈타인의 약제사가 될 방법이 있어요.”

루시엘의 말에 시클라인의 눈동자가 커졌다.

“……어, 어떻게요? 약제사가 되려면, 약초학술원을 졸업해야…….”

루시엘이 가방에서 제국의 신문 기사를 꺼내 보여 주었다.

‘황실 공인 약제 기능사 자격시험’ 일정이 있는 기사를 살펴보던 시클라인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이, 이건…….”

시클라인도 과거에 눈여겨보았던 시험이었다. 다만 현재 삶에 바빠서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저는 시클라인 선생님이 지금도 약제사로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걸 공식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면 이제 시클라인이 하는 일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거예요. 여기 도전해 보시는 게 어때요?”

“물론 좋아요. 하지만…… 다음 달이면 시간이 너무 촉박한걸요.”

“이번에 만약 떨어진다고 해도, 그다음 시험도 있어요. 그러니까 도전이라도 해 보도록 해요!”

평상시에도 약초학 도서를 끼고 사는 그녀라면, 시험도 잘 보지 않을까. 기본 실력이 출중하니 말이다. 루시엘은 그런 믿음이 있었다.

“……사실 이론이라면 저도 웬만한 약초 도감을 다 읽어서 알고는 있어요. 저 시험을 치르고 싶은 마음은 항상 있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준비가 어느 정도 되어있다는 말이죠? 이제 남은 건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뿐이겠어요.”

시클라인의 눈동자에 깃든 자신감을 읽은 루시엘은 활짝 웃으며 그녀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러면 에바한테는 사정을 말해 둘 테니 어서 시험 접수하러 다녀와요!”

“네, 고맙습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어쩌면 항상 꿈꾸던 약제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시클라인도 마음이 부풀었다.

시클라인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앞치마를 벗고는 온실 정원을 떠났다.

루시엘은 온 김에 피닉스의 장미 상태를 다시 살펴보며 말을 걸었다.

“피닉스 님? 마나 드릴까요?”

평소 같았으면 신난 목소리가 들려왔을 텐데,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루시엘은 제 마나를 끌어모아, 손끝으로 피닉스의 장미에게 전달했다. 꽃잎과 줄기, 뿌리까지 골고루 하얀 빛이 은은하게 감쌌다가 흩어졌다.

* * *

까악, 까악.

커다란 까마귀 한 마리가 검은 장벽을 넘어가려다가 루시엘이 있는 곳으로 내려앉았다.

“이 까마귀, 오늘도 또 왔어!”

지난번에도 본 적이 있는 그 까마귀였다. 꽁지깃이 유독 길고, 푸른색으로 빛나는 까마귀.

루시엘이 벨을 데리고, 벌레 사냥을 나갔을 때 자그맣고 약한 새인지라 먹이로 인식했는지 공격하려고 해서 마법으로 쫓아냈었다.

그리고 까마귀는 오늘도 루시엘의 어깨에 앉은 벨을 노리고 날아왔다.

또 공격하려나 싶어 겁을 주기 위해 마법을 날리자 언뜻 스친 까마귀의 발끝에서 서신이 툭 떨어졌다.

지난번에도 정보를 재촉하는 듯 의미심장한 서신을 확인했지만, 그 사실을 들키지 않게 까마귀에 다시 묶었었다.

더 확실한 증거를 위해서는 좀 더 기다려야 했다.

‘이번 서신이야말로 결정적인 증거가 될 것 같아.’

이번에는 내부에서 밖으로 보내지고 있었으니 이건 확실히 외부인과 내통하는 자가 있다는 소리였다.

평범한 까마귀가 아니라 공작성 내부의 기밀을 밖으로 전달하는 전서구임이 틀림없었다.

하여, 루시엘은 그 즉시 해당 서신과 까마귀에 대한 일을 공작에게 전달했다.

서신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늘 밤 손잡은 마도사와 함께 ‘중앙관리실’을 털 예정이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서신을 읽어 내린 공작이 그것을 꾸깃 접으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고맙구나, 루시엘. 아무래도 성안에 배신자가 숨어 있었던 모양이다.”

“누구일까요……? 벨슈타인의 가신들은 전부 충직한 줄 알았는데…….”

루시엘의 말에 공작은 한 점의 흔들림도 없이 말했다.

“신하는 군주를 믿되, 군주는 신하를 믿지 않는 법이다. 가족을 제외하고 나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

그의 말에 루시엘은 왠지 씁쓸해졌다. 벨슈타인의 수많은 사람을 거느려도, 믿기 어려운 자들뿐이라면 얼마나 힘드실까.

그만큼 군주로서 그의 삶은 녹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루시엘은 적어도 몇몇 사람은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엘링턴이나 에바도 말이에요?”

“그 두 사람은 벨슈타인의 가족이나 다름없지.”

“그렇게 여기신다니 정말 다행이고 기뻐요.”

공작의 말에 루시엘은 안심이 되어 맑게 웃었다. 사르르 녹아내린 마음이 또롱, 하고 토파즈를 만들어 냈다.

“앗…….”

루시엘은 자신도 모르게 감정을 드러낸 것이 부끄러워져서 보석을 붙잡았다.

그런 아이의 뺨을 귀엽다는 듯 그가 살짝 쓰다듬었다.

“내가 보증하지. 너에게도 그들이 가족이 되어 줄 거다.”

“저도 두 사람을 믿어요.”

루시엘을 보고 공작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서신에 다시 눈이 닿자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양 곧바로 표정을 바꾸었다.

“의심 가는 자가 있긴 하다만, 일단 오늘 두고 보면 알겠군. 관리실의 마도사를 전원 모아서 매수당한 자가 있다면 자백을 들어야겠다.”

루이비드가 실로 악당처럼 음산하게 웃었다.

그것이 이런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다소 오싹하게 만들었다.

루시엘 역시 벨슈타인의 가신들에 대한 인상은 대부분 좋았으나, 최근 불만을 품고 있던 인물이 떠올랐다.

‘테오 자작은 내 의견에 번번이 이의를 제기했었지. 왜 그랬을까. 벨슈타인이 잘되는 것이 싫은 걸까?’

물론 그것만으로 그를 의심할 수는 없었기에 루시엘은 조용히 생각을 접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공작이 먼저 같은 사람의 이름을 언급했다.

“테오 자작이 평소 하지도 않던 행동을 가끔 한다는구나. 보름마다 야근을 한다지. 그러고 보니 오늘이 그 보름이 되는 날이로군?”

마도사와 몰래 접촉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밤 시간대에 만났을 가능성이 컸다.

평소 늘상 야근하던 이라면 의심을 안 했겠으나, 안 하던 이가 더군다나 처리할 업무도 없는데 정무궁에 남아 있다는 보고를 들으니 의아하긴 했다.

“앗, 그렇군요. 그래도 좀 더 신중히 알아보는 게 좋겠어요.”

루시엘은 곰곰이 머리를 굴리다가 떠오른 생각을 말했다.

“가신들이 작성한 서명과 이 서신의 필적을 대조해 보면 어떨까요?”

“엘링턴이 그 분야에는 일가견이 있지.”

그도 문서를 직접 조작한 적이 있었으니까. 사실 그 분야로만 나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공작은 그런 뒷말은 삼킨 채, 엘링턴을 불러 모든 가신의 서명과 해당 서신의 필적을 살펴 감정에 나섰다.

그중 필적이 비슷한 후보는 둘이었다.

루퍼스 자작과 테오 자작.

그러나 루퍼스 자작은 야근 한 번 없이 꼬박꼬박 집에 들어가는 것으로 아주 유명했다. 귀여운 딸을 보기 위해서라고 했지.

그러니 남은 것은 역시 테오 자작. 돋보기까지 동원하여 필체를 감정하고 난 엘링턴이 말했다.

“일부러 눈속임을 위해 철자의 끝 모양을 교묘하게 사선으로 작성했지만, 이건 테오 자작의 필체가 맞습니다.”

“……속이 투명한 쥐새끼로군. 벨슈타인의 뒤통수를 칠 큰 꿈을 품은 것치곤 말이지.”

“으음. 지금 체포를 할까요?”

“아니다. 몇 시간 더 꿈꾸게 하고 현장에서 잡지. 중앙관리실 소속의 마도사들은 전원 호출해 가두어 둬라. 단 한 놈도 빠짐없이.”

일말의 감정 따위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는 진심으로 화가 났을 때 오히려 더 이성적으로 변하곤 했다. 그것이 공작의 무서운 점 중 하나였다.

“이크, 각하께서 정말 화가 나신 모양입니다.”

엘링턴은 다음 과정은 아가 마님에게 보여 주기엔 적절하지 않은 듯하여, 그녀를 내보내며 말했다.

“자아, 아가 마님께서는 이제 방으로 돌아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앗, 네에. 그가 범인이 맞다면 꼭 응징해 주세요.”

“물론입니다, 아가 마님.”

* * *

야심한 시각, 모두의 눈을 피해서 정무궁에서 고양이처럼 발을 놀리던 남자가 있었다.

그는 로브로 얼굴을 꽁꽁 싸맨 채 빠져나와 약속 장소인 공작성의 중앙관리실 건물 뒷문으로 갔다.

장벽의 실드를 관리하는 중앙관리실 건물은 출입 자격을 가진 마도사와 공작의 최측근이 아니라면, 가신들조차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보안이 철저한 곳이었다.

로브 아래로 얼굴을 살짝 드러낸 테오 자작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황성과 까마귀로 서신을 주고받던 중, 피로연 이후로 검은 장벽의 실드가 재배치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이든 확실한 정보를 가져온다면, 자네의 공을 생각해 추후 확실한 보상을 약속하겠네. 자네도 북부에 남아 있는 것보다는 이쪽으로 넘어오는 게 낫지 않겠는가?’

팔로스 보좌관이 과거부터 누누이 하던 말이었으나, 지금껏 큰 활약은 하지 못해 황자께서 심기가 불편하다 하셨다.

그러나 장벽의 실드는 그로서도 좀체 알아내기 어려운 기밀 사항인지라, 내부 마도사에게 접근해 선물 공세를 하는 등, 그간 공을 들여 왔다.

벨슈타인의 약점을 알아내 황실에 붙은 후, 황자가 황위에 오르기만 한다면……!

‘그리하면 천방지축으로 공작가를 쥐락펴락하며 날뛰는 계집아이의 꼴도 더는 안 보아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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