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엄청난 힘에 루시엘은 자연스레 다른 보석들의 힘도 궁금해졌다.
아직 연구하지 못한 보석들은 이번에 새롭게 만들어 낸 페리도트, 스피넬, 옵시디언, 그리고 다이아몬드였다.
무엇보다 가장 궁극적인 문제는 이 보석들의 힘을 어떻게 자신이 쓸 수 있는가였다.
그때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길리아트가 루시엘의 어깨를 살짝 짚었다.
그동안 루시엘은 속성을 발현하지 못해, 무속성 마법만을 사용하고 있었다.
과거에 루시엘이 자신에게 류프델을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루시엘의 의도를 이제야 알 것만 같았다.
“루시엘. 혹시 이 보석들에 담긴 원소의 힘을 직접 사용하기 위해서 연구하는 것이냐?”
“네, 맞아요. 보석의 힘을 직접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지금보다 더 강한 마법을 쓸 수 있을 거예요.”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리고 나서 에리카에게 말했다.
“에리카 언니, 연구하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다음에는 더 어려운 걸 부탁할 거 같은데 오늘은 이만 쉬시는 게 어때요?”
“알겠어요. 가기 전에 식당에 들렀다가 가도 되나요?”
에리카는 긴장이 풀렸던지 배를 살짝 문지르면서 말했다.
“물론이에요. 배불리 먹고 가세요. 에리카 언니에겐 언제나 든든히 식사를 챙겨 놓으라고 했으니까요.”
“후후, 감사합니다. 길리아트 님,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오냐, 에리카. 고생 많았다.”
에리카가 연구소 건물을 떠나자마자 길리아트가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물었다.
“루시엘, 이제 둘만 있으니 더 할 이야기가 있는 게지?”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제가 보석을 연구하게 된 진짜 이유요. 사실은 과거에 황태자가 검에 제 보석을 박아서 그 힘을 사용했었거든요. 저도 보석의 힘을 온전히 제힘으로 쓸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서요.”
“역시 그렇구나. 과거의 에리카가 검을 완성했다고 하질 않았니? 그걸 어떻게 가능하게 만들었을까.”
루시엘은 다시금 그 검을 떠올렸다. 검 표면에는 일부러 만든 것인지 열두 개의 홈이 파여 있었다.
“음……. 그런데 제 보석을 박기 전에도 이미 홈이 파져 있었어요. 거기에 비밀이 있지 않을까요?”
“보석을 세공할 수 있도록 홈이 파진 검이라…….”
길리아트도 특별한 마법의 힘이 담긴 검이나 지팡이, 도끼를 익히 보아 왔지만 홈이 있는 무기는 본 적이 없었다.
특히 검은 예민하고 까다로운 무기라 함부로 몇 개씩이나 홈을 파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무기의 균형을 망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길리아트는 아무래도 류프델에게 다시 한번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씩 들를 때마다 각오를 하고 가야 할 만큼, 마계 중에서도 가장 어둑한 칠흑의 무저갱에 있는 밤의 대장간.
그곳에서 가장 반짝이는 무기와 물건을 만드는 검은 난쟁이, 류프델의 지식이 필요했다.
지난번에는 그가 터널을 열어 주어 쉽게 오갔지만,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또 귀찮다고 성을 낼 듯싶었다.
길리아트에게 은혜를 입었다곤 해도 난쟁이 특유의 성미는 여전히 고약한 탓이었다.
‘루시엘을 위해서라면야…… 이 할애비는 지옥에도 다녀올 수 있지.’
“할아버지? 무슨 생각을 하세요? 아니면 보석 세공사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루시엘이 해맑게 묻자 길리아트가 답했다.
“오호, 그것도 좋은 방법이구나. 루시엘. 그런데 할애비는 잠시 들를 곳이 생각이 나서 말이다…….”
“……어디요?”
“류프델을 만나고 올 거란다.”
“앗, 그는 위험한 마계에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건 네게는 그렇다는 거지. 이 할애비는 강하니 괜찮다.”
그럼에도 루시엘은 그가 걱정되어 눈썹을 늘어뜨렸다.
“안 돼요. 저 때문에 위험한 곳에 가시는 거라면. 그럼 우선 보석 세공사부터 알아보도록 해요. 그 뒤에 알아봐도 늦지 않을 거예요.”
루시엘은 길리아트의 품에 파고들었다. 보석의 힘을 얻는 것도 좋지만 어디까지나 가족의 안전이 먼저였다.
루시엘의 작은 등을 토닥이던 길리아트는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루시엘. 아까는 그냥 지나쳤다만 정말 저 관측 도구는 어떻게 승인을 얻어냈지? 혹 아르제온을 만났느냐?”
“……아, 아뇨.”
“아르제온이 비밀로 해 달라고 한 모양이구나. 지금 그는 어디에 있지? 설원을 짐승 꼴로 헤맨다더니…….”
“헤헤헤, 아마도요. 할아버지, 시장하시지 않으세요?”
“그리 말 돌리기냐?”
길리아트가 섭섭한 듯 말하면서 루시엘을 다른 말로 꼬드겼다.
“아르제온이 있으면, 평범한 마법사 백 명의 몫은 할 텐데 말이지. 게다가 빙결의 마법사이니 이번 가뭄에도 큰 도움이 될 터인데 아주 아쉽구나.”
“…….”
얼음일지라도 물과 맞닿은 속성이니만큼 물 마법에 능한 모양이었다.
길리아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아르제온이 새삼 아주 강한 자구나, 하고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은 힘이 봉인되었다고 하니까, 그 정도는 아닌 걸까?
루시엘은 길리아트가 성으로 먼저 돌아가자 랄프에게도 영지민들에게 과일을 나누어 주라고 심부름을 보냈다.
아기 영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루시엘은 이글루에 웅크리고 있던 눈사슴 아니, 아르제온에게 도도도 다가갔다.
“……저기. 우리 이야기 좀 할까? 길리아트 할아버지가 눈치를 채신 것 같아.”
‘아르제온의 봉인도 언젠가 풀어야겠지?’
봉인을 푸는 방법에 대해서 그와 짧게 이야기 나눈 적이 있었다.
아르제온의 힘의 봉인을 풀려면 특별한 곳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피네 설원 어딘가에 있을 얼음의 제단.
그곳에 아르제온의 힘이 봉인된 얼음의 심장이 있다고.
그걸 되찾으면 그의 힘이 돌아온다고 했다.
‘과거 피닉스가 있었던 불의 제단과 비슷한 곳일까?’
루시엘은 짧은 생각이 스쳤다.
그러자 아르제온은 루시엘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며,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러니 솔직하게 정체를 밝히는 건 어때?”
만사 귀찮다는 듯 아르제온이 일어나서 루시엘을 힐끗 바라보더니 이내 풀쩍 영지의 입구까지 달아나 버렸다.
그의 태도에 루시엘도 조금 답답해서 주머니에 가지고 있던 팔찌를 찼다. 그러자 은빛 팔찌가 빛나며 달아나던 아르제온의 발굽을 멈추게 했다.
화아아!
잠시 근처를 비추는 눈부신 빛 때문에 루시엘은 눈을 살짝 손바닥으로 가렸다.
이내 옅은 한숨을 내쉬는 물빛 머리카락의 아르제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 팔찌를 쓰면 멀리 못 가는 건 어떻게 알아냈지?”
“응? 아. 그동안 건초 주면서 관찰했으니까.”
루시엘이 팔찌를 끼고 있는 날이면, 아르제온은 근처에서 풀을 뜯으면서 노닐었다.
팔찌를 끼지 않은 날은 늘어져 낮잠을 자다가도 기다렸다는 듯 멀리까지 다녀온 적이 많았다.
승인 기구의 승인을 받으러 가던 날도 루시엘은 팔찌를 끼지 않았다. 일부러 시험하려고 끼지 않았기도 하지만.
“제법 눈치가 빠르구나. 조그만 아이가.”
아르제온이 싱긋 웃으면서 루시엘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하얗고 보송한 아이의 뺨을 쭈욱 잡아 늘렸다.
루시엘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이어 아(이거 놔).”
시아빠도 이제 함부로 못 꼬집는 볼이었다.
“알았다. 하지만 길리아트에게 내 정체를 밝히는 건 싫다고 말한 거로 알고 있는데.”
“……노는 게 좋아서?”
“안식 기간이라고 해 두지.”
“그치만 세상에는 당신의 강한 힘이 필요한 곳이 많아.”
“고작 나 하나 때문에 굴러가지 않는 세계라면 존재 가치가 있을까.”
느른하게 내려다보는 아르제온의 말에 루시엘은 화가 났다.
“……뭐라고?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지금도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말에는 동의할 수 없어.”
이번에는 루시엘이 홱 돌아서서 가 버렸고 어쩔 수 없이 아르제온이 루시엘의 뒤를 졸졸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꼬맹아, 가려거든 팔찌는 빼고 가지?”
“…….”
그러나 루시엘은 일부러 두다다 달려가 아르제온마저 한참 달리게 만든 다음에야 팔찌를 뺐다.
“……임자 하난 제대로 골랐군.”
아르제온이 픽 웃으며 초록빛 이동포탈을 여는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 * *
서늘한 바람이 부는 날씨에도 소년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흰색의 수건이 흠뻑 젖을 정도로 전신의 땀을 빼고서도 키제프는 검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호리호리했던 몸에도 이제 제법 소년티를 벗을까 말까 잔 근육이 자리잡혀 가고 있었다.
쭉 곧게 뻗은 몸은 조금씩 어깨도 넓어지며 체격이 더해져 갔다.
사락사락.
초여름의 푸른 잎사귀들이 나뭇가지에 살랑살랑 매달려 화음을 만들어 냈다.
과거에는 보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추위를 타고 꽃을 좋아하는 누군가 덕분에 벨슈타인을 감싼 검은 장벽 안의 기후는 전보다 더 온화한 날씨로 유지되고 있었다.
키제프는 루시엘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입가에 물리는 미소를 지우고, 다시 검술 훈련에 집중했다.
목검으로 휘두르기와 베기를 이백 번 채운 다음에야 진검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검날이 날카롭게 움직이며, 고도의 집중력을 기울이는 그 순간, 붉은색 오러가 회오리치듯 검을 휘감으며 방출되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하아.”
아직 오러를 제 것으로 온전히 운용하지 못하는 아쉬움에 키제프는 입술을 깨물었다.
핏빛으로 타오르는 키제프의 눈동자는 루시엘의 비밀을, 그 애의 과거를 알게 된 후부터 더욱 뜨거워졌다.
‘루시엘을, 벨슈타인을 지키기 위해서 강해져야만 한다.’
막연히 강해져야겠다는 결심이 더욱 구체화되었고, 그 마음은 스스로를 몰아치게 만들었다.
그는 루시엘이 자고 있을 새벽부터 일찍 별궁에서 사라지곤 했다.
기사단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기사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훈련과 정신을 다듬는 데에 꽤 도움이 된다는 것도 깨달았다.
“도련님께서 요즘 부쩍 훈련에 열의를 보이시는 것 같습니다. 기사단의 누구보다도 연무장에 가장 먼저 나오시고, 가장 늦게 들어가시곤 합니다.”
“아직 오러를 담아내는 시간은 얼마 안 된다고 하였지. 이래서는 마법사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자르가의 흡족한 말에도 루이비드는 퍽 냉혹한 평가를 내렸다.
사실 일반적으로 마법사는 소드마스터가 되기에 제약이 있었다.
인간의 심장은 하나뿐이니, 마력만을 담아내는 데에도 모자란데 오러까지 제대로 운용하는 것은 사실상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그 제약을 뛰어넘은 장본인이 바로 그 자신이었다.
마족의 핏줄을 타고난 압도적인 마력, 그걸 뒷받침하는 드래곤의 핏줄만이 가진 강한 심장.
혹자는 드래곤하트라고도 칭하지만, 드래곤의 피를 이어받은 자는 그 힘을 온전히 받지 않더라도 필연적으로 강한 신체를 가졌다.
‘드래곤의 땅, 드락카에서 키제프의 검술 스승이 곧 도착하기로 했으니 차차 발전이 있겠지.’
키제프와 이벨린이 함께 찾아와 한 부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