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그, 그것이 사실 제가 사막에 다녀오다가 그 씨앗을 몇 알 구해 오긴 했습니다만…….”
“했습니다만?”
루시엘과 엘링턴이 주먹까지 발끈 쥔 채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내가 후원에서 키우다가 죽였다고 들었던 거 같습니다만, 하하하. 혹시 살아 있는 식물이 있는지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네, 꼭 좀 부탁드려요.”
그렇게 찾아간 길렌 백작가의 후원에서 다 죽어 가는 워터드래곤 한 포기를 찾아낼 수 있었다.
“아가 마님, 바로 이겁니다. 워터드래곤.”
루시엘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상태가 조금 안 좋긴 하지만 가뭄 대비책으로 식수를 해결할 방법이 될지도 몰라요!”
“식수 대용으로 쓰기엔 너무 작지 않을까 싶습니다.”
길렌 백작이 말하면서 워터드래곤을 화분으로 옮겼다. 주렁주렁 열린 조롱박 같은 열매는 시들시들해도 어른 주먹만 한 크기였다.
“워터드래곤을 대량으로 많이 구할 방법이 없을까요?”
“알아보긴 하겠지만, 콴드라 지역의 식물을 들여오기까지는 시일이 좀 걸릴 겁니다.”
엘링턴의 답에 루시엘이 중얼거렸다.
“그럼 이 작은 워터드래곤이라도 무럭무럭 크게 만들 수는 없을까요? 그렇게 되면 영지민들의 식수로 쓰면 딱, 좋을 텐데 말이에요.”
“네에? 아아아! 그런 방법이!”
“좋은 방법인데요?”
눈을 댕그랗게 굴리던 길렌 백작도, 듣고 있던 엘링턴도 동시에 외쳤다.
“길리아트 각하의 마법이라면 워터드래곤 종자를 들여오기 전까지 임시로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저 작은 바람을 말한 거였는데 임시라도 실현 가능성이 있는 거라면, 두말할 나위 없이 좋은 해결책이었다.
엘링턴이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길리아트 각하께 알려 드려야겠습니다. 분명 방법이 있을 겁니다.”
“우리 아가 마님은 어른들이 생각지 못한 걸 알려 주시는군요. 정말 워터드래곤을 식수로 사용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리하여 길리아트를 찾아간 세 사람은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다. 나무 속성을 가진 길리아트는, 식물을 거대하게 자라게 할 수 있었다.
이내 마을의 중심으로 다다른 길리아트가 초록빛 지팡이를 꺼냈다. 디그 마법으로 흙을 파헤치자 기다리던 마법사들이 토양에 특수 비료를 골고루 뿌렸다.
기후에 안 맞는 식물도 특수 영양분이 든 비료를 넣으면 마법과 시너지를 일으켜 잘 자라곤 했다.
다만 가격이 매우 비싼 탓에 희귀한 식물을 재배할 때만 쓰이는 비료였다.
루시엘은 들고 있던 워터드래곤을 파헤쳐진 흙 위에 직접 심었다.
흙을 도닥인 다음 아무도 못 보게 손으로 가리며 보석도 하나 같이 심었다.
‘피닉스의 장미도 좋아했으니까, 이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부디 잘 자랐으면 좋겠어. 모두에게 도움이 되기를.’
루시엘이 구덩이를 벗어나자 마법사들이 그곳에 비를 뿌렸다.
“다들 잠시 물러나거라.”
파아아앗.
길리아트가 눈에 힘을 주면서 마력을 끌어모았다. 순식간에 워터드래곤이 쭉쭉, 크게 자라기 시작했다.
굵기도 굵기이거니와, 조롱박 하나의 크기가 무척 거대하여 멧돼지 정도 되는 크기였다.
마법이 완성되자 워터드래곤은 마을의 모양새도 바꾸어 놓을 정도로 인상적인 크기로 자랐다.
길리아트는 쉴 새 없이 주문을 외웠다. 워터드래곤에는 연달아 추가로 보호막을 씌웠다. 조롱박 열매 하나라도 잘못되지 않도록.
“마법으로 보호되고는 있지만, 함부로 나무를 훼손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효력은 보름 정도 갈 것이다.”
가뭄이 아직 시작되지 않은 상황이니, 콴드라 지역의 식물을 완전히 들여오기까지 적당히 시간을 벌 수 있을듯했다.
열매의 개수는 어림짐작으로 백여 개는 되어 보였다.
모두가 경이로운 눈으로 그걸 지켜보았다. 그러나 아직 이 상황을 쉬이 이해하는 눈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감격스러운지 모두 커다란 워터드래곤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선대 공작 각하이시니 직접 무언가를 물어보는 건 어려운 눈치였다.
루시엘은 일부러 영지민들이 궁금해할 질문을 대신 하려고 팔을 번쩍 들었다.
“할아버지, 저기 열려 있는 열매를 다 먹으면 어떻게 될까요?”
지팡이를 짚은 채로 위엄 있게 좌중을 둘러보던 길리아트가 루시엘에게만은 부드럽게 표정을 풀며 대답해 주었다.
“강력한 그로우 마법이 걸려 있으니, 일정량 이상의 열매를 따면 두세 번까지는 새로 자랄 것이란다. 다만 그것도 마법에 의한 것이니 보름 정도가 지나면 새로 자라지 않게 된단다.”
그의 대답에 사람들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열매의 물은 어떻게 마시지요?”
“곧 열매를 식수로 사용할 수 있게 특수 막대를 열매와 연결할 예정이니까, 그 막대를 통해 나오는 물을 마시면 되지. 천연 우물이라고 생각하면 되겠군.”
“정말 멋져요!”
얼마 되지 않아서 도구를 가져와 설치가 완료되었다.
긴 막대를 따라서 열매에 차 있는 물이 콸콸 흘러나오자, 영지민들이 너도나도 그릇을 가져와 물을 받아 갔다.
워터드래곤 시음까지 끝났다.
갑작스레 예고된 가뭄과 식수 문제로 걱정이던 촌장과 베르가 자작, 영지민들의 표정이 단박에 밝아졌다.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이 나무는 우리 마을의 자랑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귀한 선물입니다.”
마을 촌장과 영지민들이 깊이 감사를 표했다. 안심이 되는 동시에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뻤다.
“휴우, 한시름 덜었구나. 루시엘.”
“네, 길렌 백작님 후원에 워터드래곤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그래, 우리는 이제 그만 돌아가도록 할까?”
“저는 아기 영지에 잠시 들러야겠어요.”
“그러려무나. 도움이 필요한 것은 말하도록 하고.”
길리아트의 배려에 루시엘이 조심스레 제안했다.
“할아버지도 같이 가시겠어요?”
“그거 좋지.”
이제 가족들에게 숨기는 것은 없으니까 루시엘은 편안한 마음으로 길리아트와 함께 아기 영지까지 마차를 타고 다다랐다.
그러자 그곳에는 기다렸다는 듯 에리카가 연구소 건물 밖으로 나와 있었다.
루시엘이 먼저 랄프의 도움을 받아 마차 밖으로 폴짝 내렸다.
“루시엘 님!”
“에리카 언니.”
에리카가 단발을 찰랑이면서 루시엘을 보자마자 폭 안았다.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요.”
“네, 그러게요. 그간 피로연 때문에 좀 바빴어요.”
“후후, 연구를 마쳐서 결과를 보고드리려고 기다렸……. 어머나. 길리아트 님도 계셨군요?”
살짝 늦게 마차에서 내리는 길리아트를 보고, 에리카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제 입을 틀어막았다.
“루시엘 님?”
“괜찮아요. 할아버지도 아세요. 고생했어요, 에리카 언니.”
“아! 그렇군요.”
“에리카, 여기서 다 보는구나.”
“넷.”
에리카는 마탑의 일은 제쳐 두고 몰래 여기서 루시엘을 도왔으니 혼나는 것이 아닌가 싶어 힐끔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길리아트는 잠잠했다. 루시엘이 쪼르르 길리아트의 팔을 붙잡고는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할아버지, 에리카. 우선 저기로 같이 들어가서 이야기 나눌까요?”
루시엘은 미색의 연구소 건물을 가리켰다. 그 안에 갖추어진 관측 도구들과 연구 시설을 살핀 길리아트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이거 아주 제대로 꾸며 놓았구나. 잠깐, 이 시설은…….”
길리아트가 거대한 관측 도구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마치 커다란 벽난로처럼 생긴 그것은 그도 알고 있는 도구였다.
“이건 아르제온의 승인이 있어야만 할 텐데?”
“아, 그, 그건 시아빠가 구해 주셨어요!”
루시엘이 그렇게 둘러댔지만 길리아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루시엘, 솔직히 말해 보거라. 나는 아르제온 그놈을 잘 아는데 말이지. 루이비드가 협박해도 승인을 턱턱 내줄 놈은 아니란다.”
“…….”
‘미, 미안해요, 아르제온. 아무래도 들킨 거 같은데.’
아르제온은 유유자적 아기 영지의 초원을 노닐다가 마차가 도착하자 길리아트가 왔음을 알고 멀리 달아난 상태였다.
루시엘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지만, 길리아트는 웃으면서 말했다.
“어쨌든 그 이야기는 나중에 듣기로 하고 에리카의 연구 결과부터 들어 볼까.”
그러자 에리카가 안내했다.
“두 분, 이쪽으로 와 주십시오.”
에리카는 사실 내내 루시엘에게 연구 결과를 알려 주려고 들떠 있었다.
“흠흠.”
그녀는 목소릴 가다듬어 흥분을 가라앉힌 후, 관측 도구 위에 둥실둥실 떠 있는 보석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설명했다.
에리카가 관측기구 위에 사파이어 하나를 옮겨 놓자 바늘이 금세 가장 높은 눈금인 200을 가리켰고, 이내 그것이 두 바퀴나 핑핑 돌았다.
그건 수치가 현저하게 넘칠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연구를 진행한 보석들은 전부 최상급 마정석 이상의 마력 수치를 가지고 있다는 게 확인되었습니다. 관측 바늘이 가장 높은 눈금을 가리키는 거로도 모자라 두 바퀴를 더 돌고 있지요?”
에리카는 미리 작성해 둔 보고서를 살피면서 말을 이었다.
“현존하는 최상급 마정석의 수치가 200인걸 감안했을 때, 이 보석들의 마력 수치는 최소 두 배 이상, 가장 마력이 컸던 루비의 경우는 세 배 이상이 아닐까 추정됩니다.”
루시엘은 가만히 듣고 있는 데 반해 길리아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뭐라고? 기존 마정석의 두세 배에 달하는 수치란 말이냐? 허, 허허허. 이거 참.”
길리아트는 너무 놀라 헛웃음이 나고 말았다.
‘에리카는 루시엘의 보석의 출처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하였지. 그나저나 루시엘이 만든 보석의 가치가 그만한 마력을 지녔다니 정말 대단하군.’
현존하는 최상급의 마정석만 해도 고가에 거래되는 귀한 물건인데 그에 몇 배라니.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보석들에는 전부 원소의 힘이 들어 있습니다.”
에리카가 마법 플라스크 안에 사파이어와 반응을 일으키는 시약을 넣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물이 생기기도 하고, 얼음이 맺히기도 했다.
“도대체 믿을 수가 없군. 내가 뭘 보고 있는 것이냐!”
마법보다도 더 마법 같은 일이었다. 루시엘의 보석에 저런 힘이 숨겨져 있었다니…….
이는 엄청난 가치를 가진 것이었다. 마력을 머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원소의 힘까지 가졌다니.
길리아트는 심장이 두근거리고 몸이 떨리는 듯했다.
“루시엘, 이건 마법학적으로 역사가 없었던 이례적인 일이란다. 이 보석의 가치는 환산할 수조차 없을 만큼 귀하구나.”
“맞습니다. 길리아트 님. 저도 연구하면서 어찌나 떨리던지…….”
에리카도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숨을 꼴깍 넘겼다. 두 사람의 반응이 그러자 루시엘도 자신의 보석이 그렇게 대단한 거구나 싶어, 기분이 묘했다.
“정말요?”
그렇다면 더더욱 이 힘을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사용할 수 있다면 좋겠다.
루시엘은 차분히 에리카가 다음 설명을 이어 주기를 기다렸다.
“정리해 보면 에메랄드는 바람, 루비는 불, 토파즈는 땅, 사파이어는 물과 얼음의 힘을 가졌답니다.”
“보석 하나에 힘이 두 개씩이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