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왜 그래, 누이?”
“어, 아니야. 어서 와.”
클로디아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풀어졌다. 레이놀드가 아이리스에 코를 파묻고 향을 음미하듯 깊이 들이마셨다.
“향이 좋네. 로맨틱하기도 하지. 아, 알프는 모레쯤 황성으로 도착한다더군. 이 꽃을 먼저 주고 싶다고 보내와서 내가 가져왔어.”
“알프…… 라니?”
처음 듣는 이름에 클로디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 내가 이야기 안 했던가. 알프레도 왕세자와는 유학 중에 친우가 되었다고 말이야.”
레이놀드가 길게 뻗은 아이리스의 줄기를 살살 매만지면서 말했다. 클로디아의 눈이 커졌다가 티 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옮겨 앉으며 말했다.
“아니. 처음 듣는구나. 우리가 이렇게 가까이 지낸 적이 없었으니 그런 말을 들을 기회도 없었잖아.”
“아, 그랬지. 이제 누이와 좀 가깝게 지내 보려고.”
레이놀드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알프가 어찌나 누이를 보고 싶어 하던지, 그간 나를 귀찮게 했거든.”
“나를 보고 싶어 한다고? 공식 석상에서도 마주친 적이 없는데?”
“아, 누이의 초상화를 보았고 기사로도 접했다는군. 자신의 이상형과 완벽하게 부합한다나.”
레이놀드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클로디아는 최근 몰래 듣게 되었던 어머니의 말을 떠올렸다.
벗처럼 지내는 라라 부인에게만 몰래 내보인 속내였다.
‘……언젠가는 떠나보내게 되겠지. 가능하다면 오래 곁에 두고 싶었는데. 다른 별이 진짜 내 별을 쫓아내려는 꼴을 보자니 내 맘이 안 좋네.’
‘황후 폐하…….’
‘어쩌겠나. 다 못난 내 잘못인 것을.’
정확히 누구인지 지칭하지 않았지만 자신과 레이놀드를 지칭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별은 황가의 자손을 뜻하는 말이었으니까.
레이놀드가 나를 쫓아내다니 그건 대체 무슨 뜻일까?
설마 자신의 존재가 훗날 위협이 될까 봐 미리 손을 써서 정략결혼 시키려고 한 걸까?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결혼 이야기가 나오고 보니 이제야 어머니의 말을 조금쯤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차피 황위는 그에게 계승될 텐데. 아니면 조금의 싹이라도 남겨 두지 않겠다는 심산인가.
‘그의 속내가 뭔지 알 때까지 경계하는 게 좋겠어.’
클로디아의 눈이 깜빡임 없이 말했다.
“네 말대로라면 내 이상형과는 조금 거리가 있네.”
“뭐?”
“나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 마음을 전하는 사람이 제일 별로라고 생각해……. 그만큼 자신이 없다는 거잖아. 난 자신감 넘치는 남자가 좋거든.”
클로디아가 해맑게 웃으며 말하자, 내내 빙글거리며 웃고만 있던 레이놀드의 미소가 뚝 멈추었다.
“그래? 누이에게 그런 확고한 취향이 있는 줄은 몰랐네. 하지만 만나 보면 알 거야. 내 친우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괜찮은 남자야.”
클로디아는 레이놀드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곁에 있는 시녀에게 말했다.
“아, 저 꽃다발 너무 예쁘지만 밖으로 내다 줘. 프엣취! 몰랐는데 내게 알레르기가 있는 것 같구나.”
“예에, 황녀 전하.”
레이놀드의 표정이 더욱 서늘해졌지만 클로디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레이놀드 이 꽃을 전해 주러 온 것뿐이지? 미안한데 오늘은 내가 좀 쉬어야겠어. 그만 나가 줄래?”
“……그래, 푹 쉬도록 해.”
저를 똑똑히 보면서 단호하게 말하는 클로디아가 낯설어, 레이놀드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그녀의 방을 떠났다.
순진하게만 굴던 황녀가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레이놀드는 조바심이 났다.
그런다고 해서 황위가 제게 오지 않을 리는 없지만.
‘얌전히 결혼하는 게 좋을 거야, 누이. 안 좋은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말이지.’
황녀궁을 나와 야외 정원을 서성이던 레이놀드의 앞으로 시커먼 옷을 입은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하.”
“여자는 아직도 못 찾았나? 어떻게 되었지?”
“예, 그것이…… 여자는 이미 행방불명된 지 꽤 된 것 같습니다. 마지막 행적이 시칠렌의 와인 재배지인 건 확실한데, 감쪽같이 사라졌답니다.”
“뭐라고?”
“아무래도 중요한 정보를 지니고 있던 여자 같은데, 입막음을 위해 처리된 건 아닐지 추정됩니다.”
“누군가 벌써 알고 움직인다는 건가.”
“숙부는 그 뒤로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진 않았고?”
“예.”
레이놀드가 혀를 한번 차고는 남자에게 사라지라고 명을 내렸다.
때마침 팔로스가 헐레벌떡 둔중한 몸을 이끌고 달려왔다.
“황자 전하! 어찌 이런 으슥한 곳에 계십니까.”
“아, 누이에게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하느라 왔다가 산책하던 중이지요.”
“황녀 전하께서 꽃다발을 받아 보고 함박웃음을 지으셨습니까?”
“아니요. 너무 구닥다리였나 봅니다.”
레이놀드의 말에 그 구닥다리 의견을 제안한 팔로스가 잠시 시무룩한 표정으로 수염을 쥐어뜯었다.
“그렇습니까.”
“당분간은 우리가 개입 안 하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만 사냥터에 갈 터이니, 내일까진 저를 찾지 마시고요.”
“예, 예. 알겠습니다. 전하.”
고개를 조아리는 팔로스를 레이놀드가 스쳐 지나갔다.
* * *
한편 가뭄을 대비해 벨슈타인의 모든 이들이 부지런히 발을 벗고 나섰다.
마을마다 곧 찾아올 가뭄 소식을 알리고, 방비할 대책을 나누었다.
“아가 마님께서 이번 여름 가뭄이 든다고 하셨네. 다들 지금 내리는 빗물을 받아 두고 절수하여, 가뭄에 대비함세. 최대한 우물을 파 두도록 하고.”
“가뭄이 혹 얼마나 갑니까요?”
“후년까지 간다고 하니 방비를 단단히 해 두어야 할 것이네.”
“히익…….”
“너무 걱정하지 말게. 마을마다 마법사들이 돌면서 마법으로 물을 나누어 줄 것이네.”
마을의 촌장에게 이야기를 전하던 베르가 자작은 말을 하다가 아꼈다.
‘다만 보유한 마법사 인력으로 충당이 될지 그게 걱정이로군. 길리아트 각하와 상의를 해야겠다.’
영지 안에는 커다란 호수도 있지만, 그 물을 이 먼 마을까지 옮기기에는 힘들 터.
베르가 자작이 공작성으로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데 마침, 길리아트와 루시엘을 태운 마차가 호위 기사들과 함께 마을 앞에 당도했다.
영지민들은 물론이고, 마을 촌장이 마차를 환영하며 손을 흔들었다.
베르가 자작도 지팡이를 짚으면서 마차 앞으로 다가갔다.
“어서 오십시오. 길리아트 각하, 그리고 아가 마님.”
“고생이 많으세요, 자작님.”
루시엘이 고개를 숙여 공경을 표했다.
“베르가 자작, 자네 무릎도 아직 쓸 만하군. 이리 먼 마을까지 오다니 말일세.”
길리아트가 반가움에 껄껄 웃으며 농을 건네자, 베르가 자작이 가자미눈을 하고 말했다.
“지금 그럴 때인가요. 마침 잘 오셨습니다. 의논드릴 일이 있었는데…….”
“뭔가?”
“가뭄이 2년이나 지속되는데 영지의 마을을 다 돌면서 마법으로 물을 수급하기에는 마법사의 수가 턱없이 모자라지 않을지요?”
“안 그래도 마탑에 지원 요청을 해 두었다네.”
“……허허. 잘하셨습니다. 마탑이 그리 쉽게 지원을 허락하던가요?”
“대신 당분간은 그리로 매일 출근하기로 하였지…….”
“대가를 치르셔야지요.”
“……아르제온이 있다면 내가 이 고생을 안 할 터인데 말이지.”
길리아트의 말에 루시엘은 움찔 괜히 저가 찔렸다.
“그래도 마을마다 식수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어요!”
“그, 그게 정말입니까?”
루시엘이 싱그레 웃으며 들고 온 화분을 베르가 자작에게 보여 주었다.
때는 어제였다.
가뭄에 대한 대비책은 어느 정도 마련되었으나, 마실 수 있는 식수가 문제였다. 우물을 최대한 많이 파 두라는 방침을 내렸지만, 그 우물까지 마를 가능성도 있으니 말이다.
특히 영지에서 멀리 있는 마을들은 물을 나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루시엘이 내내 장서관에 틀어박혀 대책을 더 고민하다가 대륙의 지리서에서 보았던 서부 사막 지역을 떠올렸다.
서부 콴드라 지역의 사막은 일 년 내내 뜨거운 햇빛이 작렬하고 물이 귀한 지역이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사막 가운데에도 물이 샘솟는 오아시스가 있는가 하면, 사막 지역에서만 자라는 물을 머금은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식물 덕분에 사람이 살 수 있다고 했다.
‘만약 그 식물을 얻을 수 있다면 마을에 심어서 식수로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가신들 중 길렌 백작이 과거 사막을 횡단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루시엘은 그에게 그 식물에 대해 묻기로 했다. 가신들이 일하는 정무궁 내부를 살펴보니 가뭄 때문인지 다들 정신없어 보였다.
마침 익숙한 낯이 보여서 루시엘은 그를 붙잡았다.
“엘링턴.”
“아가 마님 아니십니까?”
“혹시 길렌 백작님 자리에 계신가요?”
“길렌 백작은 왜 찾으시나요?”
엘링턴이 궁금한 눈빛으로 말했다.
“길렌 백작님이 예전에 사막에 다녀오셨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니면 사막에 다녀온 사람이 또 있을까요? 사막에는 물을 머금은 열매를 가진 식물이 자란다고 해서…….”
“아, 그런 식물이 있다고 저도 들은 적은 있습니다만. 마침 길렌 백작님이 저기 오십니다.”
“앗, 길렌 백작님! 여쭤볼 것이 있어요.”
“아가 마님? 저를 찾으셨습니까? 미스릴은 무사히 채굴 중입니다. 항상 아가 마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은혜를 도대체 언제 갚지요? 하하하.”
길렌 백작은 엄청난 양의 미스릴 채굴 후로 루시엘만 보면 흐뭇한 웃음을 지으면서 은혜를 갚겠다고 했다.
루시엘이 웃으면서 답했다.
“혹시 서부 사막 콴드라 지역에만 있다는 물을 머금은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열매를 아세요?”
“예? 아아. 혹시 워터드래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워터드래곤?”
“예, 서부지역 콴드라의 유랑민들이 기른다는 워터드래곤 말입니다. 조롱박이 주렁주렁 열린 것인데 그 안에는 물로 가득 차 있어서 급하게 목이 마르면, 그걸 따서 마신다고 합니다. 하하하.”
“앗, 과즙이 아니라 물이 들어 있나요?”
“예, 싱그러운 향이 나지만 거의 물과 똑같다고 합니다. 저도 맛을 본 적이 있는데, 시원하고 물맛과 비슷했습니다.”
워터드래곤이라.
과연 사막뿐 아니라 물이 없는 지역에서 꽤 유용하게 쓰일 식물로 보였다.
루시엘이 웃으며 말했다.
“백작님, 제게 은혜 갚을 기회 드리려고요.”
“예,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그 워터드래곤을 구해 주시면 정말 큰 선물이 될 것 같아요.”
그러나 루시엘의 말에 길렌 백작이 난감히 이마를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