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107)화 (107/282)

<107화>

“원 이 녀석아. 하나를 건너뛰고 둘부터 묻는 게냐?”

“분명 잘될 거라고 믿고 있었어요.”

“어째서냐?”

“최고는 최고를 알아보는 법이니까요.”

갈리우스도 루시엘에게 제법이라는 듯, 실실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조그만 녀석이 여간내기가 아니란 말이지.”

그는 턱을 문지르더니 결과를 말해 주었다.

“벨슈타인에게서 후원을 받기로 결정했다. 발루크 상단이 주기로 한 금액의 세 배에 달하는 조건으로. 발루크 상단에 일부 금액을 주고, 남은 건축물도 짓지 않기로 합의를 볼 것 같군.”

“와, 잘됐어요. 그러면 그쪽은 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겠어요.”

루시엘은 진심으로 잘되어 기뻤다. 그래야 갈리우스가 벨슈타인의 일을 위해서만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

“축하드려요.”

“네 공을 잊지 않으마. 갖고 싶은 거라도 있느냐?”

루시엘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건 훗날을 위해 아껴 두기로 했다. 검은 장벽의 보강을 위해서는 아직 먼 길을 가야 하니까.

집무실에서 계약 서류를 챙겨 갈리우스를 뒤따라 나온 엘링턴이 루시엘에게 살짝 인사하며 미소 지었다.

“아가 마님, 오셨습니까? 이번 후원 건으로 벨슈타인도 든든한 건축가를 얻게 되어서 다들 기대가 큽니다. 다 아가 마님 덕분인 거 아시죠? 봉급 타면 맛있는 거 사드리겠습니다.”

“전부 제 덕분은 아닌걸요. 그렇지만 맛있는 건 사양 안 할게요.”

웃으며 대답하자 엘링턴도 눈인사를 보내며 갈리우스에게로 갔다.

루시엘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공작은 서류에서 눈을 겨우 떼고는 눈매를 휘었다.

“루시엘?”

“보고드릴 게 있어서 왔어요.”

루시엘이 조막만 한 손으로 그의 책상 위에 보고서를 올려놓았다. 공작은 차가 식을 때까지 한참 동안 그걸 검토하다가 입을 열었다.

“영지민들을 만났던 모양이군.”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기왕이면 한 번에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키제프와 함께 영지민들을 만난 이후에도 두 번 정도 더 만난 적이 있었다.

비상약은 시클라인이 현재 열심히 만들어 나누어 준 적은 있지만, 그건 일시적일 뿐이었다.

“가장 시급한 건, 영지민들의 건강 문제예요. 현재 영지 내에서 약을 쉽게 구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어요.”

“흐음…….”

“그래서 제가 생각해 보았는데, 시클라인이 만든 간단한 비상약을 팔 상점을 영지민들이 자주 접하는 곳에 세우면 좋을 것 같아요.”

“……자주 접하는 곳이라.”

“시범으로 제 영지에 먼저 세우면 어떨까요?”

“약을 만들 인력과 운영비가 들 터인데?”

“약은 시클라인이 만들어 줄 거예요. 돈은 할머니께서 주신 제 용돈에서 쓸 거고요. 그래서 그런데 그녀를 벨슈타인의 약제사로 추천하고 싶어요.”

“정식 약초학술원을 졸업한 것도 아닌 그녀를……?”

루시엘의 의견에 공작이 의문을 제기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그녀는 약 만드는 데에 재능을 가지고 있어요. 기사들과 공작성 사람들도 그녀가 만든 약의 효과를 톡톡히 보았거든요. 저랑 레오니도 그랬고요.”

“흠…….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좋다. 정무 회의의 안건으로 올려 보도록 하마. 대신에 가신들은 그녀의 자격을 물고 늘어질지도 모르겠는데.”

루시엘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약초학술원은 한번 들어가면 졸업할 때까지 4년 이상이 걸리는 곳이었다. 그리고 대개는 졸업하면 황성에 취직했다. 그만큼 오랜 시간과 노력, 돈이 들어가는 학업이었다.

그곳에 들어가는 것도 좋겠지만, 그러면 그때까지 영지민들은 여전히 약을 구하기 어렵고, 마나영양제를 얻을 시기도 늦춰진다.

게다가 루시엘이 보기에 이미 시클라인은 약초에 대해 박학다식했다.

차라리 자격을 증명하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그때 루시엘의 눈에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제국신문이 들어왔다. 거기에는 ‘황실 공인 약제 기능사 자격시험 일정’이 적혀 있었다.

‘바로 이거야. 다음 달에 열리는 약제사 자격시험! 그녀가 합격한다면 충분한 자격을 인정해 주실 거야.’

“시아빠, 그럼 이 시험에 통과하면 그녀가 가신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겠지요?”

루시엘이 기사를 보여 주며 활짝 웃었다.

“확실히 그렇겠군. 루시엘 덕분에 할 일이 많아지는걸.”

“앗, 죄송해요.”

“아니. 좋다는 뜻이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일을 의논하고 루시엘이 가져온 제안서를 회의의 안건으로 올리도록 하겠다는 공작의 말에 루시엘은 환히 웃었다.

루시엘은 레니 쿠키를 챙겨서 집무실 회랑을 나오다가 문득 밖을 바라보았다.

비가 주룩주룩 쏟아지고 있었다.

“맞아, 그러고 보니……! 이때쯤 큰 가뭄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기사를 이전 생에서 봤었는데.”

라파예트 산사태가 일어난 지 불과 1년도 되지 않은 때 찾아온 가뭄 때문에 벨슈타인 공작령의 농가가 시름을 겪고 있다는 신문 기사가 있었다.

과거 가뭄을 미리 대비하지 못해 영지가 타격을 입는 것은 물론, 영지민들은 식량난으로 기아에 시달려 죽기까지 했다.

영지 전체가 큰 피해를 입는 참혹한 사건이 틀림없었다.

“이, 이것도 말씀드려야 돼…….”

루시엘은 다급하게 다시 공작의 집무실로 되돌아갔다.

* * *

루시엘이 알린 가뭄 예언 소식에 공작은 즉시 긴급회의를 소집해, 가신들을 불러모았고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회의에 루시엘도 함께 참석해 특별히 마련된 어린이용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던 가신들이 루시엘에게 다가와 물었다.

지난 산사태 사건도 정확히 예측했고, 그 외에 미스릴을 발견하고 최근 건축가 갈리우스의 마음까지 돌린 루시엘이었기에 이제 그녀를 의심하는 눈초리는 사라졌다.

대신 그들은 가뭄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으로 혼란스러운 듯했다.

“아가 마님, 가뭄이 정확히 언제부터 언제까지 계속되는 것인지요?”

가장 나이 많은 가신 베르가 자작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루시엘에게 물었다.

“아마도 한두 달 정도 남은 것 같아요. 그리고 가뭄은 2년이 넘게 가게 될 거예요.”

루시엘의 말에 가신들이 동요하면서 어수선하게 떠들었다.

“정말 큰일입니다. 앞으로 2년 동안은 영지가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게 아닙니까.”

“아가 마님, 왜 이제야 그걸 알려 주시는 건지요.”

테오 자작이 루시엘을 원망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과거에도 루시엘의 예지몽을 의심하던 자였다. 그러자 길렌 백작이 그를 꾸짖었다.

“대체 무슨 무례를 저지르는 거요. 아가 마님께서 예지몽을 매일 꾸시는 것도 아니질 않소?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도 크나큰 은혜인데 그 고마움도 모르고!”

길렌 백작의 말에 테오 자작이 입술을 삐죽였다. 분주한 일정 때문에 그 일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루시엘이 죄책감에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공작이 서늘하게 테오 자작을 노려보다가 루시엘의 손을 가만히 잡아 주며, 가신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테오 자작을 제외한 다른 가신들은 모두 아가 마님이 알려 주신 것만으로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해 주었다.

루시엘은 그제야 겨우 밝은 낯빛을 했다. 베르가 자작이 말했다.

“아직 가뭄이 오기까지 두 달이라는 시간이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이오?”

루퍼스 자작은 창밖을 보며 말했다.

“그럼 지금 내리는 저 빗물이라도 받아 두어야 하는 건 아닌지요?”

“에이, 그걸로 되겠소? 마도사들을 더 모집하여, 기상 마법으로 비를 내리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각하.”

길렌 백작이 걸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영지 내에 커다란 호수가 있으니 그 물을 농지로 끌어다 쓸 수 있을 거예요.”

루시엘이 눈동자를 빛내며 의견을 보태자 가신들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공작이 일어나 장내를 둘러보며 가신들에게 말했다.

“다들 계속 머리를 굴리도록. 차근차근 생각하면 다 방법이 있다. 테오 자작은 다시 한번 입을 잘못 놀렸다간, 세 달치 봉급이 없어질 줄 알아라.”

“……아가 마님께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테오 자작은 찍소리도 못한 채 루시엘을 향해 꾸벅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겉으로는 그리 말하면서도 그는 몰래 불만 섞인 탄식을 내뱉었다.

‘어린아이 하나에게 다들 벌벌 기는구만.’

* * *

황성으로 돌아간 클로디아 황녀는 노란색의 실거베라에 보존마법을 걸어 잘 보이는 응접실에 두고 보면서 루시엘을 생각했다.

예법 스승인 백작 부인도 깊은 뜻을 헤아리며 칭찬했다.

“노란색 실거베라의 꽃말은 우정이란 뜻이랍니다. 어린 공자비가 황녀님과 진심으로 친구가 되고 싶으신가 봅니다.”

“응, 그런 듯하지? 나 역시 그러해. 어쩐지 마음을 주고 싶은 아이였어.”

클로디아는 눈토끼처럼 자그맣고 보송하던 루시엘을 떠올리면서 맑게 웃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단둘이 있을 적에 루시엘이 귀띔해 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황녀 전하는 너무 곱고 예쁘시니까, 최대한 천천히 결혼하셨으면 좋겠어요. 오래오래 타이라 제국에 남아 저랑 함께 놀아 주셔야 해요. 아셨지요?’

그러는 공자비는 벌써 결혼하셨잖아요? 하고 웃어넘겼다. 어린 공자비가 뭘 알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공교롭게도 곧 메이너드 왕국의 왕세자가 방문할 예정이었다.

친교를 위한 인사차 방문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제게 청혼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황녀로서 정략혼은 당연한 운명이라고 생각했으나, 루시엘의 말이 걸려서일까.

클로디아는 왠지 왕세자의 방문이 달갑지가 않았다.

“황녀 전하, 레이놀드 황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레이놀드라고?”

“예.”

클로디아는 귀를 의심했다. 벨슈타인에서 따로 귀환한 후로 레이놀드는 황자궁에 틀어박혀 사냥만 즐긴다질 않았나?

게다가 벨슈타인 공작성에서도 이상하게 행동했었다.

묘하게 벨슈타인 공작가를 적대시하던 기색.

간간이 내비치던 불안감과 초조함이 가득한 눈동자.

연회가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제게 유독 살갑게 굴어 이제 조금 어색함이 풀리나 싶었는데, 웬걸. 지금은 더 어색해진 듯했다.

다음 만찬 때까지는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클로디아는 내키지는 않지만 명했다.

“들어오라고 하렴.”

낯을 드러낸 레이놀드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누이, 내가 뭘 가지고 왔는지 알면 깜짝 놀랄걸.”

레이놀드가 가져온 건 아주 커다란 보라색 아이리스 꽃다발이었다. 짙은 향기가 어느새 방을 가득 채워 질식해 버릴 만큼 많았다.

아이리스는 메이너드의 국화였다.

메이너드의 왕세자가 보내온 것이 틀림없었다.

‘잠깐, 레이놀드와 왕세자가 아는 사이였던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