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연회가 끝나자마자 벨슈타인은 곧장 성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성의 마도사도, 사용인들도 모두 총동원되어 평소의 벨슈타인 성으로 되돌리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 많은 사람이 다 어디로 갔을까 싶을 정도로, 한순간에 고요한 공작성으로 돌아왔다.
마치 한바탕 꿈이라도 꾼 것처럼.
루시엘은 이 층 난간 위에 겨우 닿을까 말까 한 팔을 기댄 채 내성 안을 오도카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래층에는 솔리아페와 에바가 사용인들에게 지시를 하고 있었다.
연회에 사용되었던 테이블과 의자, 장식품의 위치를 전부 바꾸고 식탁보와 커튼까지 바꾸는 모양이었다.
솔리아페의 낯빛이 다소 창백해 보여, 루시엘은 약간 걱정이 되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피닉스의 기운을 나누어 받은 지도 꽤 된 것 같았다.
‘요 며칠 어머님께 신경을 못 써드렸어.’
루시엘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가 마님! 시간이 많이 늦었어요. 고단하실 텐데 이제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푹 쉬시는 게 좋겠어요.”
베시가 다가와 몸을 숙여 다정하게 말했다. 루시엘은 아직 빨간색의 화려한 드레스를 그대로 입고 있었다.
낯빛도 그렇고,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기색이라 걱정이 되었다.
“잠깐만, 베시. 옷은 조금 이따가 갈아입을게.”
“네에, 어디 가세요?”
“어머님이랑 산책.”
“그럼 신발이라도 갈아신고 가셔요.”
“고마워!”
루시엘은 애나멜 구두를 벗고 베시가 챙겨 주는 푹신한 슬리퍼로 갈아신고 뾱뾱, 계단을 내려갔다. 새하얀 레이스 스커트 단이 바닥에 끌렸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루시엘이 얼른 솔리아페와 이벨린 앞으로 가서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올려다보았다.
“어머님, 시간 괜찮으시면 저랑 잠시 산책해요.”
이마를 짚고 있던 솔리아페가 한참 조그만 루시엘을 내려다보고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제안은 고맙지만 지금은 이것들 먼저 정리해야 한단다, 루시엘.”
아직 집 안을 정돈하는 일이 끝나지 않았다.
평소의 루시엘 같으면 거절의 말을 들으면 금방 순한 얼굴로 알겠다고 대답했겠지만, 오늘은 포기할 수 없었다.
루시엘은 이번에는 이벨린에게 가서 말했다.
“할머니, 아직 일이 많이 남았나요?”
“으응? 아니다. 어제오늘 가장 고생했으니 솔리아페는 그만 가 보거라. 아까부터 몸도 안 좋은 것 같아 보이는구나.”
“그래도 어떻게…….”
“얘는. 눈치 보지 말고 어서 가라. 피곤함이 덕지덕지 묻었구나. 어서!”
이벨린이 웃으면서 솔리아페의 등을 떠밀었고, 에바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님, 어서 가세요. 여긴 제가 처리해도 충분하니까요.”
에바의 눈짓에 솔리아페도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할게.”
루시엘은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는 솔리아페를 밖으로 이끌었다.
“루시엘, 산책이 그렇게 하고 싶었니?”
“네, 시간을 많이 뺏지는 않을게요.”
이윽고 다다른 온실 정원은 저녁이 되자 은은한 마법 랜턴이 켜져, 분위기가 근사했다.
“응? 여긴 온실 정원이구나.”
“……요즘은 몸이 어떠세요? 오늘 많이 힘들어 보이셔서 걱정이 되어서요.”
“한동안 좋아졌는데 최근엔 과로 때문에……. 아, 산책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여기 온 거였어? 루시엘.”
솔리아페는 루시엘의 예쁜 마음에 감동해, 무언가 왈칵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피닉스의 장미 기운을 다시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두 사람이 피닉스의 장미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몸을 산들산들 흔들며 피닉스의 장미 봉오리가 살짝 꽃잎을 열어 더 화사하게 피었다.
―오, 루시엘이구나! 목 빠지게 기다렸다.
“제 마나 여러 번 가져가도 좋으니까, 오늘은 우리 어머님에게 기운 많이 나누어 주세요. 아프시지 않게요.”
파아앗.
파르라니 따뜻하고 밝은 빛이 온실 정원을 한동안 가득 채웠다.
루시엘의 맑고 투명한 마나가 피닉스의 장미에게, 그 기운이 또다시 솔리아페에게 오롯이 전달되었다.
피닉스는 이리되면 자신의 부활이 늦어질 수 있다고 투덜거렸지만, 생기 있는 장밋빛 뺨으로 돌아온 솔리아페의 얼굴을 보자 루시엘은 안심이 되었다.
“확실히 기운이 나.”
피닉스의 장미에게서 기운을 받고 안정을 찾은 솔리아페가 말했다.
“우리 새아가, 너에게 도대체 무엇으로 보답해야 좋지?”
“그냥 한번 안아 주세요. 그걸로 족해요.”
루시엘은 고개를 붕붕 저으며 그녀의 스커트 자락에 폭 안겼다. 솔리아페는 정말 기운이 났는지 루시엘을 번쩍 들어 안아 주었다.
루시엘은 그 포근한 품이 기뻐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또롱, 또롱!
그러곤 별처럼 예쁜 토파즈와 에메랄드를 만들어 냈다.
솔리아페의 눈이 커졌다가 이내 부드럽게 휘어졌다. 허공에 맺힌 보석이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말로는 들었지만 눈으로 보니 더 신기한 힘이네.”
루시엘은 솔리아페의 품에서 빠져나와 토파즈를 바치듯 양손 위에 올려 내밀었다.
“어머님 귀걸이로 하면 예쁠 것 같아요.”
“그건 안 돼.”
솔리아페가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너에게 주어도 모자란데, 그걸 어떻게 받을 수 있겠어? 그 보석들 때문에 네가 힘들게 살아왔다는 걸 아는데 말이야.”
“그치만…….”
“루시엘, 네 보석이 산더미처럼 쌓이면 그때 하나쯤 받으마.”
어째 벨슈타인가 사람들은 다들 루시엘이 만든 보석을 거절하는 것 같았다.
탐욕스럽던 사람들과 다르게 가족들은 조금도 욕심내지 않았고, 그것이 고마웠다. 루시엘의 마음에 사라락 따뜻함이 내려앉았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네, 어머님.”
“그런데 루시엘, 나도 엄마라고 불러 주면 좋겠는데.”
“네엣?”
갸웃하는 루시엘이 귀여워 솔리아페가 푸스스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순수한 아이를 건드리려 하다니, 황자는 이번 생에서 명이 짧겠구나. 내가 죽어도 그자의 목을 치고 죽을 터이니…….’
한편 피닉스의 목소리가 루시엘의 발길을 붙잡았다.
―역시 요정의 아이! 얘야, 루시엘, 그게 네가 만든 보석이니? 아주 싱싱하고 많은 마력이 느껴지는구나. 그 보석을 나에게 주면 부활이 앞당겨질 것도 같은데…….
외면하기 어려운 말에 루시엘은 솔리아페에게 잠시만 밖에서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 다음, 피닉스의 장미에게 다가갔다.
“그게…… 정말이에요?”
하지만 자신의 보석을 탐내는 모습에 루시엘은 피닉스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주는 마나로는 부족한가요?”
―그렇다기보단 방금처럼 다른 사람에게 내 치유의 기운을 나누어 주면 부족해지니 말이다. 네가 무얼 걱정하는지 안다. 주고 싶지 않으면 주지 않아도 돼.
보석이 탐이 나서 일부러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은 피닉스의 장미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보석은 자주 만들고 있으니까…… 솔리아페를 위해서라도 아깝진 않다. 루시엘은 조심스레 물었다.
“보석 드릴게요. 어떻게 하면 되죠?”
―나를 심은 화단에 같이 묻어 줘.
“좋아요.”
루시엘은 얼른 토파즈와 에메랄드를 하나씩 심고, 황금 물뿌리개로 물까지 준 다음 흙을 토닥였다.
그러자 피닉스의 장미가 춤추듯 몸을 흔들었다.
―놀라운걸. 이렇게 마나가 찰랑찰랑 넘치다니……. 고맙다, 고마워.
호들갑스럽게 좋아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 지 몇 초 지나지 않아 조용해졌고, 이내 펼쳤던 꽃봉오리를 꼭꼭 닫았다.
“응? 피닉스 님, 괜찮은 거예요?”
그러나 꽃봉오리를 꼭 닫은 후로 피닉스는 루시엘이 몇 번이고,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었다.
“혹시 잘못된 건 아니겠지? 아니면 보석을 다 먹었다고 일부러 자는 척하시는 건 아니죠?”
피닉스가 더는 반응하지 않으니 루시엘은 온실을 조용히 나갔다.
‘별일 없겠지?’
* * *
피로연 이후로 시간은 물 흐르듯 흘러 어느덧 칠 월이 코앞에 이르렀다.
루시엘은 오랜만에 공작의 집무실을 찾았다.
집무실 앞에는 엘링턴의 후임으로 들어온 보좌관 두 명의 자리가 마련되었기에 그들이 먼저 루시엘을 맞이해 주었다.
“안녕하십니까, 아가 마님. 무슨 일로 오셨을까요?”
“공작님을 뵈려고 왔어요. 드릴 것도 있고요.”
루시엘은 두툼한 문서를 보여 주며 말했다. 영지민들의 의견을 취합한 내용에다가, 추가로 루시엘의 의견도 덧붙인 제안서였다.
“그럼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안에 손님이 계십니다.”
“네.”
루시엘은 전용 소파에 앉아 기다리면서 테이블 위에 있는 원형의 케이스로 시선이 갔다. 테디베어가 그려져 있어 도저히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열어 주세요’라고 써 있는 것 같았다.
루시엘의 진홍빛 눈동자가 향하는 걸 본 보좌관 한 명이 와서 몰래 알려 주었다.
“어제 에바 집사장께서 새로 들인 레니 쿠키랍니다. 아가 마님이 개봉하시길 다들 기다렸어요.”
그 말에 루시엘은 홀린 듯 뚜껑을 열어 보았다. 안에는 진한 버터 향을 가득 품은 프릴 모양의 쿠키들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침을 꼴깍 삼킨 루시엘이 하나 먹자마자, 부드러운 버터 맛이 사르르 입안에 녹아내렸다.
“흑…… 맛있어요.”
순식간에 다 먹어 버릴 뻔했지만, 루시엘은 보좌관들에게도 쿠키를 권했다. 그러나 그들은 쿠키보다는 루시엘이 먹는 모습에 푹 빠져 있었다.
“이 쿠키 최고네요.”
“아가 마님이 최고죠…….”
보좌관들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볼에 과자 부스러기가 묻는 것도 모르고 먹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던 터였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손님은 루시엘도 아는 얼굴이었다.
“앗…….”
루시엘은 공작의 집무실에서 나오는 건축가 갈리우스를 마주치자,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았다.
“안녕하세요, 갈리우스 백작님.”
“루시엘, 너로군.”
제법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걸 보니, 후원을 받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평소 까칠하기만 하던 그의 입꼬리까지 올라가 있는 걸 보면, 꽤 두둑한 액수의 후원금을 받은 게 아닐까 예상이 들었다.
루시엘이 스커트 자락을 붙잡고 일어서면서 눈을 반짝였다.
“어떻게 되셨어요?”
“으음? 무엇이 말이냐.”
무엇을 묻는지 뻔히 알면서 저렇게 능청스레 나오다니, 역시 갈리우스는 보통 아이들이라면 당해 내기 힘들 위인이었다.
루시엘은 그렇다면 먼저 넘겨짚기로 했다.
“후원 건은 잘 되신 것 같으니, 막스 씨에게 스테인드글라스 기법은 언제부터 알려 주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