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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105)화 (105/282)

<105화>

“황녀님! 저희 영지에서 갓 재배한 귀한 아로베나 열매랍니다.”

“황녀님, 초상화에 사인 한 장만 해 주시면……!”

클로디아 황녀는 물밀 듯이 몰려드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모두 무르고, 오로지 루시엘과 반나절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연회의 두 번째 날은 조금 더 자유롭고 풍성한 행사가 마련되어 있어서 루시엘은 클로디아 황녀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갖가지 진미 요리들과 최고의 음악가, 오페라 가수들이 자아내는 아름다운 선율, 남관 회랑 일부도 개방해 골동품과 예술 작품을 전시해 놓은 공간을 마련해 두었다.

야외에는 마창 경기장을 운영하고, 놀이 배를 띄워 유희를 즐기기도 했다.

그로도 모자라 밤이면 쉴 새 없이 하늘을 수놓는 마법 폭죽 덕분에 많은 귀족은 깊은 인상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동안 척박한 북부라 문화적인 부분에서는 저평가받는 벨슈타인의 이미지를 단번에 끌어 올린 날이었다.

“공자비께서 방금 이걸 황녀님께 드렸더니, 활짝 웃으면서 한 보따리를 챙기시더라고!”

“우리도 저것 먹어 봅시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클로디아 황녀와 루시엘의 행보를 일부 귀족들이 뒤따르기도 했다.

연회 테이블에 올라간 달콤한 디저트 중에 수제 딸기 사탕의 인기가 높은 걸 보고, 루시엘은 아무래도 저걸 벨슈타인 기념품으로 만드는 걸 고려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 벨슈타인의 많은 걸 겪고 보니, 그간 세간의 평가가 너무 박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더 많은 걸 알고 싶군요. 공자비과 벨슈타인에 대해서 전부 다요.”

황녀가 눈을 빛내는 걸 보니, 루시엘도 뿌듯하고 흐뭇했다.

“과찬의 말씀이세요, 황녀 전하. 하지만 벨슈타인을 단 하루 만에 모두 아실 수는 없지요. 훗날 기회가 된다면 다른 걸 보여드리고 싶어요.”

“다른 것이라니? 어떤 건지 궁금하네요.”

루시엘은 유리공예를 떠올리면서 미소 지었다.

“아직 말씀드릴 단계는 아니지만, 나중에 꼭 보여드리고 싶긴 해요.”

“그럴 날이 올 거라 믿어요. 돌아가면 분명 벨슈타인이 생각날 거예요.”

클로디아가 웃으면서 루시엘의 자그만 손을 꼭 잡았다.

“이후 열릴 여름 살롱에 공자비도 꼭 참석해 주셔야 해요.”

“여름 살롱이요?”

클로디아가 고개를 주억이면서 말했다.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주제로 글과 시를 발표하는 살롱이랍니다. 어머니께서 주최하시는 것이라, 제국에 단 일곱 개의 가문만이 올 수 있어요. 벨슈타인도 의례적이지만 항상 초대받는 가문 중 하나이니, 공자비도 그날 꼭 얼굴을 봤으면 좋겠어요.”

“앗…… 그렇다면 글을 써야 하나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멋진 글을 발표하는 이는 주목을 받을 거예요.”

“황후 폐하께서는 문학을 좋아하시는군요.”

루시엘은 살포시 웃으면서 속으로 걱정이 되었다.

‘어설픈 걸 발표하면 오히려 망신을 당할지도 몰라.’

그러나 분명한 건 여름 살롱이 황후를 만나고 점수를 딸 기회라는 것. 그거 하나는 확실했다.

한편 루시엘의 뒤를 조용히 따르던 이벨린은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쩜 저리 고운 아이들끼리 어울릴꼬.”

그녀는 루시엘을 지키기 위해 따라다니는 것도 있었으나, 클로디아 황녀가 어떤 아인지 평가하는 면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 사람의 마력이 어떤지 알 수 있는 그녀에게, 클로디아 황녀의 마력에는 사악한 기운이 없어 보였다.

루시엘만큼 맑고 선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에 들었다.

그런 이벨린의 곁으로 다가온 키제프가 조용히 그녀에게 물었다.

“할머니, 루시엘에 대해 다 알게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벨린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웃었다. 오랜 시간을 살아왔는데도 아직도 중년 여성처럼 보일 정도로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만큼은 깊은 세월을 머금어 신비롭게 빛이 났다.

“들었고, 아팠다, 그리고 분노했다. 루시엘이 예사롭지 않은 아이란 건 진즉 알았다만…….”

짧은 말 속에 많은 감정이 느껴졌다.

“키제프.”

“예, 할머니.”

“황자는 황위를 이어받지 못하게 될 거란다.”

이벨린이 산뜻하게 웃으며 키제프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아, 어른들의 일은 어른이 알아서 잘 해결할 테니, 걱정 말고 너는 가서 루시엘을 즐겁게 해 주렴. 알았니?”

“하지만 피로연이 끝나고 아직 드릴 말씀이 남았어요.”

“아직도 더 말할 것이 남았어?”

키제프가 어렵사리 입술을 깨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 그건 나중에 듣도록 하자꾸나. 네 신부는 아주 특별한 아이니 지켜주려면 더 강해지렴. 물론 넌 지금도 강한 아이지만…….”

“네, 그럴 생각입니다.”

키제프는 검술 훈련을 보강할 생각이었다. 자르가 단장은 너무 바빠서 검술 수업을 매일 봐주는 건 무리였기에 새로운 스승을 구해 달라고 요청도 할 생각이었다.

“네게도 조금은 드래곤의 피가 흐르고 있겠지. 네 아버지는 드래곤의 힘을 이어받기를 거부했었단다. 하지만 키제프, 너는 생각이 다르다면 말해 주렴.”

이벨린이 자신과 거의 맞먹을 정도로 키가 훌쩍 자란 손주의 등을 보듬었다.

* * *

‘눈토끼를 지키는 맹수도 있다니…….’

차창을 내다보며, 작은 나이프로 나무토막에 상처를 내는 손장난을 하고 있던 레이놀드의 연한 자안이 지난번 마주친 아이를 떠올렸다.

아주 작고 부드러웠다.

기절하지 않았다면 숨이 할딱거리며 괴로워하는 것도 볼 수 있었을 텐데, 퍽 귀여웠을 것 같아 아쉬웠다.

그 자그만 계집아이를 한번 건드렸다고 해서 이렇게 공작이 곧장 제 목줄을 조여 올 줄은 몰랐다.

그 아이더러 새아가라고 불렀다. 그때 헐레벌떡 뛰어온 벨슈타인 공자의 아내라는 건가.

“피로연의 주인공이었다는 소리군.”

벨슈타인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로 똑똑히 보여 주겠다는 심산인 건지, 그 아이가 그만큼 소중하다는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연회가 끝날 때까지 레이놀드는 튤립궁에서 한 발자국도 떼지 않았다.

그를 놀리기라도 하듯 공작은 틈틈이 최상의 만찬과 유흥거리를 튤립궁으로 보내왔다.

엄청난 배려라고 클로디아 황녀는 기뻐했지만, 레이놀드에게 그것은 배려가 아니라 오히려 조롱이고 견제에 가까웠다.

기어이 팔로스를 만나게 된 것은 황도로 떠나는 날 정오였다. 정신이 팔린 제 누이는, 애프터 눈 티타임까지 즐기고 온다고 했다.

팔로스는 몽롱한 눈으로 느릿하게 레이놀드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레이놀드는 그의 얼굴도 보기 싫다는 듯, 외면하며 황성 마차에 먼저 오르려고 했다.

“……황자 전하! 곁에서 보필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숙부를 기다리다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압니까?”

날카롭게 되받아치는 레이놀드의 말에도 팔로스는 쉬이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멍청하게 물었다.

“연회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던 겝니까?”

“하…… 지금 농담을 하자는 겁니까?”

긴 말을 더 잇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레이놀드는 짜증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한 번을 참고 두 번을 참아, 레이놀드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일단 마차에 올라 이야기하죠.”

“예? 예.”

얼뜬 얼굴로 마차에 오르는 팔로스를 보자, 레이놀드는 자신이 그동안 알던 사람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리카르도 영지에서 연회 전까지 곧장 도착한다는 사람이 왜 이제야 나타난 거지요? 예?”

“……그것이 리카르도에 도착하고, 시칠렌 와인 재배지에 들렀다가 벨슈타인으로 오는 이동게이트를 탄 것까진 생각이 나는데, 드문드문 기억이 끊겨서……. 죄송합니다.”

“그걸 변명이라고 지금……!”

레이놀드가 마차의 손잡이를 신경질적으로 탁 쳤다.

“그 좋아하는 와인에 약까지 즐긴 건 아니시고요?”

황자의 계속되는 비아냥에 팔로스는 침음을 삼켰다.

“내가 그동안 벨슈타인에서 얼마나 수모를 당했는지. 그보다, 시칠렌에서 어떤 여자를 만난다질 않았습니까? 어떻게 됐죠?”

“……여자요? 제가요? 저는 황성으로 보내는 와인 때문에 다녀온 것인데…….”

그렇게 말하던 팔로스도 자신의 기억이 올바른지, 의심이 들었다.

안개처럼 뿌연 것이 머릿속이 정말 무언가에 취해 있는 기분이랄지.

묘하게 즐겁고 몽롱하다는 것도 기이했다.

그런 팔로스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레이놀드는 눈을 감았다.

그동안 외숙부였기에 참아 왔는데, 저리도 멍청하게 굴면서 무슨 큰 뜻을 완성하겠다는 건지.

‘잠깐, 시칠렌으로 떠나기 전 팔로스가 분명 그랬는데.’

‘황자 전하, 이번에야말로 크리스털 페어리를 찾을 단서를 알아낼 것 같습니다. 그 여자를 만나러 갈 계획입니다. 다녀와서 말씀드리지요!’

그런데 다녀와서는 저렇듯 아둔해진 소리만 지껄이다니.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레이놀드는 아무래도 수상쩍다 여기며, 팔로스를 의심스럽게 살폈다.

‘아무래도 숙부만을 온전히 믿기에는 석연치 않은데. 따로 움직여야 할지 모르겠다.’

클로디아 황녀의 명을 받은 시종 아이가 달려왔다.

“황자 전하, 떠나기 전 잠시만 더 기다려 주실 수 있느냐고, 클로디아 황녀 전하께서 여쭈십니다만.”

레이놀드는 깊은 한숨을 내쉰 후 싸늘하게 말했다.

“먼저 출발할 테니, 천천히 오라고 전해라.”

멍청한 것들이 너무도 많아 피곤해질 듯했다.

그러나 하나 얻은 것도 있었다.

벨슈타인의 장벽이 어느 수준인지,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가늠했다.

병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것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하지만 크리스털 페어리를 손에 얻고 나면 벨슈타인의 장벽과 병력 따위는 하등 소용없게 될 것이다.

‘이번의 수모는 그때 갚아 주어야지.’

레이놀드의 눈이 분노로 차갑게 들끓었다.

* * *

“레이놀드 황자와 팔로스 보좌관 무리가 먼저 황도로 떠났습니다.”

자르가의 보고를 듣고 있던 공작은 느른한 얼굴로, 마도사가 뽑아 놓은 문서 두루마리를 쥔 채 웃었다.

최면으로 얻어 낸 정보들이 담긴 문서였다.

이걸로 그들의 계획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도 같았다.

“황녀를 비롯해, 다른 귀족들도 모두 인사 중입니다.”

“그래.”

최면 마법을 걸었다는 사실을 추적할 수 없게 이벨린의 드래곤 마나를 정제한 향을 피웠다.

드래곤 마나는 모든 것을 덮을 만큼 짙어, 마법의 흔적을 지울 때 종종 사용하곤 했다.

이제 연회는 끝났다. 그는 실드를 담당하는 마도사의 수장에게 명했다.

“성문이 닫히는 즉시, 장벽의 실드와 구조를 원래대로 복원해 놓도록.”

“알겠습니다. 복원하는 데에는 이틀 정도 걸릴 예정입니다.”

“알았다.”

그는 성문을 빠져나가는 긴 마차 행렬들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많은 인간이 오가는 상황에서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모르는데 가진 것을 모두 드러내는 건 안 될 일.

사실상 연회를 여는 비용보다, 검은 장벽에 걸어 둔 눈속임과 방어선 구축에 수 배의 자금과 엄청난 마력이 들었다.

후환은 미리 없애는 것이 벨슈타인의 오랜 방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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