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어느새 노을이 저물어 갔다.
간이 문을 통해 로켓을 전달한 지 한참 만이었다. 성문이 열리고 투구를 쓴 병사의 머리가 보이자 팔로스가 반색하며 냉큼 몸을 일으켰다.
“황자 전하께 로켓은 전해 주었나? 어찌 되었는가?”
그러나 벨슈타인의 병사는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제 할 말만 전달했다.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공작 각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뭐, 아, 아니, 로켓은, 황자 전하는 어떻게 되었는가?”
“……따라오십시오. 마차도 함께 안으로!”
그렇게 팔로스는 그의 마차와 함께 공작성 안쪽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팔로스가 병사들에게 가볍게 수색을 당하는 동안 자르가가 마차의 내부를 조사했다.
코를 벌름거리던 그는 진한 냄새를 맡고는 마차에 실린 와인 통을 발견했다.
자르가는 곧장 그 사실을 공작에게 보고했다.
“시칠렌에 다녀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와인 통도 발견되었습니다. 역시 그 여자와 접촉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알았다.”
새하얀 연기가 자욱하게 낀 접견실. 차창 밖을 내다보던 공작이 뒤돌자 시선이 마주쳤다. 팔로스는 숨을 삼켰다.
푸른색과 검정색이 조화로운 망토형 재킷을 걸친 공작의 위압적인 기세는 그 아름다운 얼굴만큼이나 강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눈앞의 공작은 적으로 두면 안 되는 자라는 것을.
그러나 살려 두면, 언제든 제국의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인물이었다.
팔로스는 서둘러 그분의 명령대로 그것을 완성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그 검만이 벨슈타인을 무너뜨릴 수 있으리라.
검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크리스털 페어리의 보석이 필요하다고 그분의 말씀이 있었다.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긴장으로 젖어 가는 손을 옷자락에 문지른 그에게 벨슈타인 공작이 시선을 주었다.
공작이 주머니에 들어 있던 가죽 장갑을 벗고는 무언가를 팔로스 앞에 던졌다.
팅!
바닥에 튕겨져 굴러간 금색의 금속체. 그가 황자에게 전달하라고 병사에게 돈까지 쥐여 주며 보낸 로켓이었다.
겉보기로는 로켓으로 보이지만 그건 비상 통신을 할 수 있는 통신구였다.
냉기와 살기를 동시에 뿜어내며 공작이 말했다.
“참으로 유감이군. 허가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걸 몰래 들이려 하다니. 다른 뜻이라도 있었나?
“이, 이것이 왜…….”
팔로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벨슈타인의 병사는 오직 주군의 명령에만 복종합니다, 하만 자작.”
엘링턴이 싱그레 웃으면서 들어왔다.
공작이 말없이 파이프에 불을 붙이며 서늘하게 노려보았고, 팔로스는 엘링턴과 마주 본 채 떠밀리듯 테이블 앞에 놓인 자리에 앉았다.
마지 취조를 당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도대체 왜 내 앞을 가로막는 것이오? 나는 황자 전하의 보좌관이니, 당연히 그분을 모실 의무와 책임이 있소.”
“음…….”
억울함에 호소하는 팔로스 하만 자작의 마른 얼굴을 들여다보던 엘링턴이 짧게 한마디 했다.
“그렇게 잘 아는 분이 왜 그러셨습니까?”
“뭐, 뭐라고?”
“황자 전하를 곁에서 보필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분이 왜 자리를 비우셨냐는 말입니다.”
“그, 그건…… 잠시 볼일이 있었소.”
엘링턴의 물음에 팔로스가 말을 더듬었다.
“황자 전하를 보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업무였나 봅니다?”
“……크흠, 그,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지 않소?”
엘링턴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뭐 그렇지만 한 가지 문제가 생겨서 말입니다.”
“문제라니요?”
“안타깝지만 황자 전하는 귀환 마차에서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그, 그게 무슨……!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팔로스는 공작을 향해 노여움 가득히 목소리를 높였다.
공작의 서늘한 핏빛 눈동자가 구르며, 냉기가 훅 느껴졌다.
파앗!
순식간에 팔로스의 바로 등 뒤로 텔레포트한 그가 소름 끼치도록 차갑게 말했다.
“내 황실과 맺은 평화협약을 생각해 좋게좋게 끝내려고 해. 더는 내 심기를 거스르지 말았으면 좋겠군.”
“……?”
팔로스가 재빨리 머리를 굴렸으나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공작의 심기를 어디서 건드렸는지.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황자가 우리 가문의 아이를 건드렸다. 내 자식이나 마찬가지인 아이다. 어느 부모가 제 아이를 건드리는데 눈이 안 뒤집히겠나, 응?”
이를 드러내기 전의 맹수처럼 낮은 음성으로 공작이 이를 꽉 물며 말했다.
“……그, 그럴 리가. 황자 전하께서 공자에게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진 않으셨을 겁니다. 공작께서 무슨 오해라도 하고 계신 거 아닙니까?”
“아들이 아니라 내 며늘아기지.”
‘며늘아기’라는 말에 팔로스가 움찔했다. 그는 힐다 볼라디, 그 계집과 나누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오르비아 백작을 찾으신다고 정보상에게 들었답니다. 나으리가 찾으시는 걸 제가 알고 있어요. 눈이 보석처럼 빛나는 여자아이 말이에요. 제가 누군지 안다고요. 그러니 저를 황궁으로 데려가 보호해 주세요. 그래야 정보를 알려 드릴 수 있어요. 안 그러면 저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요. 그 아이는 아주 무섭고 강한 자의 손아귀에 있으니까요.’
‘벨슈타인의 며느리가 바로 오르비아 백작가에서 달아난 그 아이라고요. 보석안을 가진 크리스털 페어리.’
공작의 말을 듣자 하니, 그 계집의 말이 과연 사실인 모양이었다.
오르비아 백작가에 빛나는 눈을 가진 여자아이가 있다기에 수소문 끝에 찾아가 보았지만, 백작은 이미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상태였고 백작저는 폐허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끝인가 싶었는데 벨슈타인 공작가의 감옥에서 도망쳐 나온 여자가 있다는 암흑 정보상의 말을 듣고, 다시 단서를 잡을 수 있었다.
비로소 크리스털 페어리의 윤곽이 드러나게 되었다.
황자 전하께서 벌써 마주쳤다니, 본능적으로 그것을 손에 쥐실 운명인가 싶었다.
그런 팔로스의 머릿속을 꿰뚫은 듯이 공작이 물었다.
“시칠렌 와인 맛은 어떻지?”
“……예?”
당황한 팔로스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공작은 다시 물었다.
“힐다 볼라디를 아나?”
“……모릅니다.”
가늘게 떨며 동공이 확장되는 팔로스의 얼굴을 천천히 뜯어보던 공작이 미간을 구겼다.
“거짓말이 어설퍼.”
퍽.
공작이 팔로스의 목 뒤를 손날로 내려쳐 기절시킨 후, 밖을 향해 말했다.
“마도사.”
“예.”
“그걸 준비해.”
공작의 명에 따라 대기하던 마도사가 최면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공작이 자리를 뜨기 전에 엘링턴과 마도사에게 당부했다.
“뽑을 수 있는 건 다 뽑아 놓고, 나머진 지워. 아직은 이용 가치가 있으니 죽이지는 않겠다.”
“그 여자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누구와 접촉했는지 알았으니, 살려 둘 가치는 없겠지.”
“자르가 단장에게 전달하겠습니다.”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연회장으로 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 * *
공작성 내부에서 그 사달이 났지만, 연회는 완벽하게 아름답고 우아했다. 루시엘은 지금이 아니면 클로디아 황녀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으니 억지로라도 몸을 이끌고 연회장으로 나왔다.
다만 루시엘을 따라붙는 호위 기사로 검은 날개만 셋이었고, 이벨린이 곁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여러 고위 귀족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데 곧 장내로 화려한 차림새의 소녀가 들어섰다.
밀밭처럼 금빛이 도는 갈색 머리카락에 자수정처럼 보랏빛 도는 눈동자, 늘씬하고 큰 키를 가진 소녀였다.
마치 일시아 언니처럼.
루시엘은 한눈에 그녀가 클로디아 황녀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클로디아 황녀는 여러 귀족이 다가오자 눈인사로 화답을 해 주고 루시엘과 이벨린이 있는 곳으로 곧장 걸어왔다.
“클로디아 황녀, 어서 오시지요.”
“루시엘 폰 벨슈타인. 제국의 별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자신의 어깨높이보다도 더 키가 작은 아이가 의젓하게 인사하자, 클로디아는 미소를 머금었다.
자그만 하얀 병아리 같은 아이는 상대를 무장해제시킬 만큼, 보송보송 귀여웠다.
정말 누군가 보지 않는다면 냉큼 데려다가 동생 시키고 싶을 정도로.
올해 열여섯 살인 클로디아는 귀여운 여동생이 있으면 했었다.
“귀여운 공자비, 만나 뵙고 싶었어요. 소문보다 더 작군요?”
“앗…… 열심히 먹고 있는 중이에요, 황녀 전하.”
루시엘이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살짝 숙여 황녀에게 예를 표했다.
드레스 자락은 너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펼치는 것도 잊지 않고.
에바에게 왈츠를 배우면서 황실의 인사법도 같이 익혔다. 완벽한 예법은 아니었지만 어린아이치고는 훌륭해서 클로디아는 내내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럴 수가. 황실 인사법도 아는군요? 아직 아기 같은데, 어쩌다가 공자 같은 무뚝뚝한 분이랑 결혼하게 되었어요? 어머, 혹시 실례되는 질문이라면…….”
루시엘이 고개를 살랑 젓고는 그녀에게 잠시만 귀를 달라고 했다. 루시엘의 대답은 이랬다.
“하나도 안 무뚝뚝해요. 말랑말랑 카스테라 같아요!”
“뭐, 뭐라고요?”
이내 클로디아 황녀가 장내가 떠나가라 호탕하게 웃는 바람에 루시엘은 양 볼에 홍조를 띄웠다.
‘대답이 이상했나……? 키제프의 소문이 이상하게 나면 어떡하지?’
루시엘은 클로디아 황녀를 위해 미리 준비한 노란색 실거베라 꽃다발을 선물했다.
실처럼 가느다란 꽃잎이 촘촘히 나 있는 해바라기를 닮은 꽃이었는데 시원시원해 보이는 외모가 어쩐지 클로디아 황녀와 닮아 보였다.
“클로디아 황녀 전하, 방문해 주셔서 기뻐요.”
“고마워요. 너무 예쁜걸요? 아 참…… 나도 준비한 것이 있는데.”
클로디아가 시녀장에게 맡겨 두었던 결혼 선물을 가져오게 했다.
뜻밖에도 직접 뜨개질한 레이스 손수건이었다. 벨슈타인을 상징하는 B가 수놓아져 있었다.
“드래곤은 도저히 수놓을 자신이 없어서……. 레이스 손수건 하나쯤은 숙녀에겐 필수니까요. 아, 다른 반짝반짝한 선물은 폐하와 황후 전하께서 다른 마차 편으로 주셨으니까, 따로 확인해 보도록 해요.”
“……이것만으로도 너무 감동이에요. 직접 만든 선물을 주실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어요. 감사해요, 황녀 전하. 소중하게 간직할게요.”
클로디아와 루시엘은 처음 보았지만, 서로의 솔직하고 꾸밈없는 모습에 끌렸다.
레이놀드 황자와 같은 황가의 핏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클로디아 황녀는 소탈하고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너무 좋아서 걱정될 정도랄까.
어느새 가볍게 손까지 잡게 된 두 사람은 후원을 함께 걸었다.
“상상 속의 벨슈타인과 너무 달라서 놀랐어요.”
“상상 속이요?”
“네.”
“무지하게도 벨슈타인은 춥고 음습해서 꽃 한 송이 안 자라는 줄 알았거든요. 그렇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한 벨슈타인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곳이에요. 벨슈타인의 공자비만큼이나.”
클로디아가 루시엘을 향해 찡긋 윙크를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