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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103)화 (103/282)

<103화>

팔로스의 눈썹이 사나워졌다.

시칠렌에 들렀다 오는 동안, 도대체 공작성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건지 그로서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어서 제가 아는 사실을 레이놀드 황자에게 전달하려고 했는데. 그는 안타깝고 원망스러운 눈으로 벨슈타인의 단단한 검은 장벽을 쏘아보았다.

“하면 이거라도 전달해 줄 수 있겠나?”

팔로스는 병사에게 은화 한 닢과 함께 작은 로켓 목걸이를 건넸다.

“안전하게 전달해 주면 은화를 추가로 더 줄 수 있네. 대신 황자 전하의 필체가 담긴 쪽지를 가져다주게.”

“은화는 됐고 로켓은 일단 주십시오.”

잠시 고민하던 병사는 그걸 받아 들었다. 멀찍이서 자르가 단장이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터라 은화는 탐낼 수가 없었다.

그 로켓은 자르가 단장에게, 그리고 공작의 손으로 들어왔다.

공작은 그걸 허공으로 튕겨 마도사에게 넘겼다.

“조사해 봐라. 숨겨진 게 있는지.”

자르가 단장이 슬쩍 물었다.

“황자의 보좌관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들여보내.”

“……예?”

“감금실로. 아니다. 내 앞으로 데리고 와.”

“……예, 각하.”

실로 눈앞의 것을 찢어 죽일 듯한 공작의 서늘한 기세에 눌린 자르가가 냉큼 대답하고 사라졌다.

* * *

레이놀드의 미간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구겨졌다.

튤립궁의 외부는 물론이고, 내부 곳곳까지 벨슈타인의 사용인들이 쫙 깔렸다.

주치의와 시종과 시녀, 마구간지기, 정원사까지.

겉으로는 편의를 봐주겠다는 의도였으나, 그 시커먼 속내는 자신을 감시하고 위협하겠다는 의도였다.

‘……상황이 심각하게 안 좋은걸.’

이렇게 눈에 보이는 인력이 투입되었을 정도라면, 보이지 않는 암살조도 있다는 거겠지.

실로 악당 벨슈타인다운 행태였다.

외숙부는 도착하지 않고, 자신은 아무것도 못 한 채 묶여 있는 신세라니.

때마침 누군가 레이놀드의 방문을 두드렸다. 내키지 않는 얼굴로 문을 열자 클로디아 황녀가 순진한 얼굴로 들어왔다.

“레이놀드.”

“……그래, 누이. 왜? 내게 용건이 있어?”

“벨슈타인가는 사용인들조차 정말 수준 높고 친절한 사람들이야. 저 쿠키와 티 세트 좀 봐. 차 우리는 솜씨는 또 어떻고. 쿠키 하나하나에도 내 이름을 새겨놓았어. 하나 먹어 볼래? 정말 부드럽고 맛이 좋아.”

클로디아는 시녀가 들고 있는 쿠키와 티 세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상황 파악은 한참 하지 못하고 저런 멍청한 소리를 하러 왔다니. 레이놀드는 싸늘해진 눈으로 클로디아를 바라보았다가 다시금 억지로 미소를 띄웠다.

“누이, 미안한데 두통이 심해서 쉬어야겠어. 그만 나가 주면 고맙겠는데.”

“어어, 아직도 많이 안 좋구나. 그럼 벨슈타인의 의사를 부를까?”

“아니. 황성 치료사에게 힐을 받은 거로 충분해.”

그리 말한 레이놀드가 클로디아의 귓가에 자그맣게 속삭였다.

“누이도 너무 그들을 믿지 마.”

어둡게 빛나는 레이놀드의 자안을 보며, 클로디아가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벨슈타인과는 여신평화협약을 맺었는걸. 아버지께서도 벨슈타인은 제국에서 몇 안 되는 믿을 수 있는 조력 가문이라고 말씀하셨잖아.”

일반적으로 어른이 동행하지 않으면 아무리 황족이라도 적이 노리기 좋은 대상이라는 것쯤은 클로디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연회의 손님에게 해를 끼칠 리는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황실에서 실력 있는 호위 기사들도 유독 많이 데려왔고, 시녀장 라라 부인도 함께 왔는데 레이놀드는 왜 저렇게 경계로 날이 서 있을까?

아까의 소란은 황자의 개인 호위기사들 모두가 함구했기에 클로디아는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하만 보좌관은 언제 도착하는 거야?”

클로디아의 물음에 레이놀드의 얼굴에 그늘이 짙어졌다.

“모르겠군. 통신구도 가져가지 않아서 연락이 되지 않고.”

“왜 안 가져간 거야? 어디를 갔길래?”

“……미안, 누이. 나 두통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아서 이만 누워 볼게. 연회는 내 몫까지 즐기고 오길 바라.”

레이놀드가 다시금 엷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돌려보냈다.

* * *

슬리퍼를 신고 일어나기만 해도 반응하며 졸졸 따라오는 키제프 덕분에 루시엘은 한숨을 쉬었다.

“너무 열심히 감시하는 거 아니야?”

“……어디 가는데.”

뾰로통한 루시엘의 말에도 키제프가 물었다.

“화장실. 설마 따라올 건 아니지?”

루시엘이 곤란하다는 듯, 강아지처럼 은빛 눈썹을 축 늘어뜨리자 키제프가 시선을 벽으로 돌리며 귓불이 붉어졌다.

“미안.”

“…….”

저럴 때 보면 키제프도 영락없이 애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시엘은 욕실로 들어가 차가운 물을 틀고 세수를 마쳤다. 뽀송한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보니 거울 속에는 눈가가 잔뜩 부은 아이가 비쳤다.

‘드디어 가족들에게 모든 걸 밝혔어. 피로연이 끝나는 대로 검은 장벽이 무너지는 것도 말씀드리자. 벨슈타인이 어떻게 몰락했는지도…….’

루시엘이 다시금 결심하며 욕실 밖 응접실로 나왔을 때 볼이 따가울 만큼 키제프의 시선이 느껴졌다.

할 말이라도 있는 듯한 눈치였다.

자박자박.

루시엘은 소파 앞까지 걸어가서 걸터앉았고 키제프도 옆으로 와서 앉았다.

자연스럽게 옆을 보자 시선이 마주쳤으나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루시엘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할 말 있지?”

“……응.”

“뭔데?”

“생각해 봤는데. 어쩌면 우리 조금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서.”

뜻밖의 말에 루시엘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는 시간을 거슬러 왔고, 나는 미래를 본 적이 있으니까.”

루시엘은 귀를 의심했다.

“미래를 본 적이 있다고?”

키제프가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미래를 봤어. 벨슈타인의 모두가 죽고, 파멸하는 미래를.”

키제프도 그 끔찍한 미래를 알고 있었다니…….

어떻게 알았는지 묻기도 전에 키제프의 옆에 어느새 검은 연기가 차오르더니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지난번 막시무스와 페넬로페를 혼내 주었던 그 소년, 자신을 사신이라고 소개하던 레이븐이 서 있었다.

고양잇과의 동물을 닮은 금안이 둘을 애잔하게 담았다. 그는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린 것처럼,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너희 둘의 운명도 어떻게든 엮일 수밖에 없는 건가…….”

그렇게 중얼거린 레이븐이 루시엘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직접 보여 줄게. 너의 과거이자, 벨슈타인의 미래.”

레이븐이 손을 내밀었다. 한 손은 루시엘에게, 나머지 한 손은 키제프에게.

루시엘은 힘겹게 그 손을 잡았다. 그러자 무언가가 확 끌어당겨지는 어마어마한 힘이 느껴졌다.

슈우욱.

동시에 공기가 찢기는 듯한 파열음과 함께 시공간을 넘어, 세 사람은 어디론가 이동했다.

유리관에서 다 쓰러져 가면서도 마력을 쥐어 짜내며, 여자가 보석을 만들어 냈다.

또로롱.

초점 없는 공허한 눈, 미친 사람 같은 산발 머리, 다 찢어진 원피스, 더러운 맨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여자가 루시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를 구둣발로 툭툭 건드리면서 황태자가 말했다.

“이딴 불량품 말고 다시 만들어 내란 말이야. 제대로 된 보석으로.”

아까 너무 많은 눈물을 쏟고 모두에게 위로받아서인지, 루시엘은 담담하게 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참을 수 없이 분노에 가득 차 있는 건 키제프였다.

“저 쓰레기 같은 자식, 죽여 버리겠어.”

스스슷!

키제프가 구체화 시킨 마법을 황태자를 향해 날렸지만, 마치 유령처럼 허망하게 통과하고 말았다.

레이븐이 키제프의 팔을 붙잡고 말렸다.

“그만둬. 우리가 여기 개입할 수 없는 거 알잖아.”

파칭!

곧이어 장면이 바뀌더니 벨슈타인을 감싼 어둠의 숲과 그 앞에 선 황태자가 보였다.

검이 웅웅거리면서 보석이 빛나더니 어두운 숲속을 밝히고 덤불 숲이 슬금슬금 길을 터 주었다.

황태자가 검을 한 번 휘두르자 거대한 칼날 같은 바람이 벨슈타인의 단단하던 검은 장벽을 와르르, 무너뜨렸다.

으아아악!

꺄아아악!

사람들의 비명이 터졌다.

그야말로 아수라장.

벨슈타인 곳곳이 파국이 되어 가고, 사람이 죽어 갔다.

보석이 박힌 검에 의해 가족들이 하나둘 쓰러져 죽는 모습을 볼 때마다 키제프는 주먹을 꽉 쥐었고, 루시엘은 차마 볼 수가 없어 숨이 턱 막혔다.

“이건 다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저 검에 박힌 보석들, 내가 만든 거니까. 용서받고 싶었어……. 벨슈타인에게.”

“알아. 네 의지가 아니었잖아. 저 검의 주인이 그런 거지.”

키제프는 입술을 깨물었다.

차마 믿을 수 없는 참혹한 광경. 지금의 강대하고 평화로운 벨슈타인에 일어날 거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아서 전에는 꿈처럼 아득한 느낌마저 들었었다.

그러나 시간을 거슬러 왔다는 루시엘의 이 반응. 저 악몽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었다.

이윽고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꽃이 흩날리고 루시엘이 처형대로 올라가는 장면. 루시엘의 숨이 가늘어지던 순간 키제프가 나타나 폭주해 황태자를 죽이기까지.

형장에서 외롭게 죽어 가던 루시엘을 폭주가 그친 키제프만이 안타까운 듯 바라보았다.

크리스털 페어리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미래의 키제프 역시 황궁을 드나들며 크리스털 페어리에 대해서는 익히 들은 바가 있었다.

감정으로 보석을 만드는 요정의 핏줄.

그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죽음의 순간, 그녀는 투명한 보석을 만들어 냈다.

평생을 이용당하다 죽는 순간까지 저리도 찬란한 보석을 만드는 그녀의 생이 슬퍼서일까.

지켜보던 키제프의 눈에서 알 수 없는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리고 어린 키제프는 숨이 다한 루시엘과 그를 보고 있는 미래의 자신을 보며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마치 자신이 직접 경험한 듯 온갖 감정이 들어찼다. 키제프는 알 수 있었다. 투영된 시간 속 또 다른 자신이 루시엘의 죽음에 연민과 분노를 느끼고 있음을.

죽어 가는 루시엘을 향한 자신의 깊고 붉은 눈. 그는 눈앞의 광경에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꺽꺽 목놓아 울었다. 어쩐지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키제프…… 이제 괜찮아.”

이번에는 루시엘이 그의 어깨를 가만히 안아 주었다. 조그만 온기가 주는 힘은 무척이나 커다랬다.

코가 새빨개지도록 울던 그가 물기 어린 눈으로 말했다.

“네가 죽기 전 우리가 진짜 만났더라면, 나는 이렇게 말해 주었을 거야.”

“…….”

“루시엘, 너는 아무런 죄도 없다고……. 그저 평생을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응, 고마워. 그 말, 내가 꼭 듣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이제라도 해 줘서 고마워.”

둘은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뜨거운 눈물, 합쳐진 온기가 그저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다.

아득한 시간을 건너서 돌고 돌아 다시 이렇게 만나게 된 건.

진짜 운명은 운명인가 봐.

이번에야말로 루시엘은 자신이 키제프와 벨슈타인을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키제프도 똑같이 루시엘과 벨슈타인을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새 다시 주변은 별궁의 응접실로 돌아왔다.

레이븐은 가만히 우는 둘을 바라보았다.

루시엘은 소파에 작은 몸을 옹송그렸고, 키제프는 그녀의 등을 도닥였다.

루시엘이 파르르 날개 젖은 새처럼 몸을 떨다가 눈을 반짝 떴다.

이 모든 과거와 원한. 파멸을 몰고 왔던 황태자에 대한 분노가 새삼 차올랐다. 루시엘이 이를 악물었다.

“……이번 생에서는 그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파아앗!

또로롱, 또롱!

루시엘은 강한 분노를 일으키며 루비를 생성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야. 이번에는 절대로 그놈 마음대로 되지 않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지키고, 벨슈타인을 지킬 테니까.”

루시엘을 단단한 품에 넣은 키제프가 입을 열었다.

평소의 단정한 눈매가 비틀리더니 강한 핏빛으로 빛나며 살기를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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