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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102)화 (102/282)

<102화>

공작의 말에 키제프도 루시엘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며 굳게 결심했다.

“루시엘, 나도 너를 지킬게.”

“이 할애비도 있다, 루시엘.”

“루시엘을 건드리는 놈들은 벨슈타인의 응징을 맛보게 될 거다.”

낯선 세 사람의 모습에 루시엘은 움찔하면서도 안심이 되었다.

“고마워요, 모두. 벨슈타인에 와서, 가족이 되어서 저는 정말이지 너무 행복해요…….”

“우리야말로 네가 와 주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단다, 루시엘.”

길리아트가 따뜻하게 말해 주었다. 자신을 향하는 세 사람의 따뜻하고, 애잔한 눈빛에 루시엘은 응원을 받는 것만 같았다.

루시엘이 벅찬 마음으로 눈물을 또 흘리며 또로롱, 보석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감정으로 보석을 만들어 내는 신비로운 아이.

루시엘의 아름다운 능력이 만들어 내는 보석을 멍하니 보던 공작이 말했다.

“오늘 피로연은 취소하겠다.”

“그치만 황실과는 우호적으로 지내셔야 하잖아요.”

“난 상관없지만.”

그 말에 루이비드가 즉답하고, 길리아트를 바라보았다.

“크흠, 그건 루시엘 말이 맞다. 황실과 맺은 평화협정도 있고……. 분노를 돌릴 곳은 황실이 아니라, 황자 개인이겠지.”

“……하지만 황자는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걸요.”

“눈빛이 마음에 안 들어.”

“생긴 것도요, 아버지.”

두 부자의 핏빛 눈동자가 또다시 적의로 파르르 타올랐다.

“그를 처벌할 명분이 없잖아요.”

“명분이야 만들면 되는 것이지.”

공작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미래에 벨슈타인 모두를 죽이고, 검은 장벽을 무너뜨린 장본인도 황자였어요!’

루시엘은 조심스럽게 속마음을 삼켰다.

이것까지 말하면 모두가 이성을 잃고 황자를 황성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황실과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될 것 같은데…….

정말 전쟁이 나게 될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지금 루시엘이 추진하고 있는 유리공예 산업을 살리는 일도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아무리 벨슈타인이라지만 황실과 척을 지는 건, 위험스러운 일이었다.

‘조용해지면 전부 말씀드려야지.’

그러던 중 공작의 보좌관 중 하나가 루시엘의 방을 노크하고 들어왔다.

짧은 잿빛 머리칼에 군기가 바짝 든 청년이었다.

“각하, 여기 계신다기에 보고 드리러 왔습니다.”

“뭔가?”

“황자가 몸이 안 좋다면서 연회에는 죄송하지만 참석하지 않고, 궁 안에 머물겠다고 합니다. 황녀는 참석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래?”

공작이 입매를 틀면서 붉은 눈동자가 굴렀다.

“어디가 아프시기에 참석하지 않는지, 가서 여쭙도록 해. 주치의라도 보내야 하니 말이지.”

그러나 공작의 얼어붙은 눈을 본 사람은 모두 주치의가 아니라, 살수를 보내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루시엘, 이물질이 안 온다고 하니 연회에 나와도 좋고. 아니면 푹 쉬어도 좋겠군.”

공작이 온화한 눈으로 루시엘에게 말했다.

‘대놓고 그렇게 직설적으로 표현하시다니.’

“네, 황자가 오지 않는다면 나가 볼래요. 황녀님은 어떤 분일지 궁금했거든요.”

“그래. 황녀는 너에게 해를 끼친 인물은 아니었나 보군.”

공작의 짐작에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길리아트가 이번에는 의견을 보탰다.

“클로디아 황녀는 몇 번 보았는데, 괜찮은 아이였다. 어머니인 황후를 닮았지.”

그러나 루이비드는 가늘어진 눈초리로 딱 잘라 말했다.

“황후든, 황제든 저는 황실의 누구도 완전히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황녀도 경계는 할 겁니다.”

물론 황자에게도 감시를 붙여 두었으니, 이 공작성 안에서는 팔다리가 묶여 아무것도 못 할 터였다.

“아버지, 이제 우리는 그만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루시엘이 어느 정도 기운도 차렸고, 앞으로 의논할 일들도 있으니까.

“루시엘, 저녁 전까지는 아무 생각 말고 그만 쉬어라. 키제프, 네가 곁에서 돌봐 주도록 해.”

“네, 아버지.”

“이제 저 괜찮아졌어요! 진짜로요!”

루시엘이 맑은 눈을 빛내며 길리아트와 공작을 향해 활기차게 말했다.

“녀석, 괜찮기는. 당분간은 푹 쉬어라.”

공작의 커다란 손이 루시엘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가 짊어지고 온 가혹한 운명의 무게를 하나하나 대신 덜어 주고 싶었다.

“그래, 루시엘. 예쁜 것, 좋은 것만 생각하고 마음 편안히 가져라.”

“알겠어요, 할아버지.”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공작과 길리아트가 이내 별궁을 떠났다.

어른들이 자리를 뜨자마자 이불을 바로 젖히려는 루시엘을 보고는, 키제프가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시엘, 오늘은 못 나가. 외출 금지야.”

“……키, 키제프.”

그저 일어나려던 것뿐인데, 라고 말할 수도 없게 키제프의 얼굴이 심각해서 루시엘은 차마 다른 말을 하지도 못했다.

“오늘은 쉬라고 말씀하셨잖아. 남편 생각도 그렇단 거 알아 둬.”

일부러 ‘남편’이라는 말에 힘을 주며 키제프가 말했다.

“……응, 알아. 근데 나 꿈을 너무 많이 꾸어서 그만 자고 싶은걸.”

“그럼 별궁 안에서만 있어.”

“알았어.”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할 일이 정말 태산인데.’

안 그래도 피로연이 겹친 데다가 오늘은 기절까지 해 버리는 바람에 아무것도 못 했다.

영지민들의 의견도 모아서 전달해야 하고, 시클라인도 만나야 한다. 온실에 가서 피닉스의 장미에게 마나도 주러 가 보아야 하고, 또…….

루시엘이 자그만 머리를 굴리는 걸 알아챈 키제프가 눈에 힘을 주었다.

“루시엘, 안 돼.”

“으응. ……안 나갈 거야.”

‘이 보석들부터 치우고, 책상에서 할 일이나 정리해야지.’

루시엘은 키제프의 눈치를 살살 보면서 바닥에 떨어진 보석들을 주우러 다녔다.

검은색의 옵시디언은 각성 후 처음 만드는 보석이었다.

검게 빛나는 보석, 옵시디언은 고통과 아픔을 강하게 느끼면 만드는 보석이었다.

루시엘이 가장 많이 만들어 냈던 보석이기도 했다.

검고 불길하다, 볼품이 없다면서 만들어 내면 다들 별로 반기지 않았던 옵시디언이었다.

루시엘은 그 조그만 검은 보석이 과거의 자신인 것만 같아서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이제 괜찮아. 이제 아프지 않아.’

그때였다. 루시엘의 뒤로 다가온 키제프가 그녀를 그대로 들어 올려서 침대 위로 폭 올려놓았다.

그러곤 단숨에 플라이 마법으로 보석을 모아서 정리한 후에 책상 위 상자 안에 넣어 주었다.

그가 물었다.

“검은색 보석도 있네?”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옵시디언,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만든 보석이야.”

루시엘의 대답에 키제프가 그걸 가져가서 살피더니 말했다.

“이거 내가 가져도 되나.”

“응? 아, 보석 별로 안 좋아한다면서. 그거 말고 더 예쁜 거로 줄게!”

키제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이게 마음에 들어.”

“그래, 가져.”

키제프는 주머니 속으로 옵시디언을 얼른 넣으면서 생각했다.

‘네 고통을 가져가고 싶어서.’

루시엘이 이걸 볼 때마다 괴로웠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싫으니까.

* * *

한편 아이들의 별궁을 나온 길리아트와 루이비드는 서로를 보며, 동시에 입을 열었다.

“비상대책 가족회의를.”

“소집하도록 하죠.”

이에 한창 피로연 준비로 바쁘던 솔리아페와 이벨린, 엘링턴까지 포함한 벨슈타인의 가족회의가 열렸다.

그 시작은 루시엘이 어떤 존재인지, 알려 주는 것으로 시작이 되었다.

루시엘의 정체가 요정이라는 걸 알게 된 이벨린은 탄성을 질렀다.

“어쩐지 그 아이, 맑고 투명한 마나와 순수한 마음씨를 가져서 예사롭지 않은 존재라는 건 눈치를 채고 있었지요. 그런데 요정이라니, 우리 벨슈타인에 찾아온 귀한 선물이 틀림없어요!”

솔리아페 역시 무척 놀라운 듯, 연신 눈을 끔벅거렸다.

“사실은 저도…… 그 아이가 특별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요정이었다니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러나 루시엘이 회귀를 했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까지 전해 듣자 솔리아페와 이벨린은 비통함과 분노를 억눌러야만 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걸 이제부터 논의해야겠군.”

안건은 루시엘의 보호를 위해 해야 할 가문 안팎의 노력과 복수를 위한 방법 같은 것들이었다.

“우리 새아가는 제 손으로 지키겠어요.”

“나 역시 마찬가지다. 루시엘은 내겐 은인이나 다름없으니.”

다들 전투적으로 나섰고, 곧이어 피로연도 기다리고 있었기에 1차 회의는 한 시간 만에 종결되었다.

가장 먼저 조치가 내려진 건 황자의 최측근인 팔로스 보좌관의 마차 출입을 성문에서부터 가로막는 일이었다.

보좌관은 황자와 필시 함께 움직이는 업무를 하고 있는데 따로 다닌 것이 무척 수상쩍었다.

자르가의 보고도 마음에 걸렸다.

만약 보좌관이 시칠렌에서 힐다 볼라디라는 여자를 만나고 왔다면?

그녀에게 중요한 정보를 전달받았다면?

힐다 볼라디가 쥐고 있는 가장 중요한 정보라면 하나뿐이었다.

루시엘이 보석안을 가진 크리스털 페어리의 핏줄이라는 것.

황자와 함께 움직였으면 모를까, 외지에서 따로 행동하는 보좌관의 편의까지 보아 줄 여유는 없었다.

* * *

“죄송하지만 수도 아르테에서 오시는 길입니까?”

“무, 물론이오!”

“그렇다면 수도에서 발급받은 게이트 이용 문서를 보여주십시오.”

“수도 게이트 이용 문서라니…….”

그런 게 있을 리가. 시칠렌에서 오는 길이었기에 리카르도의 게이트를 이용했고, 그것은 이미 찢어버린 후였다. 팔로스가 난감한 표정으로 옷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잃어버린 것 같소만.”

“그렇다면 공작성 안으로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 그게 무슨 말인가? 나는 황자님을 모시는 보좌관일세. 무언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네.”

“분명히 그렇게 전달받았습니다. 게이트 이용 문서를 제출하지 않는 자는 허가가 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납득 불가한 이유였다.

세상 어떤 연회가 게이트 이용 문서까지 요구한단 말인가. 지나치게 폐쇄적인 벨슈타인이라지만 과도한 처사였다.

“그럼 나는 어쩌란 말인가?”

“돌아가시거나, 다른 영지의 숙소에서 기다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난 자네랑 입씨름할 시간이 없네.”

“저도 그렇습니다.”

“나 원 참……. 그럼 황자 전하와 만나게 해 주게.”

“보안 문제로 그것도 안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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