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루시엘이 울기만 하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십여 분 동안 말없이 우울한 얼굴로 앉아 있던 도련님이 난생처음으로 베시를 찾더니 겨우 입을 열어 한 말이 그것이었다.
그렇게 털어놓는 키제프 도련님이야말로 금세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잠시만요, 도련님.”
베시는 조용히 그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주방장에서 받아 온 유리병을 꺼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달콤한 게 효과가 있을 거예요. 아가 마님은 이걸 무척 좋아하신답니다. 사용인들에게도 모두 나누어 주셔서 아주 유명해진 명물 딸기 사탕이에요.”
“……그렇군. 고마워.”
베시가 건네주는 사탕을 받은 키제프가 감사를 표하자, 그녀가 부드럽게 고개를 숙였다.
키제프는 루시엘의 침실을 향해 걸어갔다.
공작성의 모든 사용인은 알고 있는 사실이라니, 자신은 아직도 루시엘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다고 생각하면서.
그렇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루시엘이 엉엉 서럽게 우는 만큼, 자신 역시 심장이 아프다는 것.
자신이 슬픈 것만큼이나, 아니 그 배 이상으로 힘들었다.
키제프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달칵, 문을 열고 루시엘의 침실에 키제프가 조심스레 들어갔다.
늘 보송하던 그 애의 방 안 공기마저 안개라도 낀 듯 눅눅하게 느껴졌다.
할아버지 품에서 여전히 훌쩍이는 루시엘에게 다가온 키제프가 입안에 무언가를 쏙 넣어 주었다.
“……으?”
뭔지도 모르고 받아먹었는데 입안을 맴도는 달콤함에 루시엘은 잠시 울음을 뚝 그쳤다.
익숙한 딸기 맛 사탕.
루시엘은 더는 울 수 없었다.
혀에 감도는 달콤함도, 루시엘의 머리카락을 흩뜨리는 따뜻한 손도 더없이 상냥해서.
“널 위로해 줄 걸 찾아왔어.”
키제프는 아쉬운 듯 손을 거두어 간 다음, 침대 앞 스툴을 끌어다가 아무렇게 걸터앉았다.
그 일련의 행동들을 루시엘은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정말 거짓말처럼 슬픔이 가시는 것만 같아서 루시엘은 부지런히 입안의 사탕을 굴렸다.
“……달다.”
“이제야 겨우 그쳤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루시엘은 바닥에 떨어진 여러 색의 보석들을 보고도 크게 놀라지 않는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왜 안 놀라세요?”
그의 주름진 눈이 부드럽게 휘며 말했다.
“네가 보석을 만들어 낸 것 말이냐?”
루시엘이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요정의 핏줄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
“앗…… 그걸 어떻게요?”
길리아트가 루시엘의 빨개진 코를 톡 건드리고 나서 말했다.
“흠흠, 이래 봬도 내가 사람 보는 눈은 밝거든.”
짐짓 장난스럽게 말한 후,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네 순수한 마력과 그 빛나는 보석안, 그동안 너를 둘러싼 신비로운 일들을 보면서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
“…….”
“덤불 숲을 물러나게 하고 달빛 이슬 나무를 빛나게 한 것도. 성배를 들고 불사조를 만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단다. 고대어로 적힌 신화에 크리스털 페어리에 대한 내용도 있거든.”
“그렇구나…….”
“물론 신화 속으로만 존재하는 아이가 내 앞에서 살아 숨 쉴지는 몰랐지만. 그리고 결정적으로.”
“네.”
“루이비드에게 들었다.”
길리아트가 능청스레 씨익 웃었다.
“……이잉, 뭐예요, 할아버지!”
루시엘이 웃으면서 다시 할아버지의 품에 매달렸다.
때마침 달칵하고 또다시 문이 열렸다. 연무장에서 기운을 빼고 편안한 옷차림으로 돌아온 공작이었다.
그의 얼굴은 자못 심각했다.
“루시엘, 정신을 차려 다행이다.”
공작은 치유 마법사를 불러와 루시엘의 마나 상태를 진찰받게 했다.
힐끗 세 남자, 그중에서도 특히 공작의 눈치를 보던 치유 마법사가 말했다.
“아가 마님의 마력이 불안정한 기색은 있습니다만, 그 외에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가 마님. 괜찮아 주셔서 다행입니다.”
마법사가 루시엘의 자그만 손을 붙잡고, 울기 직전으로 그리 말했다. 루시엘의 상태가 안 좋으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니 그녀의 건강은 자신이 감사할 일이었다.
“그 손 놓고 나가도록.”
공작은 무척 거슬린다는 듯, 그의 손을 턱 붙잡았다. 뒤에서 길리아트와 키제프까지 세 남자의 눈총이 느껴졌다.
“예예, 당장 꺼지겠…… 아니, 물러가 보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마친 치유 마법사가 줄행랑을 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공작이 루시엘에게 손을 뻗어, 스르륵 흘러내리는 은발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잔뜩 부은 진홍빛 눈동자를 보며 공작도 속이 상한다는 듯 다정스레 물었다.
“울었느냐?”
“……네.”
“아까 그놈 때문이냐. 널 울게 한 놈이.”
키제프도 고개를 끄덕이며, 짙은 핏빛 눈으로 루시엘이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무슨 일인지 말만 해…….”
“……그래, 루시엘. 우리에게 못 할 말인 것이냐? 아니면 조금 더 쉬고 나서 나중에 말해 주어도 괜찮지만.”
그러나 루이비드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어느 정도 안정은 한 것 같으니 네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다, 루시엘. 네가 왜 그렇게 슬피 울었는지……. 우리에게도 나누어 줘야지.”
“시아빠…….”
“황태자를 보고 왜 그렇게 놀라서 기절한 것이냐? 그놈이 뭘 어쨌길래, 우리 소중한 새아가가 정신을 놓을 정도로…… 응?”
세 사람의 배려 섞인 시선이 모이자, 루시엘은 고민스러웠다.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밝혀도 좋을지…… 말해도 그 사실을 믿어 줄까?
그러나 추후 황자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밝히고, 함께 대응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믿어 주기 위해서, 슬프고 괴로운 일이 무엇인지 귀 기울여 주기 위해서 이렇게 노력하는 가족들과 과거 어떤 일이 있었는지 공유하고, 위로받고 싶었다.
‘진짜 가족으로 의지하고 싶어.’
루시엘은 이제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비밀을 밝힐 때가.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삶이지만, 루시엘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저는…… 시간을 거슬러 왔어요. 미래를 보는 꿈을 꾸었던 게 아니라, 진짜 미래에서 과거로 온 거예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에 세 사람의 시간이 잠시 정지하기라도 한 듯, 방 안은 정적으로 가득했다.
길리아트와 키제프가 서로를 마주 보면서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고, 루이비드 역시 그녀의 말이 쉬이 와닿지 않았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루시엘? 시간을 거슬러 왔다고?”
상식적으로 이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루이비드는 잠시 루시엘이 꿈이라고 꾼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만큼 상식 밖의 일이었다.
길리아트도 아이의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루시엘, 혹시 방금 꿈을 꾼 게 아니냐.”
루시엘이 고개를 저었다.
“꿈이…… 아니에요.”
루시엘이 진지하게 말하자, 키제프가 말했다.
“나는 믿어, 루시엘.”
키제프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역시 레이븐이 보여 준 미래를 본 적이 있었으니까. 루시엘이 과거에서 오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루시엘을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을 그렇게 애처로운 눈으로 보았던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였나?
키제프의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가 스쳤다.
공작 역시 쉬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다름 아닌 루시엘의 말이었기에 계속 들어 보기로 했다.
“계속 말해 봐라, 루시엘.”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이냐? 그렇다면 루시엘, 너는…….”
길리아트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루시엘의 눈이 흔들리며 말을 이어갔다.
“모습은 아이지만, 저는 이전 생을 기억하고 있어요…….”
예전부터 루시엘이 평범한 아이답지 않게 많은 걸 알고 있는 특별한 아이라고 생각은 했다.
“제가 꿈에서 보았다고 한 정보들이, 사실은 과거의 생에서 보고 들었던 것들이었어요.”
루시엘이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제야 루시엘이 주었던 많은 정보들의 출처가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걸 알고 있었던 것인가.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군.”
“그래, 이게 사실이라면 기적이 아니냐.”
공작과 길리아트 역시 루시엘의 신비로운 경험이 놀라웠다.
“맞아요,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에요. 저도 그랬어요. 죽었던 제가 이렇게 어린 시절로 살아 돌아왔으니까요.”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였다.
공작은 루시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래, 일단 네 말이 맞다고 하면, 과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지? 황자와도 관련이 있는 것인가?”
“크리스털 페어리, 보석 노예로 살았던 힘든 삶들도 모두 기억해요……. 거기서 오르비아 백작도, 카빌 후작도, 황태자도 모두 보석을 강제로 만들게 했어요. 그래서 그들을 보면 아직도 두렵고 무서워요…….”
떠올리는 것조차 가슴이 아린 일을 제 입으로 말하려고 하니, 루시엘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벨슈타인가에서 사랑받고 행복해져서 이제는 그런 과거를 떠올린다고 해도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아직도 심장의 반쪽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을 만큼 아파.’
루시엘이 힘들게 말을 이어 가려 하자, 루이비드가 아이의 작은 손을 잡아 주었다.
“너를 믿는다. 루시엘.”
“때로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 종종 일어나는 법이지.”
과거를 떠올리면서 힘든 얼굴을 하고 있는 루시엘을 보자, 공작과 길리아트는 아이가 안쓰러웠다.
이종족 노예들이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크리스털 페어리라면, 그중에서도 가장 희귀한 요정의 핏줄이자 귀하디귀한 능력을 가졌으니…….
놈들이 이 여린 아이를 얼마나 짓밟았을지, 예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말이 있지.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고. 이전 생에서도 너를 괴롭게 한 자들이니, 이번 생도 마찬가지로 그럴 가능성이 큰 놈들이다. 이미 오르비아 백작과 카빌 후작이 너를 탐내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했고.”
새파란 분노의 불이 그의 온몸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건 길리아트도, 키제프도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의 분노로 인해 방안은 살벌한 살기가 넘쳐 흘렀다.
“다, 다들 괜찮아요?”
무서운 기운을 내뿜고 있는 세 사람을 걱정스레 올려다보는 루시엘의 어깨를 살짝 안아 주며, 루이비드가 말했다.
“괴로웠던 이야기는 그만해도 좋다. 루시엘, 너의 뜻은 알았으니까.”
“네…….”
루시엘이 조그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생에서는 그 세 마리 버러지 중 어느 한 놈도 네게 손댈 수 없을 거라는 것만은 기억해. 너를 반드시 지켜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