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회랑 기둥에 기대어 선 키제프는 엘링턴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정보 조직 호크아이의 일원 중에는 황궁으로 위장 잠입한 자가 있었기에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레이놀드 황자에 대해서 알려 달라니…… 글쎄요. 아직까지는 마땅히 두드러지는 부분이 없다고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모난 구석이 없다랄까요.’
‘그렇다는 건 그만큼 속내를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겠지.’
어떤 자인지 가늠은 안 되지만, 사실상 루시엘이 적은 명단 중에 가장 거슬리는 인물이기도 했다.
황위를 이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물이었으니까.
‘아, 보좌관인 외숙부에게 의지를 많이 하고 대개 혼자서 조용히 사냥에 몰두하는 일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때였다.
검은 실이 팽팽히 당겨지는 것이 느껴지며, 레이븐이 다급히 나타났다. 혹시 몰라서 그에게 루시엘의 뒤를 따라가 달라고 부탁해 둔 참이었다.
「키제프, 큰일 났다. 루시엘이 황자와 마주쳐 기절했어. 얼른 찾아가!」
“황자라고?”
이야기를 들은 키제프의 미간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 * *
레이놀드의 호기심 어린 자안이 구르며 제 앞에서 풀썩 쓰러진 자그만 아이에게로 향했다.
막상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고, 이 소동물 같은 아이를 마주쳤다.
저를 보고 마치 유령이라도 본 듯 두려움에 벌벌 떨며 기절할 정도라니……. 묘한 만족감이 고개를 들었다.
‘옷차림을 보니 연회에 왔다가 부모를 잃은 아이인가?’
연약하고 자그만 것이 발발 떠는 꼴이 우습기도 하고, 보는 재미가 있었는데. 레이놀드가 입매를 틀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왜 아직도 도착을 안 하지.”
연회가 열리기 전까지 온다던 그의 외숙부 팔로스는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
‘설마 안 오는 건 아니겠지.’
불안해하던 레이놀드가 쭈그려 앉아 아이의 은빛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려 보았다.
“은발은 처음 보는데.”
벨슈타인에만 산다는 눈토끼의 빛깔처럼 결 좋은 은발이었다.
숲에서 사냥하던 어린 동물이 화살에 맞아 바르작거리던 것이 생각나서 픽 웃음이 터졌다.
제법 귀엽게 생긴 것이 건드려 울리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볼을 꼬집어 보던 찰나.
그의 웃음기가 싹 사라지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파아앗!
“뭐…… 뭐지?”
레이놀드의 주변으로 순간 초록빛 이동진이 생기더니, 검은 코트를 입은 거대한 체구의 긴 금발을 하나로 묶은 노인이 나타났다.
놀랍도록 매서운 붉은 눈초리로 제 옆으로 순간이동 한 길리아트였다. 노기가 가득 실린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장 그 애에게서 떨어져라!”
그뿐 아니었다.
파아아!
뒤쪽에서 다른 이동 포탈진이 생기더니 압도적인 적의와 위압감, 동시에 서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콰아!
거대하고 날카로운 얼음송곳이 바로 앞에 날아와 박혔다.
이내 그것은 레이놀드의 주변을 감옥처럼 에워쌌다.
그 틈에 부유 마법에 의해 허공으로 띄워진 아이는 어느새 길리아트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다행히 루시엘은 기절만 했을 뿐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눈앞의 황태자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왜 기절한 거지?”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혼자서 놀라 기절하더군요.”
별안간 수초 만에 벌어진 일에 레이놀드가 어이가 없어 이를 딱 부딪쳤다.
제아무리 무소불위의 벨슈타인이라지만, 황가의 핏줄에게 이리 막 대할 수 있던가?
수치심과 굴욕감이 차올랐다.
“……하하, 하하하.”
광기 어린 레이놀드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벨슈타인에서는 황가의 손님을 이렇게 대접하시는 겁니까? 여봐라! 무엇 하느냐?”
“예! 전하!”
레이놀드 황자의 외침에 그제야 저만치 떨어져 있던 황실 호위 기사들이 뒤늦게 달려왔다. 그들은 곧 황자를 보호하듯 감싸고 공작가에 검을 겨누었다.
그러나 열여섯 살짜리 풋내기 황자도, 황성의 호위 기사도 두 사람에게는 전혀 긴장할 거리가 되지 않았다.
길리아트가 먼저 스륵, 다가오더니 초록빛 지팡이로 검을 툭, 툭 치우며 말했다.
“레이놀드 황자로군? 무언가 오해가 있었던 거 같구나. 진정하여라.”
길리아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가느다란 눈매에 새카만 머리 색만큼 속을 알 수 없는 소년. 아주 꼬마일 적에 본 적이 있었다.
“오해라니요, 진정이라니요. 아까 그 공격 마법으로 저를 위협한 건 공작가입니다. 이는 명백히 황실을 적대시하는 행위가 아닙니까?”
“아닌데.”
사나운 눈초리로 황자가 묻자, 이번에는 공작이 여유롭게 한 걸음 다가갔다.
“황자를 놀라게 해 미안하게 됐지만 고의는 아니었다.”
루이비드가 손을 들자, 레이놀드를 위협하던 얼음송곳이 사르르 녹아 물이 되었다.
“방금 그건 우리 새아가를 해치려 들면 발동되는 마법이라서……. 나도 어찌 손 쓸 수가 없었다.”
천연덕스럽게 턱가를 문지르던 공작이 입매를 비틀며 그리 대답했다.
레이놀드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아이를 손대는 즉시 마법이 발동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느리게 발동한다고?
‘속이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다.’
벨슈타인의 강대한 위력을 믿고 내뱉는 거짓말.
“…….”
“황자를 공격하려던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지. 설명이 되었을까?”
레이놀드는 헛웃음을 흘렸지만, 설마 벨슈타인 공작이 제게 거짓을 한다고 할 수도 없었다.
“자동으로 발동된 마법이란 뜻입니까?”
“그렇다. 하도 우리 애가 연약하여서 보호 차원으로, 추적 마법과 트랩을 걸어 뒀는데 그게 발동한 것 같군.”
“…….”
“미안하게 됐다.”
말은 그리했지만 전부 네가 건드려서 마법이 발동된 것이다, 그 뜻이었다.
“……그리 말씀하시니 알겠습니다만.”
미심쩍지만 공작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없었으니. 레이놀드는 아무것도 따지지 못한 채 분노를 억눌렀다. 그야말로 공작에게 완전히 당한 꼴이었다.
“그래, 그러니 오해는 풀고 병력을 거두어 주면 좋겠군.”
레이놀드는 혼란스러웠다. 공작의 입으로 직접 공격이 아니었고 우연한 사고라고 하는데도 병력을 거두지 않을 수 없는 노릇.
무엇보다 이 이상 벨슈타인과 대치 상태를 유지한다면 그건 평화 협약에 위배되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될지도 몰랐다.
제 아버지, 노이슈반 데 헨드릭 황제는 벨슈타인에게 유독 관대했다. 그로서는 이해 불가한 일이지만…….
“알았습니다. 다들 물러나라.”
레이놀드의 명에 황실 기사들이 겨누던 검을 내리고, 뒤로 빠졌다.
“이제 황자가 대답할 차롄 거 같은데. 한 가지만 묻지. 아이가 그냥 기절했다고 해도 마법이 물리적 접촉 없이 발동할 순 없는데. 아이에게 혹시 손을 댔나?”
그 순간 레이놀드가 움찔하며 표정이 굳어졌다. 길리아트의 품에 안겨 있는 조그만 아이를 흘긋 다시 보았다.
“……아까 저 아이 말입니까? 제가 손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음…… 그런 적 없다는 건가?”
“……예.”
레이놀드가 침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그렇다고 하니 믿겠다. 그럼 안 좋은 일은 묻고 연회를 즐기길 바라겠다.”
공작이 선선히 웃어 보였으나, 레이놀드는 차마 웃을 수 없었다.
‘뭐라고? 연회를 즐겨?’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기 힘들었다. 도대체 황실을, 자신을 얼마나 우습게 보면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 겐지.
레이놀드는 싸늘하게 식어 가는 심장을 내리눌렀다.
그러자 또 다른 이동진이 파아앗, 생기면서 금발의 소년이 나타나 달려왔다.
“아버지, 할아버지? 루시엘은 어떻게 됐…….”
뒤늦게 도착한 키제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루시엘은 길리아트 할아버지의 품에 꼭 안겨 있었다.
“루시엘은 무사하다. 별일 아니었으니 이만 돌아가자.”
“기절했는데 별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키제프의 물음에 공작이 대신 대답했다.
“황자를 보고 놀라서 기절했다는군.”
“예?”
키제프는 그 즉시, 황자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졸지에 벨슈타인 3대의 차가운 시선을 받던 레이놀드도 더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 없었던지 휙 뒤돌았다.
키제프는 황자에 대한 적대감으로 눈을 빛냈다.
‘도대체 루시엘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그 눈빛은 실로 죽일 듯한 살기로 이글거렸다.
루이비드가 어린 아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옆으로 속삭였다.
“키제프, 그래도 황족이다. 노골적으로 드러내진 마라. 참아.”
이를 악물며 키제프가 대답했다.
“……다시 한번 이런 일이 생긴다면, 절대로 참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건 나 역시 그렇다.”
이에 루시엘을 안고 있던 길리아트도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직 분이 덜 풀린 루이비드는 곧장 연무장으로 갔다. 대련으로 속풀이를 하겠다고 해서, 기사단이 한동안 시끄러울 듯했다.
곧이어 별궁 침실로 옮겨진 루시엘을 키제프와 길리아트가 내내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보았다.
일부러 다른 가족들에게는 알리지 않았고, 조용히 베시를 시켜 주치의를 부르게 했다.
침실로 찾아와 아이의 맥을 짚은 주치의가 입을 열었다.
“조금 놀라서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다른 곳은 전혀 문제가 없으니 곧 정신을 차리실 겁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구나.”
주치의의 말에 두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곁을 지키겠습니다.”
“아니다, 함께 있자꾸나. 키제프. 나 역시 루시엘이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다.”
* * *
루시엘이 깨어난 건 그로부터 두 시간이 흐른 후였다. 지끈지끈 머리가 아팠다.
지독한 악몽을 꾸었다.
황성의 유리관에 다시 갇히는 꿈이었다.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묻어 놓았던 괴로운 기억의 찌꺼기들을 누군가 막대로 휘휘 저은 것만 같았다.
끔찍하고 소름 끼치는 기분에 입맛이 썼다.
‘어, 어떻게 된 거지. 나 분명……황자와 마주쳤는데. 설마 그 앞에서 보석을 만든 건 아니겠지?’
그것이 루시엘이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아늑한 침대 캐노피가 보였다.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리던 루시엘은 익숙한 눈과 마주치자, 자그만 몸을 벌떡 일으켰다.
“……!”
“루시엘, 이제야 깼구나.”
“할아버지이.”
안도감에 그랬을까.
루시엘의 눈에서는 투명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황자를 만나 크게 놀랐다. 그토록 두려워하던 상황이 지나갔다는 것도, 과거 황자에게 시달려 힘들었던 지난 생도 다시금 떠올라 루시엘의 슬프고 괴로운 마음을 툭툭 건드렸다.
루시엘은 엉엉 울었다. 심장으로 모여드는 거대한 마나의 파도도 상관하지 않은 채로.
루시엘이 갑자기 울자 길리아트는 말없이 품을 내어주고, 도닥여 주었다.
“녀석, 많이 놀란 모양이구나. 괜찮다, 괜찮아. 너를 해칠 무서운 건 아무것도 없단다.”
가만히 등을 도닥여 주는 따뜻한 손길에 루시엘은 마음껏 아기처럼 울었다. 눈도 코도 새빨개지도록.
또로롱!
또롱!
검은색의 옵시디언과 푸른색의 사파이어, 그리고 할아버지의 품에 안도가 되어서 토파즈까지 보석을 잔뜩 만들어 낸 루시엘의 글썽이는 눈가를 길리아트가 손수건으로 닦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