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99)화 (99/282)

<99화>

쏜살같이 에바에게 다녀온 로즈가 금세 소식을 가져다주었다.

“아가 마님, 황자 전하와 황녀 전하가 방문하신 것이라고 하네요.”

“……황녀 전하라고?”

루시엘의 눈이 댕그래졌다.

“네, 클로디아 황녀 전하라고 계시답니다.”

‘맞아, 클로디아 황녀가 아직 황성에 있을 시기구나!’

루시엘은 잊고 있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과거 루시엘이 황성에 들어갔을 때 클로디아 황녀는 이미 서대륙의 메이너드 왕국으로 시집을 간 후라 한 번도 마주친 적은 없었다.

황성에 들어가서 계보도와 초상화로 얼굴을 익히긴 했지만…….

실제로 만나 본 적이 없으니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도 세간에서 그녀의 평가는 높았다.

제국의 옛 신문을 보면, 클로디아 황녀가 꾸준히 빈민가 아이들을 위해 후원을 해 왔고, 정무 회의에 참석해 의견을 낼 정도로 영리한 사람이라는 칭찬 기사가 쏟아질 정도였다.

‘황녀님이 계셨을 적에는 황성 분위기가 따뜻했는데……. 지금은 살얼음판 아니니?’

‘정말 올곧고 훌륭한 분이었는데. 황녀님께서 황자로 태어나셨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야.’

‘어머, 얘는 큰일 날 소리 하고 있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들어 봤자 저 유리관의 백치밖에 더 있겠니? 무슨 말 하는지도 모를걸?’

가끔 황태자 궁의 시녀들마저 그렇게 수군거리고는 했다. 시녀들은 황태자를 곁에서 모시긴 했으나, 그를 무척이나 두려워했다.

그의 말 한마디에 목숨이 왔다 갔다 했으니 당연했다.

황제의 병이 깊어지면서 황태자가 처리하는 국정이 늘었고, 그 권한과 세가 커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루시엘은 클로디아 황녀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 세간의 평가대로 바른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만약 그렇다면 그녀와 친해져서 레이놀드를 견제하는 것이 좋을 텐데.’

안타까운 사실은 타이라 제국은 남성에게 황위를 우선 승계해 왔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레이놀드가 황위를 이을 자격을 완벽하게 상실하게 된다면?

그 기회를 갖는 건 황후의 적통 황녀인 그녀가 유일무이했다.

어쨌든 거기까지는 너무나 먼 이야기고, 황후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라도 황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 * *

“본격적인 연회의 시작 전까지 황자님과 황녀님은 튤립 궁에서 쉬실 거예요, 아가 마님.”

루시엘이 에바에게 소식을 전해 듣고 있는데, 포로롱 하고 하얀 솔방울 부엉이 벨이 응접실 안으로 날아와 어깨 위로 앉았다.

“벨!”

루시엘이 뺨을 벨의 보드라운 털에 비비자, 뒤로 척 나타난 키제프가 루시엘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이 녀석 요즘 영 답답해하는 것 같아서 연무장에 데리고 나갔다 왔어.”

“아, 그랬구나.”

묻지도 않았는데 제 이야길 쏟아 낸 키제프의 시선이 루시엘에게 향했다.

빨간색 드레스를 입은 루시엘을 보며, 이런 색도 잘 어울린다고 그는 생각했다.

“근데 황성 손님은 왜?”

루시엘은 깜짝 놀랐다.

‘귀도 밝다. 에바와 나누는 대화를 그 거리에서 다 들었단 말이야?’

그러고 보니 시아빠도 청각이나, 다른 감각도 기민한 편이셨던 것 같은데 벨슈타인은 전부 그런 걸까?

“아, 그게, 그러니까 그냥 황녀님은 어떤 분인가 궁금해서.”

루시엘이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두 분 말씀 나누세요. 저는 연회장 준비를 위해 가 보겠습니다.”

“응, 고생해요, 에바.”

에바는 어린 공작 부부를 향해 고개를 굽히더니, 이만 물러갔다.

반지르르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을 내려다보던 키제프가 툭 말했다.

“만난 적 있어. 클로디아 황녀.”

“앗, 정말? 어떤 분인데?”

“글쎄. 기억 안 나는데.”

그건 거짓말이었다.

그의 나이 예닐곱쯤 할아버지를 따라서 황궁에 갔던 적이 있었다.

클로디아 황녀가 키제프를 졸졸 따라다니는 바람에 어른들이 결혼시켜야겠다고 우스갯소리까지 나왔던 기억이 난다.

키제프는 그녀가 귀찮았지만, 황녀 신분인 데다가 키도 크고 나이도 많은 그녀를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그 이후로는 공식적으로도 만난 적이 없으니, 친분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보다 키제프는 신경 쓰이는 점이 있었다. 루시엘이 적었던 종이에는 레이놀드 데 헨드릭, 황자의 이름까지 적혀 있던 터였다.

레이놀드 황자는 마주친 적이 없어 정보가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모를 루시엘의 안전을 위해 자신이 미리 알아보는 수밖에…….

키제프는 문득 떠올랐다는 듯 루시엘에게 알려 주었다.

“루시엘. 백조 정원에 어제 만났던 네 또래 영애들이 모여 있던데, 한번 가 보는 건 어때?”

“내 또래 영애들?”

“그래. 어제 그 애들이 널 도와줬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어제 인사를 나누었던 착한 영애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나와 마샤.

두 사람이 페넬로페의 패악질을 막아 주고, 말도 잘해 주어 도움을 받았다.

“아, 맞아. 만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

“연회는 오늘 저녁에 끝이지만 일부 귀족들은 낮에 돌아간다고 들었어.”

“정말? 고마워! 키제프.”

루시엘은 다소 다급해진 걸음으로 총총 달려갔다. 그 바람에 벨이 루시엘의 어깨에서 몇 번 날갯짓했다.

자그만 뒷모습을 눈에 담던 키제프는 본성에 있는 보좌관실로 향했다.

* * *

키제프가 말한 대로 백조 정원에 가 보자 연회에서 만났던 다나와 마샤가 함께 앉아 꽃을 구경하고 있었다.

루시엘은 반가움에 볼을 붉힌 채 외쳤다.

“다나, 마샤!”

“공자비님!”

소녀들은 다시 만나자마자 서로를 폭 안았다.

“어제는 정말로 고마웠어요.”

“아니에요.”

동글동글 귀여운 인상의 갈색 단발머리 소녀 마샤는 수줍어했고, 홍당무처럼 주홍색 머리를 가진 다나는 주먹을 발끈 쥐었다.

“카빌 영애가 너무 무례했어요. 하마터면 공자비님의 예쁜 은발이 다 뜯길 뻔했잖아요.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다나가 웃으며 말하자 루시엘은 고마움에 볼에 홍조가 올랐다.

순수하게 악의 없는 또래의 친구를 만나 본 건 처음이었다.

“정말로 고마워요. 다나, 마샤. 혹시 지금 시간이 괜찮다면 같이 티타임 나눌래요?”

루시엘의 제안에 두 아이의 얼굴이 흐려졌다. 다나가 말했다.

“저희는 그만 돌아가야 해요. 수도로 가야 하거든요.”

“그렇구나. 혹시 두 사람의 가문은 어디인가요? 다음에도 또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마랑드 후작가예요. 저도 공자비님과 다시 만나고 싶어요.”

다나가 루시엘의 손을 잡으며 말했고, 마샤도 이어 대답했다.

“저는 튜렌 백작가라고 해요.”

“가문으로 편지해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다음에 황도로 놀러오면 같이 쇼핑도 하고 놀아요. 가서 친구들에게 자랑할 거예요. 벨슈타인 성은 근사했고, 공자비님은 너무 예쁘다고요.”

다나의 말에 루시엘도 기분이 좋았다.

“응. 다음에 수도에 가면 꼭 놀아 주기예요.”

“물론이죠!”

“다음엔 루시엘이라고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친구니까.”

“그건 지금도 불러 줄 수 있어요, 루시엘.”

“……루시엘!”

다나와 마샤가 이름을 불러 주자 루시엘은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그럼 나중에 만나요.”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루시엘은 둘에게 손을 흔들었다. 둘이 떠나자 높다란 나무에 앉아 있던 벨이 다시 루시엘에게 왔다.

두 사람에게 보여 주고 싶었는데. 루시엘이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나랑 마샤 있을 땐 나무 위로 가 버리더니 이제 내려오는 거야? 쑥스러워?”

―부엉.

벨이 고개를 까딱하며 또다시 근처에 있는 다른 나뭇가지 위로 파드드 날아갔다.

“어어? 어디 가? 벨!”

그러더니 나뭇가지를 부리로 콕 쪼았다. 배가 고픈 모양인지 벌레를 사냥 중이었다.

이제는 먹이를 잡아 주지 않아도 알아서 사냥을 시키면 되겠다 싶었다.

루시엘은 벨이 사냥을 마칠 때까지 잠깐 근처 너른 바위에 앉아 기다려 주었다.

그러나 벨은 자꾸만 새로운 먹이를 찾으러 포로롱 날아다녔다.

“그동안 굶기지 않았는데…….”

얼마쯤 그렇게 벨을 따라서 숲의 안쪽으로 갔을까.

평소에는 막혀 있던 숲길로 가는 나무 문이 개방되어 있었다.

‘손님이 많이 와서 숲길을 개방해 둔 걸까?’

벨슈타인에 지내면서 대부분 가 본 것 같은데, 루시엘은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을 굴리며 나무문 안으로 들어가 숲길을 걸었다.

시푸른 나무들이 우거져 있어서 공기가 시원했다.

그렇게 얼마쯤 갔을까.

오렌지색의 둥근 튤립 모양 지붕을 가진 건물이 나타났다.

‘어……? 설마 여기가 튤립궁인가?’

궁 앞에는 화려한 마차와 짐마차 여러 대, 말들이 있는 마구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하얀 제복을 입은 황실 호위 기사들 십여 명이 에워싸듯 그 앞을 지키는 채였다.

루시엘은 얼른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벨을 따라오다 보니 여기까지 와 버렸지만 튤립궁이란 걸 알게 되자 레이놀드를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튤립궁으로 가는 길은 분명 따로 있다고 들었는데. 누군가의 착오로 아까의 나무 문이 개방되면서 지름길이 생긴 모양이었다.

‘얼른 돌아가자. 지금 레이놀드와 마주치면 분명 감정을 참기 힘들 거야.’

온 길로 돌아가기 위해 루시엘이 몸을 돌렸을 때였다.

바스락 나뭇잎이 밟히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뒤에서 멈추었다.

루시엘은 바짝 긴장하다 그다음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이 굳고 말았다.

“벨슈타인에는 눈토끼를 볼 수 있다더니 사실인가 보군.”

“……!”

루시엘이 기억하는 것보다 앳된 소년의 음성이긴 하지만, 이건 분명히 황태자, 아니 지금은 황자 레이놀드의 목소리였다.

루시엘은 차마 올려다보진 못하고, 그의 구둣발만을 힐끗 곁눈질로 보면서 덜덜 떨었다.

차마 지우지 못한 과거의 끔찍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루시엘, 죽기 전에는 내게서 벗어나지 못할 거야. 그때까진 네가 나를 도와서 보석을 만들어야 한다고. 알겠느냐?’

루시엘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지금 여기서 강렬한 감정을 더욱 느끼면…… 보석을 생성하고 말 거야. 진정하자, 진정해. 제발…… 루시엘! 지금은 과거가 아니야. 난 보석 노예가 아니라고.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숨이 막힐 듯한 두려움과 불안감에도 루시엘은 심장으로 모여드는 마나를 막기 위해 간신히 참아냈다.

“……말을 못 하나?”

풀썩!

루시엘은 속이 울렁이고 머리가 어지러운 느낌에 그대로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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