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수도의 후작저로 간신히 귀환했으나 카빌 후작은 도저히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짜여진 연극처럼 벨슈타인 공작가에게 놀아난 기분이 들었던 터였다.
개망신을 당한 것도 모자라 제 자식들은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 꼬락서니를 보고 있자니 혀를 끌끌 차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못난 것들. 정말 기억이 하나도 나질 않는단 말이냐?”
아버지의 타박에 막시무스도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온몸이 누군가에 두들겨 맞은 듯 욱신거렸고 골은 띵했다.
“예, 아버지…….”
쿠당탕!
카빌 후작이 이미 여러 곳이 부서져 있는 목각인형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면서 핏대를 세웠다.
“벨슈타인가의 사용인 놈들 말로는 네가 저 흉물스러운 인형과 치고받고 싸웠다는데…….”
“……예? 인형이랑 제가 치고받고 싸웠다고요? 그럴 리가 없는데.”
“도대체 이런 물건은 도대체 왜 가져간 것이냐?”
“그…… 그건.”
막시무스가 변명거리를 찾지 못한 채 입술을 짓씹었다. 분명 저 목각인형을 페넬로페에게 맡긴 다음, 키제프 자식을 기다렸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머릿속에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아무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인형이 날 친 거라고?’
그렇다면 페넬로페 저 계집애가 일부러 인형으로 나를 쳤단 건가?
막시무스가 페넬로페를 홱 쏘아보았다.
“페넬로페, 어떻게 된 거야? 인형이 키제프를 쳐야 하는데, 왜 나를 쳤다는 거야? 어?”
막시무스가 눈을 부라리자, 페넬로페가 슬쩍 쫄았다. 하지만 정말 모르는 일이었다.
“나, 나도 모르겠어. 오빠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버튼을 누른 것밖에는.”
“멍청아. 제대로 한 거 맞아? 너 일부러 인형을 이용해서 날 때린 게 아니고?”
“설마 날 의심하는 거야?”
막시무스가 페넬로페의 팔뚝을 거세게 붙잡았다.
“그럼 이걸 어떻게 설명할 건데?”
“아파, 이거 놔! 애초에 비겁하게 그따위 인형을 이용하니까 망한 거잖아.”
서로 헐뜯는 아이들을 보는 후작의 눈초리는 더욱 사나워졌다. 그가 소파 손잡이에 대고 쾅 주먹을 내리쳤다.
“그만! 뭘 잘했다고 둘이 내 앞에서 싸움질이냐?”
“아버지, 저는 진짜 오빠가 하라는 대로 한 죄밖에 없어요. 키제프 공자가 오면, 저 인형으로 공격하라고 했단 말이에요…….”
이내 울먹거리기 시작한 페넬로페가 아버지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평소라면 딸아이를 마냥 귀엽게만 바라보던 후작의 눈이 차갑게 식어 미동도 없었다.
“……아, 아버지?”
평소와는 다른 아버지의 기색을 눈치챈 페넬로페가 지레 겁먹은 얼굴이 되었다.
“페넬로페. 네가 분명 공자비 계집애의 눈이 보석처럼 빛난다고 하지 않았더냐?”
“……네, 마, 맞아요. 루비 같았는데.”
“그런데 어제 마주한 그 아이의 눈동자는 평범하고 어두운 갈색이었다.”
“네…… 그건 저도 어떻게 됐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럼 다시 한번 묻겠다. 의류점에서는 분명 빛나는 분홍색 눈동자를 보았다 이 말이지?”
어젯밤 일도 기억이 끊긴지라, 가물가물했지만 페넬로페는 열심히 생각해 보려고 애를 쓰며 고개를 연신 주억거렸다.
“맞아요. 어제는 긴가민가했지만 틀림없어요.”
페넬로페의 확신 어린 말에 후작은 잠시 생각에 젖었다가 대답했다.
“그래, 알았다. 둘 다 그만 방으로 돌아가 쉬거라.”
아버지의 분노가 좀 누그러진 듯해 안도하는 얼굴로 막시무스와 페넬로페가 제 방으로 돌아갔다.
소파에 깊이 눌러앉은 후작이 턱가를 긁적이며 잠시 생각을 굴렸다.
‘아무래도 속임수를 쓴 것 같군. 생각해 보니, 벨슈타인 놈들은 마법에 능하니 눈동자 색 정도야 얼마든 바꾸었던 게지.’
그걸 미처 깨닫지 못하고 이렇게 당하기만 한 것이 분하고 원통해 죽을 지경이었다.
“이렇게 물러설 줄 알고? 천하의 이아로스 폰 카빌을 뭘로 보고!”
카빌 후작이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러고 보니 공자비가 진짜 보석안을 가진 요정이 확실하다면, 진짜 샤일록 암즈 놈의 신분과 벨슈타인 지점 사업을 괜히 벌써 다 정리해 아깝게 되었다.
카빌 후작이 애꿎은 소파 손잡이를 또다시 쾅 내리쳤다.
그러나 페넬로페 말대로 그저 눈속임 당한 것뿐이라면, 어떻게든 공자비를 빼내 오면 될 것이다.
‘크리스털 페어리를 손안에 쥐는 것이지!’
* * *
황금빛 실크로 장식된 마차가 검은 장벽의 마지막 성문까지 통과하자, 춥고 서늘하기만 하던 내부 온도가 한결 온화해지는 것이 폐부로 느껴졌다.
‘저게 바로 그 유명한 벨슈타인의 검은 장벽인가…….’
아름다운 흑발의 소년이 턱을 괸 채, 멀어지는 장벽을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검은 장벽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들어 왔지만 실제로 보니 더욱 드높고 삼엄했다. 여러 겹으로 요새를 지어 놓은 듯한 모양새가 산속 깊은 골짜기 같기도 했다.
황가를 상징하는 보라색 눈동자가 부지런히 구르며 철옹성 같은 벨슈타인 성의 내부를 낱낱이 살피느라 바빴다.
그러다 건너편에 앉은 소녀와 눈이 마주치자, 황자 레이놀드는 입매를 부드럽게 올리고 적당히 미소를 보였다.
이복 남매이지만 두 사람은 함께 마차를 동행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는 모두 황후의 제안이었다.
‘이번 벨슈타인의 경사는 황자와 황녀가 사이좋게 방문해 축하해 주는 것이 보기 좋을 듯하구나.’
그 제안만 없었더라도 자신 혼자서 방문했을 텐데…….
레이놀드는 가늘어진 눈초리로 제 이복누이 클로디아 황녀를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자신과 같은 보라색 눈동자였지만, 조금 더 색소가 진했다. 다만 그녀의 머리색은 황후를 닮아 은은한 밀밭처럼 부드러운 갈색이었다.
“검은 장벽도, 공작성도 직접 보니 더 웅장하고 멋있다. 그렇지, 레이놀드?”
“그래, 나도 감탄하던 차야, 누이. 벨슈타인의 기술력이 실로 대단하네.”
레이놀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향해 웃어 주었다.
“누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된다니까. 고작 몇 달 차이인데.”
이복 남동생의 호의 어린 미소에 클로디아는 약간 들뜬 기색을 지우지 않은 채 주변을 둘러보면서 여유롭게 대답했다.
남매지만 서로 궁의 위치도 멀었고 타국으로 유학을 따로 다녀와 함께 지내던 시간이 얼마 없었다.
물론 그들의 사이가 가깝지 않은 가장 큰 요인은 어머니가 다르기 때문이지만.
클로디아는 정실 황후에게서 태어난 적통 황녀였지만, 레이놀드는 황비에게서 태어난 서자였다.
레이놀드의 검은 머리카락은 죽은 제 어머니인 카일라 황비의 색을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황제는 레이놀드에게서 죽은 황비의 모습이 겹친다며 귀애했다. 황제가 진심으로 사랑한 여자가 황후가 아닌 황비라는 사실은 모두가 공공연히 아는 사실이었다.
황제가 황후를 냉대하는 일은 없었지만, 황후에 비해 자작가 영애라는 낮은 신분,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황비를 황성의 시녀들은 은근히 무시하고 뒤에서 떠들었다.
황후는 그런 시녀를 꾸짖고 황비를 존중했고 그 덕에 겉으로는 평화로운 한 가족이었다.
그런 황후 밑에서 교육받고 자란 클로디아도 비록 어머니는 다르지만, 레이놀드를 미워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성격상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했다.
낯선 장소라 그런지 평소 속을 알 수 없다고 생각했던 레이놀드와도 불편함이 적어 클로디아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벨벳처럼 펼쳐진 우아한 정원을 바라보았다.
“여기가 벨슈타인이라니…….”
벨슈타인은 춥고 음습한 북부라 꽃이 없고 황량한 곳이라고 상상했는데 갖가지 꽃을 정성 들여 가꾸어 놓았다.
반질반질 빛나는 호수와 새파란 하늘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클로디아는 벌써부터 벨슈타인 영지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문득 어린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가 웃음을 지었다. 기억 속 공자는 무척이나 무뚝뚝한 꼬마였다.
‘벨슈타인 공자가 결혼을 다 하고…… 어떤 영애일까.’
어떤 영애이길래 돌덩이처럼 차갑고 딱딱한 공자가 결혼을 결심했는지 클로디아는 그 사연이 못내 궁금했다.
* * *
“아가 마님, 황성 마차가 성문을 통과했다고 하네요!”
로즈가 부산스럽게 응접실로 들어오면서 고했다. 아기 영지에서 돌아온 루시엘은 낮잠을 자고 일어나 베시에게 머리를 맡기고 있었다.
키제프는 잠시 연무장에 다녀오겠다고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황성 손님만 아니라면 오늘 저녁은 연회장에 나올 필요 없이 푹 쉬어도 좋다고 시아빠께서 허락하셨는데.
황가의 손님을 맞이하는 자리에 주인공이 빠질 수는 없다고, 길리아트 할아버지가 덧붙이셨다.
루시엘은 연한 꽃잎처럼 산호색이 도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황성 마차에 누가 타고 있을까.’
애써 모른 척하려 해 봐도 자꾸 신경이 쓰이고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벨슈타인의 공식적인 큰 행사이니, 적어도 황족이 방문할 것이다.
모양새 좋게 벨슈타인 공자와 나이대가 엇비슷한 2세, 즉 황자나 황녀가 방문할 가능성이 가장 컸다.
그러니 그를 마주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될 터.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해, 루시엘.’
지금이라면 황태자도 아직 많은 것을 알지 못하는 미성숙한 나이에 불과할 것이다.
과거 레이놀드 황태자는 루시엘보다 여섯 살이 더 많았으니까 지금 그의 나이는 열여섯 살이겠지.
그가 루시엘에게서 보석을 착취해서 검을 완성하고 벨슈타인을 치러 갔을 때는 루시엘이 열아홉, 황태자는 스물다섯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시간은 구 년.
하지만, 그는 훨씬 전부터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쪽에서도 일찍 대비할수록 좋아.’
“아가 마님, 주방장 세스가 보낸 특별 간식이 왔어요.”
생각이 많아진 루시엘의 머릿속을 바로 비워 버릴 만큼, 따뜻한 과자가 든 바구니가 별궁에 도착했다.
하지만 아직 머리 손질 중이라 루시엘은 로즈가 먹여 주는 쿠키를 쏙 받아먹었다.
“아가 마님…… 머리는 다 됐어요. 근데 오늘따라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세요?”
루시엘의 머리를 하나로 묶은 다음, 하얀색 다이아몬드 머리핀으로 마무리하며 베시가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황가에서 손님이 오신다니 긴장하셨나 봐요. 오늘은 어떤 드레스를 입으시겠어요?”
볼에 잔뜩 씹히는 바삭한 쿠키를 우물거리면서 루시엘이 드레스를 둘러보았다.
“저거.”
베시가 꺼내 놓은 여러 벌의 드레스 중에서 빨간색을 골랐다. 여러 단의 스커트 자락이 겹쳐져 꽃잎처럼 고운 드레스였다.
평소 루시엘이 입던 것보다 다소 화려한 디자인이었다.
“와, 그걸 입으시면 아기 장미 같으실 거예요, 아가 마님!”
로즈가 활짝 웃으면서 말하자, 루시엘은 쿠키를 우물우물 삼킨 다음 부탁을 청했다.
“로즈, 황성에서 오신 손님이 누구인지 알아봐 줄 수 있을까?”
“네, 맡겨만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