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자신도 루시엘에게 궁금한 게 있지만 기다려 보기로 했다.
미처 다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도 총총 빛을 내는 저 별들은 알고 있을 것만 같았다.
연회의 밤이 깊어 가는 공작성을 올려다보던 둘은 문득 중얼거렸다.
“배고파.”
“나도…….”
“연회에서 바쁘게 돌아다니느라고 제대로 먹지 못했어.”
돌아가서 에바나 베시에게 말하면 식사를 준비해 줄 테지만……. 안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건 키제프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네 영지로 가자.”
루시엘도 끄덕였다. 영지에 가면 과일이 많이 있었다. 좌표를 열어 이동한 두 사람은 빠르게 과수원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과일들이 다 여기 있어. 나중에 다 따다가 과일 잼을 만들 거야.”
“저걸 전부?”
“응!”
“욕심쟁이네.”
“벨슈타인의 모두에게 나누어 줄 거야.”
루시엘의 머리를 쓰다듬고 나서 키제프가 말했다.
“우선 먹을거리부터 찾자.”
“응.”
키제프가 나무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사과 두 알을 따 왔다. 루시엘은 양손 가득 딸기와 블루베리를 따 왔다.
별장 안에 들어가 소파에 앉은 두 사람은 과일로 배를 채웠다. 아삭아삭한 사과와, 새콤달콤한 딸기와 블루베리가 금방 사라졌다.
“졸려. 나 조금만 잘게.”
루시엘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며 고개가 키제프의 어깨 쪽으로 떨어졌다.
닿을락 말락 아슬아슬하게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루시엘의 머리를 살짝 자신 쪽으로 기대게 만들었다.
곧 자정이 가까워질 시간, 평소 일찍 잠드는 루시엘에게는 잘 시간이 훌쩍 지났다.
얇은 드레스를 입은 루시엘이 추워 보였다. 열심히 눈을 굴린 덕분에 양털 담요를 찾을 수 있었다.
담요를 둘러 주자 루시엘은 한결 따뜻해진 덕인지, 편안하게 자는 듯했다.
키제프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그 역시 피곤함이 몰려와 조금씩 눈꺼풀이 사르륵 감겼다.
그날 밤 두 사람이 없어진 줄 알고 놀란 어른들이 루시엘의 별장 앞에 모이는 작은 소동이 있었지만 실드 봉인석 탓에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창문 틈으로 소파에 앉아 서로 기대 잠든 두 아이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발견한 길리아트가 말했다.
“저기 있었군.”
“귀여워라…….”
길리아트와 이벨린의 마음도 녹여 줄 만큼 몽글몽글한 광경에 노부부도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이내 모두가 떠나고 두 사람의 편안한 숨소리만 남은 채 그렇게 연회의 첫날 밤이 지나갔다.
* * *
다음 날 잠에서 깬 두 사람은 걱정했을 어른들에게 곧장 통신구를 통해 연락했지만 웬일인지 다들 평화로웠다.
무엇보다 별장 앞을 나가자, 간단한 식사가 도착해 있었다. 호위 기사 랄프가 명을 전달받고 아기 영지에 가져다준 모양이었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식사 후 루시엘은 키제프에게 과수원을 제외한 아기 영지를 한 바퀴 쭉 돌면서 안내해 주었다.
“저건 뭐지?”
키제프의 시선은 목초지 울타리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은빛 털을 가진 눈사슴 한 마리가 콩콩 뛰어다니면서 놀고 있었다.
“아, 눈사슴. 설원에서 시아빠가 다리 다친 걸 데려오셨어.”
“눈사슴이라니. 너는 눈토끼니까 잘 어울리네.”
물론 그 정체는 빙결의 마법사지만 그걸 솔직히 다 말할 수야 없지.
“루시엘.”
“응?”
“바쁜 것 같던데 도울 일 있으면 얘기해. 나도 네게 도움이 되고 싶으니까.”
느릿하게 깜빡이는 키제프의 눈을 보며, 루시엘은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편지가 없네.”
키제프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려서 루시엘은 웃고 말았다.
“편지 쓸까?”
“응. 써 줘.”
짧게 대꾸한 키제프의 시선이 진해졌지만 루시엘은 눈치채지 못했다.
“좋아. 어려울 거 없지.”
루시엘은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말했다.
벨슈타인 사람들은 모두 편지를 좋아해서 다행이었다.
두 사람이 풀밭을 사이좋게 걷고 있을 때였다. 호위 기사 랄프가 둘에게 다가와 고했다.
“근처에 사는 영지민들이 전부터 부탁을 했습니다. 아가 마님께서 방문하시면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요. 지금 괜찮으십니까?”
“앗.”
놀란 루시엘이 키제프의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다녀와, 루시엘.”
“응, 키제프도 같이 가자.”
혼자서는 용기가 안 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키제프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아기 영지의 입구에는 십여 명의 영지민들이 모여 있었다. 루시엘은 살짝 상기된 얼굴로 아기 영지의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아가 마님!”
“벨슈타인에 은혜를 내리신 분.”
“천사가 틀림없으세요.”
“아가 마님 덕분에 산사태를 피했어요.”
영지민들이 루시엘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며 환호했다. 루시엘에게 풀꽃을 꺾어다 주는 이들도 있었다. 뜻밖의 반응에 루시엘은 놀란 얼굴로 수줍게 인사했다.
“여러분들이 피해를 입지 않아 정말 다행이에요. 혹시 어려운 점이 있다면 또 알려 주세요.”
루시엘의 말에 영지민들이 하나둘 손을 들고 불편함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약을 파는 곳이 없어 아프면 다른 마을까지 가야 해요.”
“음, 그건 곧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거 같아요.”
루시엘은 시클라인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날씨가 궂어 농사로 돈 벌기가 너무 힘듭니다.”
“온화한 기후를 만드는 마법사를 배치해 보는 건 어떨지, 공작 각하께 제안을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개선해 보겠다는 답을 얻은 영지민들의 얼굴이 하나씩 밝아졌다.
“아직 어린 아가 마님께서 민심을 알아주시니 기특하셔라.”
지팡이를 짚고 허리를 두드리는 노인이 루시엘을 칭찬했다.
영지민들은 루시엘의 천사 같은 외양과 마음씨에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동안 벨슈타인 가문의 일원들이 축적해 왔던 고고하고 강대한 이미지와는 판이하게 다르달까.
친근하고 귀여운 루시엘이 미래의 공작 부인이 된다면 어떨까, 뭇 사람들은 상상이 되기도 했다.
“저는 대단하지 않아요. 벨슈타인을 위해 진짜 열심히 노력하는 분들은 따로 계신걸요. 공작님과 벨슈타인의 모두는 물론이고 공작성의 가신들, 기사단들, 그리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이 가장 대단해요. 저기 있는 공자님이야말로 벨슈타인의 미래를 책임질 분이고요. 그는 벨슈타인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어요.”
루시엘의 말을 들은 영지민들의 시선이 키제프에게로 닿았다. 영지민들에게 그동안 노출되지 않았던 키제프였기에 그들의 반응은 더욱 끓어올랐다.
“와아! 공자님 만세! 아가 마님 만세!”
민망한 상황이었지만 이런 것에도 차차 점점 익숙해지게 될 터였다.
그날 영지민과 만나고 고충을 들어 준 일은 금세 영지에 널리 알려졌다. 덕분에 어린 공자 부부의 이미지가 상승함은 물론이고, 그들을 훌륭하게 교육시킨 공작과 전대 공작의 명예도 높이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벨슈타인 성으로 돌아가는 마차에서 키제프가 말했다.
“영지민에게 엄청난 신뢰와 인기를 얻고 있네.”
“으응. 어쩌다 보니.”
루시엘이 영지민에게 받은 꽃의 향기를 맡는 척 어물쩍 대답했다. 키제프는 이 기회에 엘링턴에게 들은 이야기에 대해 물었다.
“듣자 하니 산사태 말고도 도움을 준 일들이 있던데. 길렌 백작이 추진 중인 프란델 호수 건도 그렇고. 그것 말고도 이것저것 여러 가지 하는 중인 거야?”
“…….”
“엘링턴과 자주 사라지는 것도 그럼?”
“맞아.”
루시엘이 살살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키제프가 화를 낼 줄 알았지만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듯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각거리는 말발굽 소리에 묻힌 정적이 이어졌다.
‘벨슈타인의 미래까지 전부 솔직하게 말하지 못해서 미안.’
하지만 키제프와는 계약 결혼을 했을 뿐이다. 그는 루시엘을 위해 기꺼이 손을 내밀어 주었고, 본분을 다했다.
‘지금까지도 잘하고 있고, 앞으로도 잘해 갈 거야. 키제프, 네가 불행해지길 바라지 않아. 이번엔 내가 지켜 줄게.’
루시엘이 그리 다짐하는 동안, 키제프가 먼저 말을 이었다.
“벨슈타인의 모두가 너를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어. 나도 그렇고.”
“그건 나도 그래. 벨슈타인은 이제 나에게 가족이나 마찬가지인걸.”
루시엘에게 처음으로 생긴 진짜 가족이었다. 마음을 열고, 보여 줄 수 있는.
“루시엘, 널 믿고 기다릴게. 네가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든.”
“응.”
“미처 못 한 말이 생각나면 꼭 나에게 가장 먼저 말해 줘.”
* * *
다각다각.
자르가가 말을 타고 성으로 귀환해 곧장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에는 공작과 엘링턴이 함께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 연일 계속되는 연회로 인해, 새롭게 올라온 사업 제안서들이 쌓여 있었다.
공작은 느른하게 턱을 괴고 물었다.
“그 여자를 찾았다고?”
“예, 리카르도 영지에 소속된 시칠렌이라는 와인 재배지에서 일하면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와인이라…… 다른 누군가를 만나는 기색은 없던가?”
“포착 못 했습니다. 정찰대의 인원도 남겨 두었지만, 아직까지는. 그런데 새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공작이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새로운 사실?”
“예. 마을을 돌던 중 시칠렌이 황성으로 와인을 납품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이군.”
리카르도산 중에서도 피피아노 마을의 것이 가장 유명해, 황성은 물론 여러 귀족들도 그곳의 와인을 즐겼다.
물론 기호에 따라 다양한 맛을 즐기는 이들도 있었으나, 하필이면 루시엘의 유모였던 볼라디 부인이 머무는 곳이라니……. 혹여나 그 여자가 황실과 관련이 있는 거라면?
그렇다면 황실의 누군가도 크리스털 페어리의 존재를 찾고 있는 건 아닐지. 그런 불안감이 공작을 덮쳤다.
엘링턴도 같은 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황실의 마차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각하.”
일반적으로 연회의 첫날이 가장 많은 손님이 참석하는 편이었고, 이튿날 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알고 있다. 일단 그 여자는 계속 주시하도록.”
“예.”
공작은 아차 싶었던지 이번에는 엘링턴을 향해 물었다.
“카빌 후작은 다른 움직임 없이 귀환했나?”
“예. 자녀를 잃어버렸다고 주장해서 수색하다 보니 숲에서 부서진 목각인형과 발견됐습니다.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고 해서 소란이 좀 있었지만 아무래도 기습용 목각인형을 가지고 놀다가 그리된 것 같습니다……. 여하튼 조금 전 돌아갔습니다.”
엘링턴의 보고에 공작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지가지 하는군. 샤일록 암즈의 고리대금업 벌이던 곳은?”
“벨슈타인 지점은 하루짜리 가짜 사무실이었습니다. 고객들만 본점으로 빼돌린 듯합니다.”
“……허술해 보이긴 했지. 그럴 줄 알았다. 예상대로 다른 목적이 있었고.”
공작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것 역시 루시엘을 노리기 위한 구실이었군. 그래, 차곡차곡 어디까지 쌓는지 두고 보지. 카빌 후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