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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94)화 (94/282)

<94화>

그 먼 거리의 여정을 오는 동안 수많은 기대를 했다. 그러나 벌써부터 후작 부부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초청을 잘못하는 건 대단한 실례였으나, 무소불위의 벨슈타인을 두고 감히 누구도 뭐라고 하지는 못했다.

그저 카빌 후작가가 눈 밖에 났다는 것을 모두가 똑똑히 알았을 뿐이었다.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벨슈타인 공작 놈……!’

게다가 공자비의 눈동자까지 보석안이 아니었으니, 그야말로 헛발질에 된통 물까지 먹은 셈이었다.

후작은 속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겨우 누르고 눌렀다. 테이블에 놓인 와인을 벌컥벌컥 물처럼 들이킨 그는 제 부인을 거칠게 잡아끌어 회랑으로 나가 물었다.

“부인도 분명 그날 보았다고 하지 않았소?”

“예? 무얼 말이에요?”

후작은 답답함과 짜증이 번갈아 올라오는 탓에 소리라도 내지르고 싶어 발을 쿵 거세게 굴렀다.

“공자비 계집애의 눈 말이야! 그날 의류점에서 똑똑히 보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보석처럼 반짝거렸다고…….”

“그…… 그게 기억이 잘. 그게 중요한 거예요?”

“아휴, 되었소. 답답한 사람 같으니. 내 말을 말아야지! 페넬로페는 어디 간 거지?”

“모, 모르겠어요.”

“당장 찾아오시오. 나는 일단 마차로 돌아가 있을 테니까.”

카빌 후작의 눈에서 서슬 퍼런 불꽃이 튀는 걸 보자, 후작 부인은 서둘러 시녀를 찾아 페넬로페와 막시무스를 데려오라고 명을 내렸다.

연회장에 남아 카빌 후작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루시엘은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카빌 후작, 당신 마음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루시엘은 지난번부터 정리해 온 카빌 후작의 불법 사업에 대한 문서를 거의 완성한 상태였다.

이제 그걸 토대로 자연스럽게 시아빠께 실마리를 주고, 카빌 후작의 사업을 무너뜨릴 것이다.

그가 사업이란 이름 아래에 행했던 일들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게다가 카빌 후작이 세를 불리도록 놔두면 안 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과거 황태자는 자금 마련책으로 카빌 후작과 손을 잡았었다. 훗날을 위해서라도 그 둘이 손을 잡을 수 없게 미리 싹을 잘라 두어야 한다.

루시엘은 후작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이내 공작과 키제프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가는 길을 사람들이 물길 터주듯이 양쪽으로 갈라져 비켜 주었다.

공작이 뒤를 슥 보더니, 루시엘에게 말했다.

“새아가, 괜찮은 것이냐?”

많은 뜻이 내포되어 있는 물음에 루시엘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며칠 전.

루시엘은 잠들기 전 공작을 찾아갔다. 카빌 후작가가 초청 명단에 있다는 이야길 에바에게 전해 들은 터였다.

그에게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크리스털 페어리’라는 사실을 공작에게 털어놓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후작이 원하는 것이 ‘크리스털 페어리’였으니까.

“시아빠, 드릴 말씀이 있어요.”

늦은 시간까지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있던 공작의 눈동자가 커졌다.

“루시엘, 잠들었을 시간이 아니냐. 무슨 일이지?”

루시엘은 막상 결심했지만, 쉬이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두려웠다. 그도 혹여나 변하는 건 아닐까 싶어서…….

‘아니야. 믿을 수 있어. 시아빠도 내 보석을 탐할 분은 아니야…….’

루시엘은 그걸 알면서도 눈을 도록도록 굴리고 있었다. 머뭇거리는 아이의 태도를 보던 공작이 루시엘에게 이리 오라고 손을 뻗었다.

루시엘이 다가가자 공작이 루시엘의 보슬보슬한 은발을 쓰다듬고는 무릎 위에 앉혔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기다려 줄 터이니 천천히 생각해 보아라.”

그렇게 말한 그가 드르륵 서랍을 열어서 과일 모양 사탕이 든 유리병을 꺼내 주었다.

루시엘은 사탕을 한 알 꺼내 입안에서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했다. 달콤한 파인애플 맛이 입안에서 터지며 루시엘은 공작의 배려에 긴장이 풀렸다.

“……시아빠는 제게 정말 아빠 같은 분이세요. 친아빠보다도 더요.”

“음, 그 작자와는 비교당하고 싶지 않은데.”

루시엘의 맑고 투명한 눈망울이 이내 커졌다가 곱게 휘어졌다.

“그냥 아빠라고 생각하는 건 어떠냐. 나만큼 너를 아끼고 사랑하는 어른은……. 이미 여럿 떠오르긴 하는군.”

큼큼, 헛기침을 하는 공작의 말에 루시엘은 따스함을 느꼈다.

“그런 자와는 비교도 안 되게 고마운 분이세요.”

“그런 자?”

“네, 그거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어요.”

“드릴 말씀?”

루시엘의 마음은 공작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으로 물결쳤다. 루시엘은 그 감정을 애써 참지 않고 심장으로 마나를 모으기 시작했다.

파앗.

또롱-!

공작에게 직접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어렵사리 말로 하는 것보다는 한번 보여 주는 것이 나을 테니까.

공작의 붉은 눈동자가 이내 흔들렸다.

“루시엘, 방금…… 보석을 만든 건가?”

“네. 저는 크리스털 페어리예요. 강렬한 감정을 느끼면 보석을 만들어요.”

“뭐라고?”

“사실 저는 백작의 사생아가 아니라 언니와 함께 사온 노예였어요……. 속여서 죄송해요. 크리스털 페어리라는 것도, 제 신분도요.”

보석을 만드는 요정의 핏줄이라면, 그도 길리아트에게 들은 바가 있었다. 종종 욕심 많은 자들이 인외종족들을 잡아와 노예로 부린다는 것도.

공작은 이 어린아이가 도망 나와 찾은 게 자신이라는 것이 더 안타까웠다. 그런 상황에서도 살고자 발버둥 쳤던 것이었으니.

“확실히 놀라운 얘기구나. 하지만 괜찮다. 네 신분이 무엇이든 이제는 상관없으니까. 그래서…… 네가 그런 눈을 하고 있었구나. 그래서 그자가 너를…….”

“언니 대신 유리관에 가두어 놓고 평생 보석을 만드는 노예로 만들려고 했어요……. 언니도 그렇게 당했고요.”

루시엘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공작이 루시엘의 볼을 가만히 쓸고 나서는 주먹을 발끈 쥐었다.

“인두겁을 쓰고 그런 짓을 저질렀단 말이지?”

루시엘은 물기 어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은 이를 악물었다. 아이 앞이라 분노를 표출시키지는 못했지만, 피가 빠르게 도는 것 같았다.

루시엘의 친부가 질 나쁜 놈인 건 알고 있었지만 상상 이상으로 최악이었다.

공작성의 지하 감옥에 갇힌 오르비아 백작은 죽지 않을 정도로 냉기에 휩싸이며 마수에게 공격당하는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자의 죄를 낱낱이 알게 된 지금 더 강한 처벌이 필요했다.

‘아무래도 놈에게 주는 고통의 강도를 높여야겠군.’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제 손으로 죽이겠어요.”

“……복수하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 루시엘.”

“네…….”

무겁게 고개를 숙이던 루시엘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제가 크리스털 페어리인데도 아무렇지 않으신 거예요……?”

“나 또한 드래곤과 마족의 핏줄이 섞였으니 상관없다. 네가 벨슈타인가의 귀한 보물이라는 사실도 변하지 않을 거고. 네 호위를 곱절로 강화해야겠지만.”

“시아빠아, 감사해요.”

그리 말하는 공작에게 루시엘이 폭 안기면서 또다시 토파즈를 만들어 냈다.

공작도 푸스스 웃으며 루시엘의 여린 등을 한참 도닥여 주었다.

“녀석. 그동안 숨기면서 끙끙 앓느라 고생이 많았다. 미리 알려 주어서 고맙고.”

“좀 더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한걸요. 그치만 오랫동안 사람을 믿지 못했어요.”

공작은 루시엘을 품에 안고 요람처럼 살살 흔들면서 다정스레 말을 건넸다.

“아니다,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책이었지. 잘한 일이다.”

이내 그는 무언가 떠오른 듯, 일순 눈이 가늘어졌다.

“잠깐, 크리스털 페어리의 특징이 그 보석안이라고 하였지.”

“네, 맞아요. 왜 그러세요?”

공작은 엘링턴에게 보고받은 것을 떠올렸다. 최근 카빌 후작의 행적.

그는 눈이 보석처럼 빛나는 여자아이를 찾고 있다고 했다. 노예선이나 빈민가나 할 거 없이 사방팔방으로.

“보석안을 찾는 자가 있다더군. 카빌 후작.”

“아…… 카빌 영애가 제 눈을 보고 말했을지도 몰라요.”

공작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말고 아빠만 믿어라.”

“그렇지만 이미 초대장을 보냈으니 저한테 분명 접근할 거고, 어쩌면 납치까지 하려 할지도 몰라요. 혹시 카빌가를 왜 초대하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놈들이 내 영지에서 감히…… 불법고리대금업을 벌였지. 놈이 어찌 움직이나 동태를 살펴보려고 한다. 별것 없으면 창피도 줄 겸해서.”

루시엘은 엘링턴에게 들었지만 재차 끄덕이며 자초지종을 들었다.

“벨슈타인의 가신을 이용해 저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했을 거예요.”

“벨슈타인에 접근하는 목적이 과연 무엇인가 했더니, 바로 우리 새아가였군. 겁대가리를 상실했나……. 당장에 사살해서 묻어 버릴까.”

희번뜩한 붉은 눈이 그르렁거리는 짐승 같았다. 흥분한 공작을 루시엘이 말렸다.

“앗, 시아빠. 진정하고 참으세요……. 그래도 고위 귀족을 해치면……. 다른 방법이 분명 있을 거예요.”

루시엘은 일단 그렇게만 말해 두었다.

‘아직은 안 돼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루시엘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이 만든 토파즈 중 한 개를 공작의 커다란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이건 왜 주는 거지?”

“선물이에요. 시아빠가 제게 벅찬 감동을 주셔서 만든 거니까.”

“그런, 그건 당연한 것이니 받을 수 없다.”

공작은 보석을 다시 루시엘에게 돌려주었다.

“앗, 그치만…….”

“애들은 이만 잘 시간이군. 잘 자라, 루시엘.”

공작이 웃으면서 루시엘을 바닥에 내려 주었다.

루시엘은 그가 거절한 토파즈를 손에 꼭 쥐고는 몽글몽글해진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말하기까지 조마조마하던 시간이 아까웠을 정도로 공작은 제 보석을 탐내지 않았다. 도리어 더 보호를 해 주려고 하는 그의 태도에 또, 한번 가슴이 따뜻함으로 차올랐다.

‘고마워요.’

* * *

공작이 다른 귀족들을 만나 논의하는 동안, 엘링턴은 루시엘 앞으로 한 남자를 데려왔다.

그가 데려온 강렬한 인상의 남자를 보자마자, 루시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가 마님. 이분이 건축가 갈리우스 백작입니다.”

짙은 초록빛에 금색 외알 안경, 회색 수트를 차려입은 중년 남자로, 강퍅하고 깐깐함이 가득 묻어 나오는 인상이었다. 보자마자 호감부터 보여 왔던 연회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는 루시엘을 대하는 태도부터 차가웠다.

루시엘을 힐끗 내려다본 그가 딱 잘라 물었다.

“……나는 쓸모없이 시간 보내는 걸 가장 싫어한다. 미팅도 밀려 있고. 시간도 없다. 용건이 뭐냐?”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내는 그의 모습에 루시엘이 자신감을 드러냈다.

“딱 10분만 내어 주세요.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갈리우스의 딱딱한 태도에 엘링턴이 공손히 말했다.

“공작가의 아가 마님이니 예우를 해 주시지요.”

“……아직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아이라면 황족에게도 존대하지 않는다.”

“엘링턴, 저도 반말이 더 편해요.”

“음, 그렇다면 상관없습니다만.”

사실은 그의 신변 보호를 위해서였지만, 엘링턴은 말을 아끼기로 했다. 공작이 포착했다면 갈리우스의 멱살을 쥐고 탈탈 흔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 당장의 관건은 저 괴짜에 고집불통인 갈리우스의 마음을 아가 마님이 어떻게 사로잡을지, 그것뿐이었다.

한편 루시엘이 갈리우스를 데려간 곳은 그에게도 아주 익숙한 곳이었다.

“……여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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