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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91)화 (91/282)

<91화>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여유로운 동작과 달리, 옆에 있는 에레스를 향한 적의로 붉은 눈을 굴리는 키제프였다.

그야말로 진짜 시아빠랑 판박이였다.

어머님이 왜 작은 루이라고 하는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키제프, 근데 왜 여기 있어?”

루시엘이 놀란 눈으로 묻는데, 길리아트가 들어왔다.

에레스가 손을 번쩍 들었다.

“스승님, 수업에 불청객이 있는데요”

키제프가 반박했다.

“나도 배우러 왔어.”

에레스의 눈이 가늘어지며 빈정대기 시작했다.

“마법 천재가 굳이 마법을 배울 필요가 있으려나?”

“천재가 있어야 너 같은 바보도 실력을 좀 자각하지 않을까.”

키제프가 에레스를 비웃어 주었다.

“뭐야? 내가 왜 바본데!”

“마탑 소속의 마법사라고 천지 분간을 못 하는 건 둘째 치고, 루시엘에게 마법 대련도 졌다지?”

“……헐?”

입을 벌린 에레스가 루시엘을 원망의 눈으로 보았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 아오! 루시엘, 너가 말했어?”

“아니?”

“그럼 누구…….”

고개를 휘휘 젓던 에레스의 시선에 길리아트의 수염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스승님이 말씀하셨어요?”

“……그게 말이다.”

“정말 실망이에요. 저한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저 마탑에 그 소문 돌면 인생 끝난다고요.”

“마탑엔 소문 안 냈다, 욘석아!”

“……손자한텐 말씀하셨잖아요.”

에레스가 힐끗 키제프를 바라보았다.

번듯하게 수려한 미남인 것도 짜증 나는데 마법 천재에다 할아버지는 마탑주, 아버지는 공작이라니.

세상 너무 불공평했다.

아, 하나 또 있네. 루시엘이 아직 조그맣고 어리긴 해도 크면 제국 최고 미인이 될 게 분명했다.

‘아, 부러우면 지는 거랬는데 이미 진 것 같다.’

한편 키제프도 에레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탑의 유망주라길래 누군가 했더니 삐죽 돋은 푸른 머리와 눈가의 점이 제법 새침하게 귀여운 소년이었다.

게다가 루시엘을 이름으로 불렀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이미 마음속으로 용서가 안 되는 듯했다.

두 소년의 눈동자에서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가운데에서 루시엘은 길리아트를 향해, ‘이대로 괜찮은 거예요?’ 하고 눈으로 물었다.

수업이 끝난 후, 루시엘은 개와 고양이처럼 서로에게 으르렁거리는 에레스와 키제프를 내보내고 길리아트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시간 있으세요?”

“오냐. 루시엘. 아, 네 별장에 실드 봉인석은 설치가 완료되었단다.”

“앗, 정말요? 그렇게 빨리요?”

“그래, 실은 조금 무리했지. 실드 봉인석은 제법 귀한 물건이거든. 하지만 키제프가 부탁했다. 너를 안전하게 보호해 달라고 말이지.”

“정말 감사해요.”

“이제 웬만한 고서클 마법사라도, 네 허락 없이는 그 별장 안에 들어갈 수 없을 거다. 오롯이 너만을 위한 공간이 되는 거지.”

루시엘의 표정이 밝아졌다. 혼자 보석을 원 없이 안전하게 만들 수 있겠다.

“할 말은 무엇이냐? 왠지 부탁이 있는 눈친데?”

역시 길리아트 할아버지는 눈치가 빠르셨다. 루시엘은 꾸벅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실드 봉인석까지 설치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한 가지만 더 부탁이 있어요. 지팡이를 만든 제작자를 만나고 싶어요.”

“류프델을 말이냐?”

“그는 마계에 살고 있어서 인간계로 나오지 않을 거다.”

“그럼 제가 갈게요.”

“그건 안 된다. 마계는 연약한 인간에게는 너무 위험한 곳이다.”

“……할아버지.”

“루시엘, 그것만은 절대로 들어줄 수가 없는 부탁이다.”

“네, 알겠어요.”

처음 보는 할아버지의 단호한 반대에 부딪히자, 루시엘은 할 말을 잃었다.

길리아트도 루시엘이 왜 류프델을 만나고 싶은지 궁금했다. 어떻게든 도울 방법이 있으면 함께 찾아 주려는 마음에서였다.

“무슨 이유에서 그러는 거니? 다른 지팡이라도 만들고 싶으냐? 이 할애비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도우마.”

“아, 그냥 제 지팡이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볼 것이 있어서…… 그랬던 거예요.”

“그렇다면 루시엘. 차라리 지팡이만을 내게 맡기는 거라면,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구나.”

“……아, 아니에요. 제가 직접 그를 만나서 물어보고 싶었어요.”

루시엘은 적당히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루시엘은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에리카가 계속 연구를 하고 있으니, 보석을 세공할 방법도 알아낼 수 있을지 몰랐다.

그저 할아버지께 불편함을 안겨 드렸을까 봐 그게 조금 마음에 걸렸다.

“할아버지, 전 괜찮아요. 아 참, 다음에 제 아기 영지에 놀러 오세요. 아셨죠?”

“그러마. 지팡이를 성장시키기 위한 거라면, 네 힘으로도 얼마든지 해낼 거라고 생각한다.”

“네! 그럴게요.”

돌아가는 루시엘의 자그만 뒷모습을 보며, 길리아트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귀여운 며늘아기지만 그런 위험한 곳에 데려갔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더욱이 루시엘이 진짜 요정의 핏줄이라면…….’

* * *

쿠우웅!

드디어 벨슈타인 공작가의 장벽 아래 커다란 성문이 모조리 개방되었다.

펄럭이는 검은 드래곤의 깃발이 곳곳에 꽂힌 성채의 거대한 크기와 웅장함은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냈다.

미리 마력 이동게이트로 이동해 새벽부터 성문 앞에 진을 치고 기다리던 마차들이 하나둘 입장했다.

하나같이 고위 가문의 마차들이었다. 외국 왕족의 문장들도 몇 보였다.

본래는 동관이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었지만, 피로연의 규모 때문에 손님을 전부 수용할 수 없었다.

이벨린과 솔리아페는 상의 끝에 추가로 다른 궁을 개방해 더욱 분주했다.

이번 연회는 전적으로 솔리아페가 에바와 함께 준비했고 이벨린은 몇몇 의견만 내었을 뿐이었다.

“이리 방문해 주셔서 기쁩니다.”

“축하드려요, 벨슈타인 공작 부인.”

검은색의 벨벳 드레스를 입고,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는 솔리아페를 이벨린이 멀리서 보며 미소 지었다.

연회장과 음식 준비, 접객 준비까지 안주인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솔리아페를 이벨린은 내심 흡족히 여기고 있었다.

“한다면 하는 아이라니까요.”

“언제나 솔리아페는 소홀함이 없었지요.”

이벨린의 말에 길리아트도 화이트 와인을 쨘, 하고 부딪쳤다.

그때 들어오는 귀빈들 중 한 노귀족 무리를 발견한 길리아트가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여보, 근데 우리 손주 며늘아기는 어딜 갔지요? 키제프도 안 보이고.”

“오늘 애들은 편한 시간에 나오라고 했으니까요. 어차피 어른들을 위한 연회이니 천천히 나와도 된다고요.”

“그, 그건 그렇지만.”

이벨린은 길리아트의 시선을 따라가더니 알 것 같았다.

“당신, 사람들에게 애들 자랑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쉿, 이따 애들 보면 알려 줘요.”

“에그, 알았어요.”

길리아트가 안면이 있는 귀족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다가갔다.

* * *

결혼식과 피로연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었다. 결혼식이 오롯이 두 사람만을 위한 의식이었다면 피로연은 모두를 위한 연회였다.

하여, 피로연 준비는 딱히 필요가 없었다. 어른들이 알아서 착착 진행했고 루시엘은 그저 몇몇 귀빈들에게 인사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마저도 피곤하면 별궁에서 나오지 말고 푹 쉬라는 공작의 배려에, 루시엘은 웃으면서 느지막이 연회장에 나왔다.

성문으로 마차가 얼마나 많이 들어온 것일까.

두 사람이 별궁으로 오기 전에 지냈던 동관도 부족해 새로 마련한 건물도 손님들로 가득 찼다고 로즈가 말하는 걸 들었다.

이벨린과 솔리아페는 며칠을 고심하면서 연회장을 준비한 모양이었다. 에바를 비롯해서 공작성의 모든 사용인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분위기에 루시엘도 괜스레 정신이 없어졌다.

불과 일주일 만에 준비를 마치다니, 루시엘은 모두가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새삼 신기했다.

“우와, 정말 여기가 공작성 맞아?”

그 폐쇄적인 벨슈타인 공작성에서 이렇게 규모가 큰 사교 파티가 열리다니,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결혼식 피로연이라니 자못 신기했다.

평소라면 한가로웠을 정원 곳곳에도 산책하는 귀족들이 가득했다.

제 또래의 귀족 아이들도 까르르 웃으면서 지나다니는 모습에 루시엘은 살풋 웃으면서 가장 불빛이 환한 연회홀로 들어섰다.

연회를 기념하는 우아한 백조 형상의 얼음 케이크를 올려다보며 어색하게 들어오던 루시엘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키제프였다.

검은 정장에 붉은색 크라바트로 멋을 낸 그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했다. 가지런히 앞머리를 내린 건 귀엽기까지 했다.

“어디 갔었어?”

“……응?”

“한참 찾았잖아.”

“잠깐 구경하고 있었어. 여기 벨슈타인 공작성이라니 안 믿겨서.”

키제프도 그 점에는 동의하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도 이렇게 사람 많은 건 처음 보는군.”

“사람 많은 거 싫지?”

“숨 막혀 죽을 것 같아.”

솔직한 키제프의 답에 루시엘이 말갛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우리 결혼식을 기념하는 연회인걸. 그냥 즐기자! 나 저기 가 볼래.”

연회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이 있었지만 각각 목적이 뚜렷하게 달라 보였다.

첫 번째, 사업을 제안하기 위해 모인 인사들.

두 번째, 벨슈타인의 내성을 구경하고 견제하며, 가십거리가 있는지 살피고 공작 부인에게 안면을 트러 온 사교계 인사들.

세 번째. 순수하게 피로연을 축하하러 온 사람들.

세 번째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 두 부류를 구분하는 건 쉬웠다.

사업을 제안하려는 이들은 전부 가주인 공작에게, 사교계 활동을 펼치려는 이들은 공작 부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루시엘은 양쪽 다 재미있어 보였지만, 우선 오늘 피로연의 가장 큰 목적은 건축가 갈리우스를 만나는 거였다.

‘갈리우스는 저쪽에 있을 거야.’

루시엘은 연회장에서 기둥 너머 공작이 있는 원형 테이블 방향을 바라보았다.

테이블 가운데에 앉은 공작이 여러 사람에게 무언가를 보여 주며 한참 토론 중인 것 같았다.

‘저게 뭐지?’

액자에 담긴 것들은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루시엘은 깜짝 놀랐다.

그건 루시엘이 시아빠에게 보냈던 편지와 책상에 놓아 주었던 꽃들이었다.

창피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자, 잠깐. 내 자랑을 하고 계셨던 거야?”

옆에서 엘링턴이 질색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면, 맞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지금 저쪽 테이블로 갔다가는…….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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