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둥실둥실 공중으로 떠오른 보석을 종류별로 모아 놓은 키제프가 물었다.
“이제 이거 어디로 옮겨 줄까?”
“여기로.”
루시엘은 보석의 방을 가리켰다. 그 안에는 미리 옮겨 놓은 다른 보석 상자들이 있었다.
“……여기에 이대로 두면 안전해?”
“내가 자물쇠 마법 걸어 놨어.”
“……그걸로 안 될 것 같은데.”
루시엘이 만든 보석을 하나하나 매만지던 키제프가 말했다.
“일반 보석보다 귀한 것 맞지? 마력도 느껴지는 것 같아.”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아. 내 보석엔 마력이 들어 있어. 아직 연구를 더 진행해야 하지만 다른 마법의 힘도……. 그건 마탑에 소속된 에리카라는 마도사에게 부탁했어.”
“……뭐? 이걸 보여 줬다고?”
“걱정하지 마,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녀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그녀가 에메랄드 안에 있는 마력을 측정하고, 바람의 힘이 들어 있는 것도 알려 줬어.”
루시엘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키제프는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루시엘과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인 듯했다.
루시엘을 지키고, 나아가 루시엘의 보석을 지키려면.
“루시엘, 그럼 이 사실 다른 가족들은 전혀 모르시는 거지?”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네가 처음이야. 아무에게도 말 안 했어. 에리카도 보석의 출처는 몰라.”
“그렇군.”
루시엘의 비밀을 자신만이 안다고 생각하니 약간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가족들에게는 일단 비밀로 해 줘. 나중에, 나중에 내가 다 밝힐 테니까.”
“……알겠어. 대신 이 보석을 안전하게 지킬 방법이 필요해. 너의 자물쇠 마법쯤은 고서클의 해제 마법으로 풀릴 수 있어.”
“그럼 다른 방법이 있을까?”
루시엘이 절실함에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일단 할아버지께 말씀드려서 네 별장을 보호할 실드 봉인석을 요청할게.”
“응…… 고마워.”
“앞으로 뭐든지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다 말해 줘. 혼자서 끙끙 앓지 말고.”
키제프의 손이 루시엘을 쓰다듬었다. 든든하게 의지가 되는 말이었다.
“난 네 편이니까.”
그 순간 루시엘은 생각했다.
키제프를 만나게 된 것도, 계약 결혼을 한 것도 모두 운명이라고.
“믿을게. 나도 키제프 편이야.”
루시엘이 방긋 웃어 보였다.
‘이번 생에선 내가 너를 구할게.’
벨슈타인이 파멸을 맞이하지 않게.
키제프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나저나 너, 이렇게 보석을 쏟아 냈는데 괜찮은 거야?”
“으응, 괜찮아.”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한꺼번에 마나를 너무 끌어 써서인지 숨이 가빠 오긴 했다.
루시엘의 숨결에 손을 대어 호흡을 확인한 키제프가 말했다.
“호흡이 흐트러진 걸 보니 너 쉬어야 해. 오늘은 일찍 자. 별궁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응.”
분명 움직일 수 있을 만큼의 기운은 있는데 어쩐지 루시엘은 얌전히 있고 싶었다.
키제프는 루시엘을 가볍게 안아 들었다. 부끄러워진 루시엘이 어정쩡하게 뻣뻣해 있자 키제프가 말했다.
“목에 손 감아.”
“으응.”
이후로 키제프도, 루시엘도 아무 말이 없었지만 얼굴에 열이 올라 있다는 것쯤은 둘 다 알고 있었다.
두근, 두근.
스피넬이 또롱, 또롱 맺히자 키제프가 걱정스레 말했다.
“……만들게 하면 안 되는데. 널 쉬게 하려면.”
“괘, 괜찮아.”
아마도 이건 두근거리는 이 분홍빛 감정 때문이 아닐까.
무언가에 대한 기대와는 다르다.
자신을 안아 든 채 이동하는 키제프의 얼굴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키제프의 어떤 행동이, 말이, 눈빛이, 아니 그의 모든 것들이 그녀의 감각과 맞닿아 있는 느낌이었다.
루시엘은 애써 외면하며 감정을 억눌러 보았다. 하지만 두근거리고 설레는 감정은 유독 더 조절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다른 감정은 참을 수 있었어. 그런데 이건 어쩌지 못하는 걸까?’
루시엘은 키제프의 품에 안겨 이동마법의 초록빛을 보며, 눈을 감았다.
키제프는 루시엘을 별궁의 침실까지 데려다주고, 다른 시중은 베시에게 부탁한 다음 이 층의 제 공간으로 가 버렸다.
아마도 루시엘이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 보석을 더 만들어 낼까 봐 염려가 되어 그런 것 같았다.
그 뒤로 루시엘은 한참 동안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인형을 끌어안았다. 겨우 가라앉힌 후엔 쏟아지는 잠에 금세 새근새근 잠들어 버렸다. 행복한 꿈을 꾸는 듯 루시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 * *
다음 날 키제프는 곧장 길리아트의 서재에 방문했다.
“할아버지.”
“웬일이냐, 키제프.”
길리아트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면서도 찾아온 손주가 반가워서 얼른 그의 팔을 끌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네 부탁이라면 뭔들 못 해 줄까.”
“루시엘의 영지에 있는 별장에 실드 봉인석을 설치해 주세요.”
“실드 봉인석을?”
“네, 루시엘이 그곳에서 자주 시간을 보내는데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길리아트는 웃음을 꾹 참았다.
드디어 키제프가 루시엘과 사이가 좋아진 듯해서 내심 흡족했다.
그래서 괜스레 심술을 부려 보았다.
“호위 기사가 있고 영지 자체도 보호가 되고 있을 텐데?”
“그 정도로는 안 됩니다. 할아버지도 루시엘이 위험에 노출되는 건 원치 않으시잖아요.”
키제프가 강한 어조로 말하자 길리아트가 말했다.
“나도 그 아이가 안전하게 보호받기를 원한다. 실드 봉인석의 설치를 허가하지. 네 아버지에겐 내가 말하마.”
“네, 감사합니다.”
길리아트가 이내 속내를 드러내며 말했다.
“루시엘과 사이가 요즘 부쩍 좋아진 것 같군. 보기 좋구나. 계약이니 뭐니 해도 역시 결혼하니 달라졌군.”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 그 애의 안전이 걱정되어서 그런 거예요.”
“으흠, 단지 그뿐이다?”
귀가 새빨개진 채로 대답하는 키제프를 보며 길리아트가 능청스레 말했다.
“루시엘에게 같이 마법 수업을 듣는 친구가 생겼다는 건 알고 있겠지? 에레스 실베인이라고, 장래를 촉망받는 열두 살 소년이지.”
‘요 녀석, 이래도 질투 안 나냐?’
하는 심정으로 길리아트가 찔러본 것이었는데 그 효과는 엄청 났다.
키제프의 주변으로 엄청난 어둠의 기운이 물씬 느껴졌던 터였다.
“지금 뭐라고 하셨…….”
채 말을 잇지 못하던 키제프가 미간을 좁히더니 말했다.
“저도 듣겠습니다.”
“……뭐라고?”
“마법 수업 말입니다.”
“너는 더 배울 필요 없는 거 아니었더냐?”
“아뇨, 할아버지의 큰 가르침이 꼭 필요할 것 같은데요.”
키제프가 웃으며 말했지만, 길리아트가 고개를 흔들었다.
‘저 녀석, 한 집착 하는 것이 제 아비를 꼭 닮았군.’
길리아트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허허 웃었다.
* * *
루시엘은 긴 잠을 잤다.
도대체 얼마나 잤던 걸까. 너무 많이 자서 머릿속이 몽롱했다.
그렇게 한꺼번에 많은 보석을 만들어 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가뿐한 기분으로 기지개를 켠 루시엘은 얼굴에 홍조를 띠며 지난 일들을 생각했다.
‘드디어 키제프에게 내 비밀을 말했어.’
다른 사람에게 크리스털 페어리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벌을 받는 것처럼 두려웠는데.
털어놓고 나니 이토록 홀가분하다니 신기했다.
마력으로 인한 몸의 피로함도 덜했다.
지난번에는 며칠 동안 깨어나지 못해서 모두가 걱정하고, 마탑의 치유 마법사까지 불려 왔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가 마님, 푹 주무셨어요? 키제프 도련님께서 깨어날 때까지 깨우지 말라고 하셨어요. 다른 어른들께도 알리지 않았고요.”
베시가 조용히 루시엘에게 다가왔다.
‘아, 키제프가 말해 뒀구나.’
하긴 이번에도 잠든 걸 아셨다가는 또 집안이 난리가 났을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마탑에서 아가 마님을 찾는 마도사가 오셨는데 어떻게 할까요?”
루시엘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오늘은 에리카가 성에 오는 날이었다. 에리카는 일주일에 한 번씩 루시엘의 아기 영지에 와서 보석을 연구하고 있었다.
“들어오라고 전해 줘. 그리고 디저트를 준비해 줘. 아주 달콤한 거로.”
루시엘의 명을 받은 베시가 웃으면서 물러갔다. 에리카와 만난 루시엘은 일을 의논하기 전에 달콤한 디저트 타임부터 가졌다.
알록달록한 머랭 쿠키와 블루베리가 올라간 생크림 타르트, 초콜릿 휘낭시에, 상큼한 오렌지 셔벗까지.
“세상에, 오늘 제 생일은 아니겠죠? 루시엘 님 덕분에 제가 호강하네요.”
에리카가 행복하게 먹는 모습을 보자 루시엘도 덩달아 즐거워졌다.
슬슬 배도 부르겠다, 루시엘은 슬쩍 에리카에게 말했다.
“다음 연구는 바로 가능하겠어요?”
“네, 마력 측정 도구도 마련되었으니까 이제 본격적으로 연구에 집중할 수 있을 거예요.”
루시엘이 주머니 하나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에리카 쪽으로 밀었다.
다음으로 연구를 부탁할 세 가지 보석들이었다. 루비, 사파이어, 토파즈.
“예쁘네요. 여기엔 또 어떤 힘들이 숨겨져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돼요!”
흥분한 에리카의 목소리에 루시엘이 쉿, 하고 소릴 낮추게 했다.
에리카가 알았다며 제 입술에 손을 댔다. 루시엘은 작게 말했다.
“그럼 연구소 건물로 가셔서 편하게 연구를 진행해 주세요. 연구 공간에 부족한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고요.”
“알겠어요, 루시엘 님. 틀어박혀서 연구만 하는 거 제 특기이니까 걱정 마세요.”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말아요. 에리카가 아프면 남은 연구가 더 미뤄질 테니까, 건강 관리도 잘해야 해요. 배고프면 식당에 가서 꼭 챙겨 먹어요. 세스 주방장에게 특별히 말해 놓을게요.”
“명심하겠습니다!”
공작가의 주방장의 특별한 요리라니, 침을 꼴깍 삼키면서 에리카가 힘차게 대답했다.
루시엘은 이제 마법 수업을 위해, 길리아트 할아버지에게 가 볼 참이었다.
한 가지 물어볼 것도 있었다.
보석에 원소의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가능하면 자신의 지팡이에 활용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속성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이 지팡이를 만든 제작자라면 보석의 힘이 온전히 깃들 방법을 알지 않을까?
루시엘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길리아트의 서재에 다다랐을 때였다.
“여어, 루시엘.”
에레스가 반갑게 손을 흔들자, 시커먼 옷을 입은 소년이 질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루시엘 자리는 여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