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뭐야. 내 얼굴 모르지는 않잖아.”
“그래도 우울할 때 초콜릿을 먹는 것처럼, 널 보면 기분이 나아질까 했지.”
초콜릿은 먹지도 않으면서 키제프는 그렇게 루시엘 앞에서 술술 변명을 만들고 있는 자신이 낯설었다.
키제프가 씁쓸하게 웃으며 루시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키제프? 무슨 일 있었어?”
루시엘은 왠지 마음이 짠해졌다. 늘 강해 보이기만 하던 그가 오늘은 왜 이렇게 연약한 모습일까?
“……그냥 오랜만에 나쁜 기억이 떠올랐어.”
시선을 떨어뜨린 키제프가 루시엘 앞에 있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굳이 묻지 않고 루시엘은 묵묵히 들어 주었다. 곧 키제프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나 사용인들이 시중드는 걸 싫어해.”
“아…… 응. 들었어.”
키제프는 시중드는 것을 꺼려 해서 곁에서 보필하는 사용인을 최소로 두고 있다는 걸 루시엘도 알고 있었다.
‘혹시 베시나 로즈와 무슨 마찰이라도 있었던 걸까?’
루시엘은 가만히 듣기로 했다.
키제프는 다시 어두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 유령을 본 적이 있어. 나를 키워 주었던 죽은 유모가 나를 만지는데 그 손길이 끔찍하게 차가웠어. 목소리는 축축했고, 모습은 기괴하고 끔찍했지.”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일이었다. 루시엘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래서 그렇게 사용인들의 시중을 꺼렸구나. 그에게 항상 어딘가 모를 어둠이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일까.
“……처음으로 의사에게 털어놓았는데 그는 내 정신에 문제가 있다고 부모님께 보고했어. 내 말을 믿어 줄 사람이 없다는 게 더 무서웠지. 이대로 영영 혼자가 될까 봐. 그래서 후부턴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을까.
키제프의 고백에 루시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신에 그에게 다가가 꼭 안아 주었다.
하지만 키제프의 너른 품에 루시엘이 안기는 꼴이었다.
작은 솜뭉치 인형 같은 아이가 제게 주는 위로가 따듯해 키제프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건 의사가 정말 나빴어. 벨슈타인 가족들이 그럴 분들이 아니잖아. 키제프의 말을 믿어 주었을 텐데.”
어느새 루시엘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였다.
“……알아. 하지만 그때의 나는 판단력이 부족했어. 그리고 나중에는 그냥 혼자 감당하는 게 더 편해졌고.”
“……바보구나. 왜 그렇게 착했어?”
키제프는 루시엘이 내어 준 아늑한 품에 안도하며, 눈을 감고 아이의 은발에 그대로 코를 박았다.
시작은 벨슈타인을 지키기 위한 계약 결혼이었을 뿐인데. 굳고 단단하게 쳐 둔 벽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것 같았다.
오직 루시엘 앞에서만.
무해한 얼굴로 순식간에 사람을 무방비하게 만들어 버리는 마법 같은 아이였다.
향긋하고 달콤한 향기에 어지러웠다. 단 걸 싫어하는데도 루시엘에게서 나는 달콤한 체향은 이상하게 싫지 않다.
아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 그저 이대로 가만히 잠들고만 싶었다.
키제프가 그렇게 잠시 평온을 느끼는 동안, 루시엘이 코를 훌쩍훌쩍했다. 작은 어깨가 파르르 떨려 키제프가 도리어 도닥였다.
“괜찮아. 이제는 안 보여. 그러니까 울지 마.”
그런데 루시엘의 분홍 눈동자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순간.
그녀의 심장 가까운 허공에 푸른색의 무언가가 반짝 맺히면서 툭 떨어졌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이건…… 푸른빛을 띠는 보석이었다.
루시엘이 만들어 낸 사파이어를 키제프가 손에 쥐었다.
그의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너, 방금.”
울어서 잔뜩 빨개진 코와 눈이 토끼가 따로 없었다. 루시엘은 울음에 가로막혀 채 나오지 않는 목소리 때문에 끅 하는 이상한 소리만 냈다.
“……이게 내 비밀이야.”
키제프는 믿을 수가 없다는 듯, 눈만 몇 번 끔벅였다.
“정말 네가 만들어 냈다고? 이걸?”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루시엘은 눈물을 훔치고 겨우 입술을 달싹였다.
“크리스털 페어리. 나는 강한 감정으로 보석을 만드는 요정의 핏줄이야.”
“잠깐…… 그래서 눈이 그렇게 빛났던 건가?”
“응.”
루시엘이 고갤 주억거렸다. 그리고 오랫동안 묻어 놓았던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꺼냈다.
“보석안은 요정의 증거니까. 우리 언니도 보석안을 가졌어. 그걸 보고 오르비아 백작은 나와 언니를 샀대. 보석을 만드는 노예를 만들기 위해서였지…….”
“노예라고?”
“가둬 놓고 보석을 강제로 만들게 했으니까.”
“그런 인간 이하의 짓을 했다고? ……역겨워.”
“언니가 죽고 나에게도 손을 뻗쳐서 도망 나온 거야.”
“…….”
점점 뻣뻣하게 굳어 가던 그는 한계를 느꼈다.
뿌드득.
키제프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무섭도록 차가운 눈을 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가 핑핑 돌아가는 게 느껴졌다. 일순 살기마저 느껴질 만큼 압도적인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소름이 끼칠 것 같은 강한 마력에 루시엘이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키제프?”
키제프가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루시엘. 오르비아 백작은 어디 있지?”
“……아마 수도에 있을 거야.”
키제프가 품 안에 있던 루시엘을 고이 풀어 주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정말 악마의 것처럼 강렬한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자는 내 손으로 처리하지.”
“잠깐만, 키제프. 제발 진정해.”
“당장 죽여 버리겠어. 내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야.”
“……그러지 마. 키제프.”
루시엘이 고개를 저으며 키제프의 허리를 뒤에서 폭 끌어안았다.
폭주하듯 길길이 날뛰던 키제프가 그제야 루시엘을 돌아보았다.
“왜지? 넌 복수하고 싶지 않아?”
“할 거야. 내 손으로 직접 그를 죽일 거야. 그래서 마법을 배우고 있는걸.”
“네 손에 더러운 피를 묻힐 가치도, 더 살려 둘 가치도 없는 자야. 루시엘.”
루시엘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짧은 이야기만을 듣고도 이렇게 제 일에 분노해 주다니, 루시엘은 기뻤다.
‘키제프는 상냥하구나.’
“고마워.”
“응? 갑자기 무슨.”
“이렇게 화내 주잖아. 그래서 나 너무 기뻐.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여태 없었어. 나도 키제프처럼 늘 혼자였어.”
루시엘의 말에 화가 가라앉은 키제프의 손길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그 순간 루시엘의 마나가 일렁거렸다. 키제프도 이번만큼은 그 거대한 마나에 놀라 일순 숨을 삼켰다.
또롱, 또로롱!
기쁨, 행복, 슬픔, 감동…….
루시엘은 색색의 보석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번 생에서는 처음이었다.
누군가의 앞에서 숨기지 않고 실컷 보석을 만들었다.
자유롭게.
보석들이 촤르륵 쏟아졌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키제프는 눈앞에 펼쳐지는 이 광경을 보고도 꿈같았다.
“아름답다.”
내내 날카롭던 키제프의 눈이 이제야 풀려 예쁘게 휘어졌다. 흐드러진 그의 금발이야말로 토파즈보다 수십 배는 더 찬란하게 빛났다. 아름다웠다.
루시엘도 마찬가지였다.
“보석 싫어한다는 거 유효해?”
“어. 보석 만드는 여자앤 좋아질 것 같지만.”
키제프의 말이 폭신폭신한 생크림 케이크처럼 부드럽게 귓가에 감겼다.
“그, 그것도 안 되는데. 크리스털 페어리라서 좋아하면…….”
발그레해진 분홍빛 뺨을 어루만지며 키제프가 말했다.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루시엘이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바보야. 잘 알아 둬.”
“…….”
“보석이든 꽃이든, 네가 뭘 만드는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아.”
“그럼?”
“바보 토끼에다 달콤한 걸 좋아하고, 이상한 편지나 보내던 아이라는 게 중요하지.”
키제프가 루시엘의 이마에 머리를 콩 하고 살짝 부딪쳤다.
“……그게 뭐야.”
“뭐긴 뭐야, 루시엘 너지.”
“…….”
“이젠 달아날 생각하지 마. 내 눈에서 벗어나면 결혼반지 타고 쫓아갈 거니까.”
루시엘의 손등에 키제프의 입술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루시엘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키제프가 쿡쿡 장난스럽게 웃으며 입매를 올렸다. 야살스러운 미소, 진해진 눈빛에 꼼짝달싹 못 할 것만 같았다.
“…….”
“대답이 없군?”
“몰라.”
“그동안 비밀 숨기려고 나 피하려던 거잖아. 이제 그럴 필요 없어.”
키제프가 픽 웃었고, 루시엘은 놀랄 만큼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파아앗.
또로롱!
루시엘이 설렘으로 만들어 낸 보석은 분홍색의 맑고 투명한 보석, 스피넬이었다.
“예쁘네. 네 눈처럼.”
“…….”
루시엘은 분홍색 스피넬을 줄줄이 만들어 냈다.
“이건 어떤 감정으로 만들어 낸 거야?”
“몰라도 돼.”
루시엘이 병아리처럼 소리 질렀다.
“그 말은 지금 나 때문에 어떤 감정을 느꼈다는 건가?”
키제프가 흥미롭다는 눈으로 턱을 매만지며 루시엘을 내려다보았다. 루시엘은 발가벗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거 하나하나 해석하지 마!”
루시엘이 발끈하며 얼굴을 붉혔다.
“창피하잖아. 너무해.”
“미안. 이제 안 괴롭힐게.”
이렇게 투명한 반응을 보여 주니까 재밌었지만 여기서 더 하면 루시엘을 정말 울려 버릴 것 같았다.
분명한 건 둘 사이의 공기가 조금 달라진 느낌. 말랑말랑해졌달까.
‘레이븐에게도 결국 밝혀야겠지.’
요즘 키제프가 그를 억눌러 놓았지만, 이제 한계에 다다랐을지도 몰랐다.
그놈이 튀어나오기 전에 루시엘에게도 말해 두어야 하는데. 놀라지 않도록.
루시엘에게 사신의 이야기까지 밝히려고, 키제프가 다시 입술을 열 때였다.
자그맣고 하얀 손이 키제프의 손을 톡톡 건드렸다.
“키제프, 나 이것 정리하는 것 좀 도와줄래?”
에메랄드, 사파이어, 토파즈, 페리도트, 그리고 분홍색의 새로운 보석 스피넬까지. 보석으로 가득해진 실내 바닥이 반짝거렸다.
“종류별로 정리하면 되나?”
“응.”
“나한테 맡겨.”
그렇게 말한 키제프가 마법을 사용했다.
“플라이(F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