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88)화 (88/282)

<88화>

“아가 마님. 오랜만이에요.”

“약초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어요. 전부 선생님이 잘 돌봐 준 덕분이에요.”

“별말씀을요. 아가 마님 덕분이지요. 근데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가요?”

루시엘의 안색이 어두운 걸 눈치챈 시클라인이 물었다.

“제가 예전에 한 가지 부탁이 있다고 말씀드린 거 기억하세요?”

“그럼요.”

“제 화단에 있는 타테아 잎과 루가 나무 뿌리, 그리고 티에리 열매를 배합하면 마나 영양에 좋은 약이 될 거예요.”

타테아는 감기, 몸살. 루가 나뭇잎은 염증, 통증 완화. 키에리 열매는 해열에 좋았다. 따로 활용하면 평범한 약을 만들 수 있었지만 세 가지를 전부 합쳐 만들면 마나의 영양에도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과거 시클라인 레니트가 깨달았던 터였다.

“……! 생각하지 못했던 조합이네요!”

“그 약을 개발해 달라는 부탁을 드리려고 했어요. 적당한 비율과 약초를 다루는 방법 같은 건 선생님이 직접 찾으셔야 하니, 조금 어려울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저는 약제사도 아니고…….”

시클라인의 손을 꼭 붙잡은 루시엘이 말했다.

“지난번에 레오니를 위해서 만든 감기약도 훌륭했잖아요.”

“……맞아요, 그랬지요. 하지만 감기약은 간단했으니까요.”

“저뿐 아니라 다른 시녀들도 시클라인의 약이 효과가 뛰어나다고 인정했어요. 시클라인 선생님의 실력과 열정은 잘 알고 있으니까 부탁드리는 거예요.”

“……저, 정말인가요?”

뿌듯한 얼굴로 시클라인이 묻자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니 조금만 더 생각해 봐요.”

“네.”

루시엘은 우선 시클라인이 부담을 가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말했다.

하지만 그녀라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아픈 사람을 돕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말이다.

이미 기사단 내에서 시클라인의 파스는 인기가 높다고 랄프에게 들었다. 루시엘은 넌지시 그녀에게 말했다.

“선생님, 제 호위 기사가 그러는데 선생님이 만든 파스가 아주 인기가 높다고 하던데요?”

“네? 아아, 기사 한 분이 시원하니 한 장 더 달라고 찾아오신 적은 있는데…….”

“그것 봐요. 그때 기분이 어땠어요?”

루시엘이 방긋 웃으면서 쿡 찔러보았다.

시클라인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차올랐다.

“기뻤어요. 제가 만든 파스가 효과가 좋다는 걸 증명받았으니까요.”

‘마나 영양제를 완성시키면 모두가 좋아할 거예요. 물론 제가 가장 좋아할 테지만.’

루시엘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곤 시클라인에게 더욱 용기를 불어넣기로 했다.

“영지민들에게 비상약과 파스를 만들어서 나누어 주는 건 어떨까요? 재료비와 인건비는 제가 부담하도록 할게요. 약제사로 가는 첫발이라 생각하고 해 보는 거예요.”

“……좋은 생각이에요. 저 해 볼게요! 우선 감기약이나 상처약, 소화제, 파스 같은 것들을 만들어야겠어요.”

시클라인이 다짐하면서 씩씩하게 소매를 걷어붙였다.

“아, 선생님! 티에리가 열매를 맺으려면 한참 걸릴 것 같은데 혹시 성장을 앞당길 방법이 있을까요?”

“식물에도 궁합이 있어서 어떤 식물과 두면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서 더욱 성숙하게 잘 자랄 수 있어요! 티에리는 제가 키우는 허브와 궁합이 좋아요. 제가 여기 곧 옮겨 심을게요.”

“네, 부탁해요.”

“영지로 가는 건 그럼…….”

“약 만들 시간도 필요할 테니까 다 만들면 알려 주세요.”

“알겠어요. 늦었지만 결혼 축하드려요. 이렇게 귀여운 신부라니, 공자님이 부러워지는걸요.”

시클라인의 칭찬에 루시엘은 어색하게 웃었다.

* * *

연무장에서 검술 훈련을 마친 키제프는 마법 수련을 하기 전 시간이 비는 동안 쉬기 위해 별궁으로 돌아왔다.

일 층 응접실과 테라스, 루시엘의 침실과 서재까지 살펴보았지만 역시 비어 있었다.

루시엘이 없으니 별궁이 더욱 커다랗고 고요하기만 했다.

키제프는 응접실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루시엘은 하루도 쉬지 않는 건가.’

하긴 그 아이는 늘 바빴다.

그래도 지난번 말해 두어서인지 이제 루시엘은 아침마다 행선지를 꼭 알려 주었다.

오늘은 멀리 안 가. 공작성 안에 있을 거야. 중요한 손님이 방문하기로 했거든.’

“중요한 손님이라니 누구지?”

차마 누구를 만나는 것까진 물어보지 못했다.

그 아이가 없자 찾아보고 실망하기까지 하는 스스로에게 좀 놀라고 있었다.

‘……심각한데.’

키제프는 과거 트라우마와 레이븐의 일 때문에라도, 누군가 곁에 있는 것을 싫어하고 혼자 있는 것을 선호하던 터였다.

문득 가족들이 했던 알 수 없는 말이 떠올라서였다.

‘루시엘, 그 아이는 정말 특별한 아이란다.’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어머니도 모두 같은 말을 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기도 해.’

불의 제단에서도 순수한 마나를 가진 루시엘만이 성배를 들고, 피닉스를 만날 수 있었다. 확실히 평범한 아이는 아니었다.

자신도 결코 평범하지 않지만…….

“도련님, 필요한 것이라도 있으신가요?”

응접실의 테이블을 정돈한 후, 베시가 물었다. 키제프는 상념을 떨치며 대답했다.

“아니.”

“어머나, 도련님. 셔츠의 단추가 떨어졌네요. 이리 주시면 제가 금방…….”

베시가 다가가려다가 자신이 실수한 것을 깨닫고는 얼른 걸음을 멈추고 손을 내렸다.

그녀의 행동을 본 키제프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아…… 죄송합니다.”

“됐으니 가서 쉬도록 해.”

“네.”

베시는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냉큼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키제프는 예전부터 사용인들 사이에서는 모시기 어려운 도련님으로 통했다.

레오니가 고집불통이기 때문이었다면, 그는 다른 의미에서였다.

공작을 꼭 빼닮은 서늘함은 물론이고, 사용인들의 손이 닿는 것을 꺼려 하던 습관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었다.

키제프는 눈을 감고는 그 부위를 꾹 눌렀다. 너무 예민하게 굴었나 싶기도 했다.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건가…….’

친구의 죽음으로 시작된 유령을 보는 눈.

어린 나이에 경험하게 된 죽은 자들의 세계는 실로 끔찍했다.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 어디에서든 튀어나왔고, 유령이 몸을 통과할 때 느끼는 섬뜩한 감각은 아직도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우리 예쁜 도련님. 이리 오세요. 유모가 재워 줄게요.’

키제프를 키워 주었던 유모 에밀리아의 유령이었다.

오래전 병으로 죽은 에밀리아가 매일 밤 나타나 차가운 손길을 뻗쳐 왔을 때 어린 키제프는 무서워 그저 달아났다.

그때부터였다. 사용인들의 접촉을 꺼리게 되었던 건.

한때는 친근하게 따르던 존재가 무서운 유령이 되어 괴롭히는 건 지독한 악몽 같은 일이었다.

키제프는 머리를 흔들었다.

‘다 지나간 일이야.’

차라리 몸이라도 움직이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키제프는 별궁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루시엘과는 화기애애하게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던 사용인들이 키제프에게는 잠잠했다.

혹여나 예민한 도련님의 심기를 거스를까 모두 조심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제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결혼반지를 바라보았다.

길리아트 할아버지가 주신 이 반지는 서로 떨어져 있을 때, 상대에게 이동시켜 주는 반지였다.

“……반지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는지만 확인해 볼까?”

우뚝 걸음을 멈추고 중얼거린 키제프가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다음, 반지에 박힌 보석을 슥슥 문질렀다.

반짝이는 빛과 함께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이 들어 눈을 감았다가 한쪽 눈부터 살짝 떴다.

환한 은발의 소녀가 골똘히 머리를 굴리는 뒷모습.

눈앞에는 정말 루시엘이 있었다.

키제프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잔미소를 지었다.

“안녕.”

“꺄악!”

댕그래진 진홍색 눈동자가 키제프를 보자마자 자그만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소릴 질렀다.

“……뭐,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키제프는 손가락의 반지를 슥 보여 주었다.

“이거 진짜 되나 궁금해서.”

“…….”

멋쩍은 얼굴로 키제프가 웃어 보였다. 그러나 루시엘은 전혀 표정 관리가 되고 있지 않았다.

“키제프가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말도 안 하고 오면 어떡해?”

“……으음?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말해? 그보다 내가 너무 곤란하게 만들었나?”

“…….”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맞는 모양이었다. 키제프는 미안해졌다.

“방해해서 미안.”

그러고 보니 여기가 어디지?

그제야 주변을 느릿하게 관찰한 키제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시엘, 여기가 어디야?”

“……여긴 내 영지 별장이야.”

루시엘은 이 반지의 존재를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설마하니 키제프가 자신을 찾아올 줄은 더더욱 예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도대체 왜?’

루시엘은 머리 위에 물음표를 둥실 떠올렸지만 알 수가 없었다.

반지의 이동 마법을 시험해 보겠다는 말을 이미 들은 터라, 도대체 왜 왔냐고 할 수도 없고.

하지만 다른 진짜 이유가 따로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정말로 날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요즘 들어 부쩍 키제프는 루시엘의 행보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서 어디 갈 거라고 아침마다 이야기도 해 주는데.

“아, 아버지께 받은 영지가 여기였군.”

“응.”

루시엘의 석연찮은 대답에 키제프가 슬쩍 조심스레 물었다.

“……내가 뭔가 방해한 건가?”

‘그래, 완전! 여긴 나만의 아지트였단 말이야. 흑흑.’

루시엘은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니야. 그냥 생각에 좀 잠겨 있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놀랐어.”

키제프에게는 속마음을 솔직히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보석을 만들고 있을 때 나타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루시엘은 그를 힐끔 올려다보며 물었다.

“근데 진짜 반지 시험해 보려고 온 거야?”

그러자 키제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두워진 핏빛 눈이 루시엘을 향하며, 붉은 입술이 호를 그렸다.

열세 살짜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유혹적인 미모였다.

“그냥 네가 없으니 안심이 안 되어서.”

“……으응? 그치만 아침에도 봤는걸. 걱정 안 해도 돼.”

“이제 정식 부부이니 얼굴을 충분히 익혀 두는 게 좋으니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