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87)화 (87/282)

<87화>

“하지만 저는 스테인드글라스 기법을 전혀 할 줄 모릅니다. 제가 평생 해 온 건 아버지와 형님께 배운 기술이 전부이니까요. 그리고 그것이 제가 가장 잘하는 것이라 포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빈센트 형님의 몫까지 제가 해야 한다는 생각에…….”

루시엘의 단풍잎 같은 손이 막스의 등을 토닥였다.

“알아요. 하지만 장담하건대 당신이 스테인드글라스로 유리공예품을 만들면, 엄청난 성장을 하게 될 거예요. 저는 당신을 믿어요.”

루시엘이 빙그레 웃었다.

생각해 보면 사실 과거에 그가 만들었던 유리관에 덧입혀진 색색의 유리들도 스테인드글라스는 아니었지만, 일부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모두의 눈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공예품이었으니, 그가 스테인드글라스에 대해 제대로 배운다면 어떨까.

루시엘은 벌써부터 그가 탄생시킬 유리공예품이 기대가 되었다.

“하멜가가 평생 고수해 온 전통 유리공예 기술을 포기하라는 뜻은 절대로 아니에요. 막스 씨 자신의 한계를 딛고 발전시켜 보자는 거죠. 그렇게 되면 황후 폐하의 마음을, 아니 제국민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을 걸작이 태어날지 몰라요.”

루시엘의 말을 듣는 동안 막스는 이미 마음이 움직였는지, 굳은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도전, 해 보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기존 유리 공방은 그대로 두고, 스테인드글라스를 배울 시간을 천천히 갖도록 해요.”

“아…… 하지만 시일이 좀 걸릴지 모릅니다.”

“상관없어요. 몇 달, 어쩌면 몇 년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해내는 게 중요하니까요.”

미래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의 시간 투자는 가능할 것이다. 그래도 가능한 한 빠른 게 좋겠지. 막스에게는 당장 생계가 달린 문제이니까.

막스 역시 빠르게 실행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럼 저는 가장 먼저 기술을 배울 건축가부터 알아보아야겠습니다.”

“좋아요. 저도 한번 알아볼게요.”

루시엘은 엘링턴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멀찍이 떨어져 성당 의자에 앉아 있던 그가 일어서서 다가왔다.

“이야기는 다 끝나신 모양입니다. 아가 마님.”

“네. 막스 씨가 스테인드글라스를 배우기로 했어요.”

“아…… 결국 설득해 내셨군요?”

“루시엘 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꼭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는 막스를 보며, 엘링턴이 환히 웃었다. 아가 마님은 가만 보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도가 튼 분이었다.

두 사람의 대견해하는 시선에 낯이 간지러워진 루시엘이 물었다.

“엘링턴. 혹시 스테인드글라스 쪽으로 유명한 건축가나 그걸 배울 만한 곳이 있을까요?”

“피로연 초청 명단에 유명 건축가가 있으니, 공작성에 방문할 겁니다. 그때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사실 공작 각하께서도 꽤 신경 쓰고 계신 상단에 소속된 자이기도 합니다.”

“신경 쓰고 계신 상단이라고요?”

“그동안 벨슈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까요.”

“어느 상단인가요……?”

“현재 유리 공방을 독점해 버린 발루크 상단입니다.”

엘링턴의 대답에 루시엘도, 막스도 깜짝 놀랐다.

“……앗, 그 발루크 상단이라고요?”

“예.”

전국의 유리공예 사업을 독점해 이브나크의 유리 공방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 바로 발루크 상단이었다.

루시엘이 말했다.

“그러면 우리 경쟁 상대네요. 그 악명 높은 발루크가…… 건축 쪽도 손대고 있었군요.”

“……발루크 상단이라면, 저는 싫습니다. 이브나크를 망하게 한 자들에게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

막스가 바르르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말했다.

잠자코 둘의 이야기를 들은 엘링턴이 싱그레 웃으면서 새로운 사실을 일러주었다.

“그는 발루크 상단의 후원을 받고 상단에서 연결해 준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만, 최근에는 상단주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돌고 있기도 합니다.”

루시엘이 막스의 분노를 덜어 주기 위해, 한번 짚어 주었다.

“아! 그냥 자금만 후원받고 있을 뿐이군요. 언제든지 바뀔 수 있고요.”

“그렇습니다.”

그런 관계라면 상관없을 것 같았다. 문제는 그가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였다.

“그를 추천하는 이유가 따로 있나요?”

엘링턴이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응시하며 말했다.

“지금 이 성당을 건축한 사람이 바로 그입니다. 갈리우스. 그라면 두 분에게 반드시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엘링턴의 말을 들은 루시엘과 막스는 같은 답을 내놓았다.

“좋아요. 연결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예, 그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럼 이제 슬슬 귀환할까요. 막스 씨는 우선 이브나크로 돌아가 연락을 기다려 주세요.”

엘링턴과 막스를 번갈아 보며 루시엘이 말했다. 그러나 막스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예, 오늘 이곳에 데려와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저는 조금만 더 스테인드글라스를 감상하다가 돌아가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정말 깊은 감명을 받은 모양인지, 막스의 눈이 한층 빛나고 있었다. 그는 작은 노트를 펼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보며, 스케치를 슥슥 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강력한 영감을 받은 사람처럼.

“엘링턴, 우리는 먼저 가요.”

“예, 저도 이만 공작 각하께 가 보아야겠습니다.”

“네, 공작님을 보좌하는 일만으로도 바쁠 텐데, 요즘 제가 너무 시간을 빼앗았죠?”

루시엘이 걱정스레 묻자 엘링턴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말했다.

“아닙니다. 각하를 도와드릴 새로운 보좌관 팀을 꾸렸습니다. 무엇보다 루시엘 아가 마님을 잘 보필해 드리는 것이, 저의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이니까요.”

엘링턴이 눈을 곱게 휘었다. 그건 빈말이 아니었다.

‘네 일을 대신할 인력은 많으니까, 루시엘의 일을 보좌하면서 그 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두고 움직이도록.’

이미 주군에게 그런 명령을 받았다.

아마 아가 마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장 먼저 목이 달아나는 것은 자신이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주군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엘링턴은 루시엘을 기꺼이 도울 것이다. 아가 마님에게 사람을 이끄는 힘이 있다는 건 확실했다.

그건 어찌 보면 무력이나 마력, 카리스마보다도 더 강한 무기가 될지도 몰랐다.

귀환한 엘링턴에게 빠짐없이 보고를 들은 공작은 느른한 자세를 점점 고쳐 앉았다.

건축 기법을 유리공예에 도입하다니, 놀라운 발상이었다.

“……정말 전례 없는 작품이 탄생할지 모르겠군.”

대체 루시엘 그 아이는 이 유리공예 하나로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는 건지 궁금해졌던 터였다.

그리고 루시엘의 다음 행보도 기다려졌다.

건축가 갈리우스는 공작도 잘 아는 자였는데, 깐깐하고 성질머리가 고약해 자신의 건축 기술을 나누지 않을 위인이었다.

오죽하면 세간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갈리우스의 건축물은 사랑받지만, 그는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고 말이다.

“근데 엘링턴, 갈리우스를 연결해 주겠다니, 가능한 일인가? 아니면 우리 새아가에게 시련을 주려고 그러나?”

“음…… 저는 그렇게 성격 나쁘지 않습니다. 각하.”

“……그 말은 누구는 성격 나쁘다는 거로 들리는데.”

“……각하, 저는 대상을 지칭하지 않았습니다.”

엘링턴이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선량하게 웃었다.

“저는 그저 아가 마님이 가진 힘을 믿을 뿐입니다. 사람을 이끄는 힘 말입니다.”

“……자네까지 그걸 알면 곤란한데.”

공작이 못마땅하다는 듯 서늘한 눈초리로 짐짓 중얼거렸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밖에서 재무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엘링턴이 냉큼 꾸벅 인사를 올린 다음 빠져나갔다.

* * *

한편 귀환한 루시엘은 아기 영지로 가기 전에 온실 정원에 들렀다.

어느새 쌉싸름한 약초 향기가 아주 가득히 퍼졌다.

“와, 여름이 되니까 정말 무성하게 자랐구나.”

루시엘은 약초들을 매만지며 반가운 소리를 들었다.

마치 오랜만에 만나서 좋은 듯, 애교 가득한 식물들의 소리에 루시엘은 웃으면서 물을 주었다.

처음엔 씨앗이었던 타테아가 푸릇한 빛깔을 띠는 잎이 잔뜩 나고, 줄기도 루시엘의 팔뚝 길이만큼 커졌다.

루가 나무도 제법 줄기가 두꺼워졌다.

이 두 가지는 잘 자라서 마나 영양제의 재료로 문제가 없었는데, 한 가지 티에리가 문제였다.

티에리는 잎이나 줄기, 뿌리가 아닌 그 열매를 써야 한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루시엘이 턱을 괸 채 티에리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정말 너무한 것 아니니? 그동안 날 잊은 것이야?

뾰로통한 목소리로 다 말라 가는 피닉스의 장미가 몸을 흔들며 말을 걸었다.

“앗, 피닉스님. 죄송해요……. 그간 바빠서 마나를 드리지 못했어요.”

마른 줄기에 꽃잎이 누렇게 변해 가는 장미의 애처로운 모습에 루시엘은 울상을 지었다.

―틀렸어. 이제 부활하기는 다 틀렸단 말이다.

다 틀렸다는 피닉스의 말에 루시엘은 깜짝 놀라 털썩 주저앉으며 되물었다.

“정말요? 그럼 영영 깨어나지 못하게 되는 거예요? 그럼 이제 제 마나를 드려도 소용이 없어요?”

―크흠,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대로 네가 나를 돌봐 주지 않고 방치한다면 그리되겠지.

피닉스가 가련하게 꽃잎 하나를 똑 떨어뜨렸다. 루시엘이 무언가 결심한 듯 말했다.

“앞으로는 안 빼먹고 마나 드릴게요.”

―좋아. 이번 한 번은 넘어가 주마. 엣헴.

루시엘이 장미 줄기에 대고 마나를 흘려 주자,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장미는 싱그럽게 다시 활짝 피어올랐다.

피닉스에게 많은 양의 마나를 나누어 준 탓일까. 호흡이 살짝 가빠 왔다.

아직까지는 괜찮지만 훗날을 위해서 마나 영양제를 미리 먹어 두어야 하는데.

어머님의 희귀병 마나리스도 마나와 연관된 병이었으니 만들어서 드리면 도움이 될 터였다.

루시엘이 걱정 어린 얼굴을 하고 있는데, 때마침 하얀 가운을 입은 시클라인이 온실 정원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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