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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86)화 (86/282)

<86화>

루시엘은 다음 순간 흔들림 없이 매직 애로우를 날렸다. 그러자 아르제온이 가볍게 손을 들어 실드 마법으로 막았다.

그가 한 걸음 다가오자 루시엘이 소환한 지팡이로 그의 목을 겨누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오지 마.”

“……싸울 생각 없으니 그거부터 내려놔라, 아가야.”

아르제온이 챠르르 쏟아지는 긴 머리칼을 넘기며 루시엘에게 말했다.

“그걸 어떻게 믿어? 내가 누군지도 알고 있잖아.”

“……네 정체를 알고 있었던 건 너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다.”

“처음부터 내 정체를 알고, 곁에 있으려고 했던 거야?”

루시엘은 눈사슴이 유독 자신을 잘 따랐던 것을 떠올렸다. 그게 전부 의도된 일이었을까?

“노여움을 풀고 진정 좀 해 보아라. 네 보석을 욕심내지 않을 테니까.”

아르제온이 한층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지만 루시엘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전생에 루시엘의 정체를 아는 자들은 어떤 짓을 벌였나. 끔찍한 기억이 다시금 루시엘의 눈동자에 분노를 서리게 만들었다.

“내 힘을 알았던 모든 자는 나를 착취하고 억압했어. 그런데 내가 처음 본 당신을 믿을 수 있을까?”

“……나는 그저 봉인된 나의 힘을 풀고 싶을 뿐이야. 오직 순수한 마력으로 풀 수 있다고 했다.”

“그 힘이 풀리고 나를 공격하면?”

“……좋다. 그렇게 나를 정 믿지 못하겠다면 이걸 주지.”

아르제온이 은빛 팔찌를 건넸다. 자신의 팔에도 같은 것이 채워져 있었다.

“이 팔찌를 차고 있으면, 나는 너를 공격할 수 없어.”

루시엘이 아직도 믿을 수 없는 눈을 하고 있자, 팔찌를 채워 준 아르제온이 루시엘을 때리려고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팔찌가 붉게 빛나더니, 그가 쿵 하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윽.”

아르제온이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고 루시엘도 움찔 놀랐다.

“뭐, 뭐야. 당신…… 괜찮아?”

겨우 바닥을 짚으면서 일어선 아르제온이 손을 들어 보였다.

“괜찮다. 이제 나를 믿어 주겠느냐?”

팔찌의 효과를 확인한 루시엘이 그제야 아르제온을 믿어 주었다.

“과거 마탑주였을 정도로 강한 당신이 어쩌다가 힘이 봉인된 거야? 누구에게?”

“이야기하자면 길다. 내 봉인의 힘을 풀어 주면 이야기해 주지.”

“…….”

루시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보다 지금은 다른 것이 더 중요했다.

“보석의 힘을 측정하는 도구를 구매하려면 당신의 승인이 필요하다고 들었어.”

“그건 어렵지 않다. 대신에 내 봉인 풀어 주는 것이다?”

“좋아. 하지만 그 일정은 좀 뒤로 미루어야 해.”

“알았다. 마탑 남부 지부에 있는 승인 기구에 먼저 다녀오도록 하지.”

“……아니, 승인만 해 주고 여긴 이제 안 와도 될 거 같은데.”

“네 마력이 필요하기도 하고, 난 여기가 마음에 들거든.”

그가 싱그레 미소 지었다.

“저기…… 내 영지인데. 그러면 공작가의 다른 어른에게도 알릴…….”

루시엘의 말을 듣던 아르제온이 고개를 저었다.

“길리아트가 알게 되면 곤란하다.”

“……으잉?”

“내게 다시 마탑주를 넘겨줄 거다.”

“……다들 하기 싫어하는 자리였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여기서 먹고 자고 노는 게 최고더군. 그동안 너무 열심히 살았어. 당분간 힘을 찾을 때까지는 푹 쉴 거다.”

루시엘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얼마 후 마탑 남부 지부에 아르제온이 출몰해, 그동안 밀려 있던 승인 요청 건들을 모두 처리하고 귀신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그 소식은 북부 마탑을 통해 길리아트에게까지 들려왔다.

“아르제온 그놈은 아무래도 나와의 결투에서 일부러 패하고 사라진 게 틀림없다.”

“…….”

할아버지가 분개하는 목소리를 들은 루시엘은 매우 뜨끔했다.

그로 인해 루시엘의 아기 영지에는 별장 옆에 연구소로 사용될 건물이 새로 세워졌고 그곳에 여러 가지 측정 도구가 마련되는 등 연구 환경이 갖춰졌다.

루시엘은 연구소 건물을 에리카에게 구경시켜 주었다.

“루시엘 님. 그런데 정말 운이 좋으세요. 그동안 행방불명되었던 아르제온 님이 나타나 승인 건을 몽땅 처리하고 돌아가셨으니 말이에요!”

“그, 그러게요. 운이 좋았어요.”

루시엘은 조용히 뒤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아르제온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 * *

하멜 공방에서 이번에는 맑고 투명한 유리그릇을 보내 왔다. 그러나 루시엘은 아직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릇 말고는 무언가 없을까?”

루시엘은 파란색 유리병을 들어 빛에 비춰 보았다. 그러자 어둡고 칙칙하던 파란색이 훨씬 더 예뻐 보였다.

‘차라리 햇빛이 드는 곳에 두는 장식품을 만든다면 어떨까?’

고민하던 루시엘은 의외의 장소에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얘야, 루시엘. 무슨 고민을 그렇게 골똘히 하니?”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고민이 있을 땐 내게 털어놓으렴.”

“생각할 것이 있어서 그래요.”

루시엘이 작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벨린이 아이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그렇구나. 그럼 여신에게 기도를 드리러 갈까? 인간들은 고민이 있을 때 종종 기도하러 가니까 말이다.”

그렇게 이벨린의 손에 이끌려 간 벨슈타인의 영지에 있는 작은 성당에 들어선 순간 커다란 아치형 창문에 여신의 모습이 성스럽고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었다.

“할머니, 저걸 뭐라고 하죠?”

“스테인드글라스라고 한단다.”

햇빛에 비친 스테인드글라스가 만들어 낸 그림자가 아름다웠다. 루시엘은 그것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이벨린에게 물었다.

“무얼로 만드나요?”

“유리로 만들지.”

“유리요?”

“그렇단다. 성당 창문에 저런 식으로 신을 표현하면 성스럽고 웅장함이 그대로 전해지거든.”

“……그렇구나.”

“저게 다 색이 있는 유리를 조각조각 붙여서 만들었다고 하니 대단하지.”

그 순간 생각의 전환으로 루시엘의 머릿속이 휙휙 휘몰아쳤다. 유리는 빛을 투과하는 성질이 있으니, 스테인드글라스 기법을 공예품으로 활용하면…….

“할머니, 혹시 저렇게 유리를 사용하는 건 건축에서만 쓰이는 건가요?”

“그래, 다른 데서는 본 적이 없구나.”

루시엘은 광명을 찾은 얼굴로 생각했다.

‘그래, 이거야. 스테인드글라스. 저렇게 색색의 유리를 붙여서 만들면, 새로운 디자인으로 황후의 관심을 받을 수 있을 거야.’

벌써부터 어떤 공예품이 탄생할지 기대가 되었다.

“할머니! 정말 고마워요, 저 고민이 해결되었어요.”

“응, 기도도 하기 전에 말이니?”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이벨린을 꼭 끌어안았다.

“죄송하지만 저 갈 데가 있어요!”

“고민이 풀렸다니 다행이구나. 그럼 어서 돌아가자.”

“네!”

마차를 타고 다시 성으로 돌아온 루시엘은 즉시 장서관으로 뛰어갔다. 책을 찾아보니, 정말 건축 기법으로만 쓰이고 있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창문틀에 유리를 접합해 제작하는 건축 기법 중 하나로 성당의 종교화에 많이 쓰인다.」

루시엘은 곧장 엘링턴을 다시 불렀다.

“엘링턴, 보여 줄 게 있어요.”

루시엘은 유리 조각을 창가에 가져가서 세워 놓았다. 햇빛을 통과한 색유리 아래로 아름다운 색의 그림자가 그대로 만들어졌다.

“이것 보세요.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색유리를 빛이 통과하면 그림자도 예쁜 색을 갖게 돼요.”

엘링턴도 눈이 동그래졌다.

“갑자기 스테인드글라스라니요? 성당 창문에 주로 쓰이는 것 말입니까?”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그 스테인드글라스 맞아요.”

부끄럽게도 루시엘은 이제야 알게 되었지만 방금 공부를 하고 왔으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주로 건축물에 사용하는 기술이지만, 이걸로도 충분히 공예품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유리를 조금 더 작고 섬세하게 작업하면 되니까요.”

“아가 마님 의견대로 그게 가능하면 아름다운 예술품이 탄생할지도 모르겠군요. 지금껏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거니까요.”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아가 마님, 지금 제가 당장 유리 공방에 가서 막스 하멜에게 이걸 보여 주면 어떨까요?”

“좋아요. 아니다, 그에게 직접 이걸 보여 주는 게 더 좋겠어요.”

루시엘은 막스 하멜에게 어서 이 아이디어와 영감을 주고 싶었다. 그라면 멋진 작품으로 재탄생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막스 하멜이 제작한 유리관은 그 용도를 제외하면, 정말 아름다운 예술품 그 자체였으니까.

루시엘은 심장이 쿵쿵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

루시엘과 함께 성당을 찾은 막스는 충격에 두 눈을 끔뻑거렸다.

색색의 유리 조각들이 섬세하게 표현된 여신의 빛나는 모습은 그야말로 숭고하고 아름다웠다.

그는 지금껏 성당을 찾아본 적이 없었다. 지나가는 길목에 작은 예배당을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실내 창문에 유리 예술의 향연이 펼쳐져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간 자신의 배움이 얼마나 짧고, 경험이 없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넋을 잃고 황홀한 눈으로 성당의 유리창을 바라보는 막스의 태도가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루시엘은 웃으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어때요?”

“유리가 이렇게 훌륭한 예술이 될 수도 있다니 제가 만든 것은 어린아이의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 것만 같네요.”

루시엘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영역이 달랐고, 접하지 못했던 것뿐이니까. 그리고 지금 이렇게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행운인가요. 이제 저 예술을 얼마나 막스 씨의 것으로 만들어 오느냐가 관건일 거예요.”

“예? 하지만…….”

막막해진 막스의 표정이 흐려졌다.

“말씀대로 스테인드글라스는 건축 기법이라, 유리공예와는 영역이 아예 다릅니다.”

“생각의 전환이라는 게 있잖아요. 저렇게 크게 만든다면 건축 기법이지만, 우리는 작게 만들어서 유리공예품에 활용해 보는 거예요.”

“……!”

“분명히 전례 없는 공예품으로 주목받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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