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루시엘?”
문득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자 키제프는 덜컥 걱정이 들었다.
달칵, 문고리를 조심스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벅, 저벅.
캐노피가 달린 침대에 루시엘이 아기처럼 새근대며 잠들어 있었다.
‘피곤해서 잠들었나.’
곧장 테이블로 가서 하늘색 선물 상자를 놓은 키제프의 발치에 무언가가 툭 밟혔다.
“응?”
반짝이고 단단한 것이었다.
“보석?”
무척이나 아름답게 빛나는 에메랄드와 토파즈였다.
지난번에도 불의 제단에서 루시엘의 주변에 굴러다니는 보석을 주워 준 적이 있었다.
‘얘는 왜 이렇게 보석을 막 굴리는 거지?’
키제프는 여기저기 떨어진 보석들을 전부 주워서 루시엘의 옆에 쌓아 놓았다.
그에게 편지를 적어 보내던 루시엘은 소박하고 욕심이 없어 보였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사람은 욕심이 적당히 있는 것도 좋지.’
자신은 욕심이 없었으니까.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가져 버렸기 때문이겠지.
지난번 루시엘의 방에서 발견했던 종이에 적혀 있던 이름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개중에 아주 잘 아는 이름이 있었다.
막시무스 폰 카빌.
이렇게 여리고 착한 아이가 이름을 적어 둘 정도면…….
“널 괴롭게 하는 자라면…… 나도 가만두지 않아.”
꼭 쥔 주먹이 바르르 떨리고 고운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층 짙어진 붉은 눈동자가 가만히 잠든 루시엘의 얼굴을 오래도록 담다가 사라졌다.
연회장으로 돌아온 키제프는 공작에게 알렸다.
“루시엘이 고단했는지 잠들었습니다.”
“오늘은 푹 재우는 게 좋겠군. 선물을 주는 건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피로연이 열리기 전까지는 쉬도록.”
피로연은 공식적으로 벨슈타인이 초청한 외부 손님을 맞이하는 몇 안 되는 전통 행사였다.
하여, 제국 내에서도 그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귀족들이 무척 많았다. 무소불위의 벨슈타인이 대외적으로 문을 여는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피로연에서 뭘 하면 됩니까?”
“너희들은 잠시 얼굴만 비추면 될 거다. 대신 그 밖의 공식 일정들은 전부 생략해 주겠다.”
실상 결혼식 피로연은 구실일 뿐, 일정이 잡힌 외교적인 사업과 그간 막혀 있던 벨슈타인의 사교 입지를 살짝 숨 틔우는 행사가 될 것이다.
“꼭 초대하고 싶은 친구가 있습니다.”
키제프의 핏빛 눈이 공작의 것과 같은 서늘함을 띠었다. 루이비드는 그것이 기꺼워 눈썹을 까딱 치켜들었다.
“친구라……. 엘링턴에게 전하도록.”
제 아들의 입에서 썩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 * *
그 시각 북부 마탑.
에리카는 밤새 연구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벌써 이틀이나 밤을 지새웠다.
동료 마도사들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에리카 실베인, 지난번 연구 과제 끝났다고 하지 않았어?”
“예, 분명 다 끝냈다고 들었는데. 지난번에 길리아트 님의 호출로 벨슈타인 성에 불려 갔다 온 후로 쭉 저 상태예요.”
“……아니 마탑주님께선 자료 정리만 시킨다고 애를 데려가 놓고는, 도대체 얼마나 일을 시키신 거지?”
“가서 도와준다고 할까요?”
“츳, 아서라. 그러다가 너도 동반 철야 하게 될걸?”
“아이고, 그럼 그냥 모른 척해야겠습니다.”
마도사들은 혹여나 에리카의 연구실 방문이 열릴까,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지나던 에레스도 마도사들의 수군거림을 듣곤, 밥은 먹고 하는지 누나 걱정을 잠시 했다.
‘길리아트 님이 시킨 일은 분명 아닌데. 루시엘을 만난 후로누나가 바빠졌던가?’
에레스는 사과를 아그작 씹으면서 생각했다.
에리카는 무언가에 한 번 흥미를 가지면 아주 깊이 파고드는 성향이 있었다. 원하는 답을 얻을 때까지 말이다.
좋게 말하면 괴짜, 나쁘게 말하면 또라이였다.
저러고 있을 때는 그냥 거리를 두는 게 상책이었다.
“자기가 배고프면 알아서 먹겠지 뭐.”
과연 에레스의 예측대로 에리카는 흥분에 찬 눈으로 마력 관측기구에서 눈을 떼질 못했다.
관측기구의 바늘은 여전히 가장 높은 눈금을 가리키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어.”
에리카는 그동안 가치 높은 마정석들을 비롯해 여러 마력을 지닌 물건들에 대해 많이 연구해 왔다.
값비싼 고급 마법 스크롤을 바른 물건부터 보물 사냥꾼들이 고대의 던전에서 구했다는 아티팩트까지. 그러나 이처럼 높은 마력 수치를 낸 물건은 없었다.
그뿐인가.
이 영롱한 에메랄드는 무려 원소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핀셋으로 에메랄드를 집어 기계에 넣자, 거대한 플라스크 안에 넣은 종이들이 마구 흩날렸다.
바로 바람의 힘이었다.
에리카는 이 보석에 대해 더 많은 연구를 해 보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지만, 그래도 이걸 의뢰한 루시엘에게 보고는 해야 했다.
루시엘 아가씨가 어떤 경위로 이 보석을 얻으셨는지는 모르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자신할 수 있었다.
이 보석은 단순히 물질적인 가치를 떠나, 마법학적으로도 아주 귀한 보석이 될 것이다.
에리카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안고, 보석을 품속 깊이 넣었다. 당장 루시엘에게 보고를 위해 가려던 에리카는 문을 여는 순간 연구실 앞에서 그만 쿵, 쓰러지고 말았다.
“뭐, 뭐야! 누나!”
“에리카 실베인이 쓰러졌다!”
그 소릴 듣고 에레스와 다른 마도사들이 몰려와, 에리카를 침대로 옮기고 치료 마법사까지 불렀다.
아득히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도 에리카는 루시엘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 * *
루시엘은 반짝 눈을 떴다. 보석을 만드느라 기력이 다해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부스럭거리면서 몸을 일으키고 보니 베개 옆에 주머니가 있었다. 누군가 보석을 가지런히 주머니에 담아 놓은 것이다.
루시엘은 자못 불안해져서 손톱을 잘근 씹었다.
‘로즈나 베시가 다녀간 걸까? 혹시 내가 보석을 만드는 걸 본 건 아니겠지?’
입술을 잘근 깨물면서 주변을 휘휘 둘러보는데 문득 테이블 위에 놓인 하늘색 선물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선물이 또 있었네?”
루시엘은 침대에서 발을 내려 푹신한 슬리퍼를 신고 테이블로 다가갔다.
설레는 마음으로 상자를 열자, 안에는 보송보송한 하얀색 털로 만들어진 예쁜 모자가 들어 있었다.
꼭 아기들이나 쓰는 모자 같은데, 제법 귀여웠다.
루시엘은 거울 앞으로 가서 모자를 폭 뒤집어써 보았다.
푹신한 모자 아래에 삐입 소리 나는 방울이 달려서 귀여웠다.
가만 보니 상자 아래에 편지도 있었다. 키제프가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생일 축하해, 루시엘.’
루시엘이 살풋 미소 지었다.
루시엘은 모자를 벗고는 복도로 나가 보았다. 별궁으로 옮기기 전이니 키제프의 방도 아직은 동관에 있을 터였다.
복도를 몇 걸음 갔을까. 뜻밖에도 자신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키제프의 뒷모습이 기둥 옆으로 보였다.
키제프가 뒤돌자 루시엘은 자신도 모르게 발을 멈추곤 슥 벽 뒤로 숨어 버렸다. 그러나 슬리퍼의 발소리는 숨기지 못했다.
키제프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루시엘을 내려다보았다. 루시엘은 애써 어색함을 무마하며 말했다.
“모자랑 카드, 키제프가 준 거 맞지? 선물 고마워.”
“누가 봐도 네 거잖아. 보자마자 네 생각이 나더군.”
키제프가 픽 웃었다. 훤히 드러난 이마 아래 눈이 곱게 휘어졌다. 무표정일 때는 차가워 보이는데 웃으면 저 미소에 누구라도 사르르 녹아내릴 것 같았다.
루시엘은 괜스레 투덜거렸다.
“……아무리 봐도 아기들이나 쓰는 건데.”
“아기 맞지.”
“오늘부턴 이제 열 살인걸. 아기 아니야.”
루시엘의 뾰로통한 입술을 보면서 키제프의 붉은 눈동자에 이채가 돌면서 한 걸음 더 성큼 다가왔다. 보드라운 은발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듯 쓰다듬는 손길에 루시엘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눈만 끔벅거렸다.
‘뭐야, 이거. 왜 이렇게 몽실몽실 기분 좋고 간지럽지?’
루시엘은 자신이 무언가 잘못되는 기분이 들어서 머리카락에서 그의 손길을 털어 내듯 흔들었다. 잠시 무언가에 홀렸던 것처럼 키제프가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아, 미안 나도 모르게. 너무 부드러워 보여서.”
“괘, 괜찮아. 다들 내 머리 자주 쓰다듬으시니까, 엣헴.”
루시엘이 수줍은 걸 감추려 기침하는 체했다. 키제프가 불쑥 다가오며 물었다.
“나 한 번만 더 쓰다듬어 봐도 돼?”
“……어? 아, 아니. 좋아!”
얼굴이 빨개진 루시엘이 오락가락 대답하자 키제프가 쿡쿡 웃었다. 나른한 미소 뒤로 키제프의 긴 팔이 쭉 뻗더니 루시엘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살랑거리는 긴 머리카락에서 상큼한 꽃향기가 폴폴 풍겼다. 정말로 털이 복슬복슬한 새하얀 눈토끼를 쓰다듬는 느낌이 들었다.
달콤하고 포슬포슬한 촉감이 손에 감겨 왔다. 키제프의 뾰족하던 눈매가 나른하게 휘어졌다.
‘포실포실 귀여워. 더 만졌다간 화내려나? 또 쓰다듬고 싶…….’
그런 생각을 억누르고 손길을 거두었다. 귓불이 빨개진 줄도 모르고 키제프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턱을 괴었다.
루시엘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제 됐어?”
키제프가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내 머릿결 진짜 마음에 드나 봐.’
루시엘은 왠지 모르게 뿌듯해졌다. 시아빠와 할아버지, 다른 어른들도 곧잘 루시엘의 머리를 쓰다듬곤 했다.
조금 이상한 건, 키제프가 쓰다듬을 때는 심장 한구석이 간질간질하면서 굉장히 쑥스러운 기분이 든다는 거였다.
키제프가 고개를 살짝 틀더니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덕분에 오뚝한 콧날이 돋보였다. 콧대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루시엘, 넌 보석을 좋아하지?”
키제프의 ‘보석’이라는 말에 루시엘은 순간 얼음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