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미리 빌려 온 루퍼스 자작의 마차 안에서 세 사람은 스타일 체인지 마법으로 바꾸었던 머리 색을 원래대로 돌려놓고, 분장에 가까운 화장으로 덮은 얼굴 거죽도 벗어 던졌다.
“잘 참으셨습니다.”
“뭘?”
“너구리 사냥, 오늘 할 수도 있었잖습니까.”
“엘링턴.”
“예?”
옆에는 덩치 큰 기사단장이, 건너편에는 긴 다리의 공작이 앉은 탓에 가장 체구가 마르고 작은 엘링턴은 비좁음을 참으며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차가운 눈빛이었다.
“아직은 삐쩍 마른 늙은 너구리에 지나지 않지. 때를 기다리겠다.”
“제 생각에도 다른 속내가 더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보아하니, 돈 되는 일은 다 건드리는 것 같기도 하고……. 생각보다 그리 복잡한 위인은 아닌 것 같지 않습니까?”
엘링턴이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고 자르가 단장도 보고했다.
“……하지만 천장에 암살자를 배치해 놓고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그 점이 약간 걸리더군. 목적을 위해 참는 듯 보였다.”
“목적, 그러게 말입니다. 대체 뭘 노리는 걸까요.”
사실 따지자면 노릴 것이 너무도 많아 그 방비를 단단히 해 두었다.
벨슈타인에는 귀한 보물, 그 가치를 쉬이 가늠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았지만 세간에 알려진 것은 없었다. 그러나 막연히, 어마어마한 부가 축적되어 있다는 것은 알겠지.
성에는 수많은 실드와 검은 날개가 있었다. 도둑이 들어도 금고에 도달하기도 전에 시체가 될 터였다.
고작 불법 사업가 나부랭이 따위가 감히 넘볼 가문은 아닌데, 공작도 그 점이 의심스러웠다.
카빌은 벨슈타인을 노릴 만한 힘도, 돈도, 병력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런 큰 뜻을 품을 만한 그릇도 되지 않는 인간이었다.
공작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그보다는 더 간단한 이유일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이 벨슈타인 안에 있다.
후작은 부귀를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인간이었다.
“엘링턴, 미안하지만 성에 귀환하는 대로 후작의 지난 행적 좀 조사해 오도록. 검토를 해 봐야겠다.”
“지난 행적이라면 어느 정도까지 말입니까?”
“……가능한 부분까지 전부.”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지난번 풀어 준 오르비아 백작가의 유모 말이다.”
“아…… 아가 마님의 유모였던 볼라디라는 부인 말입니까.”
“그래. 혹시 모르니 그 여자의 행적도 같이 조사하도록 해.”
“하지만 그 여자는 백작의 죄에 대해서 전부 털어놓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당시엔 백작의 죄를 알아내면 끝이었으니 풀어 주었지만……. 무언가 미심쩍군.”
공작의 눈이 날카롭게 어딘가를 응시했다.
“알아보겠습니다.”
엘링턴이 통신구를 열어 통신을 시작했다.
* * *
공작의 집무실에서 나와 어딘가로 걸어가던 엘링턴의 뒤를 루시엘이 살금살금 뒤쫓아 갔다.
지난번에 길리아트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걸었던 장난이 생각났지만 아무래도 키 차이 때문에 도저히 칠 수 없었다.
“엘링턴!”
루시엘이 쏙 고개를 내밀자 엘링턴이 뒤를 돌았다. 그런데 오늘 그의 행색이 어쩐지 이상했다.
어울리지 않는 긴 튜닉을 입고 있었고, 얼굴에는 살색의 무언가가 달라붙어 있었다.
게다가 땀을 많이 흘린 모양이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아, 잠시 일 처리를 위해 외부에 다녀왔습니다.”
“일 처리요?”
“예, 불법 고리대금업자를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그자에 대해서 면밀히 조사를 해 봐야 할 것 같거든요.”
루시엘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탁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불법과 돈 하면 루시엘의 머릿속에 각인된 인물은 카빌 후작이었다.
“저한테도 알려 주세요.”
잠시 망설이던 엘링턴이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그래서 차림이 그랬구나.”
엘링턴이 머리를 긁적였다.
“예, 하하.”
“카빌 후작을 속이고 미끼를 던진 것까지 훌륭한 작전이네요.”
“공작 각하의 의견이었습니다.”
“역시 우리 시아빠세요.”
감탄하면서 루시엘은 진홍색 눈동자를 잠시 굴렸다.
카빌 후작이 벨슈타인의 정보를 얻으려고 움직였다. 그는 돈과 가치 있는 물건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사람이었다.
그런 카빌 후작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아마도 자신.
그는 과거부터 크리스털 페어리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길리아트 할아버지를 만난 경매소에서도 루시엘의 눈이 반짝이자, 자세히 보려고 한 적도 있었다.
‘틀림없어. 크리스털 페어리가 보석안을 가졌다는 걸 아는 거야. 그래서…….’
루시엘은 지난번 수도 의상실에서 페넬로페와 마주쳤던 걸 떠올렸다.
페넬로페도, 후작 부인도 루시엘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대해서 전달했다면.
앞으로도 그는 계속 접근해 올지 몰랐다. 어쩌면 다른 방식으로도 계속…….
“아가 마님. 저는 이만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응. 이야기 들려줘서 고마워요.”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이전 생에서 알게 된 카빌 후작의 비리와 부패한 사업들에 대해서 차근히 정리해 보는 것이다.
잠시 머리가 복잡해졌지만 한번 해 보기로 했다.
후작가에서 겪은 그 기억들이 루시엘의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들었다.
“합.”
하마터면 분노에 휩쓸려 루비를 생성할 뻔했다. 루시엘은 서둘러 방으로 총총 돌아갔다.
* * *
짧은 아카데미 생활만큼이나 키제프의 기숙사 방은 딱히 물건을 정리할 것도 없었다.
대신에 편지가 가득 들어 있는 상자가 두 개나 나왔다.
공작가에서 사용인들이 와서 도련님을 차질 없이 모셔 가기 위해 대신 정리를 마쳤고, 소지품은 마차로 옮겨졌다.
이제 더는 입을 필요도 없는 교복 대신에 공작가 도련님에 어울리는 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그는 한결 고아한 귀족 같았다.
키제프는 아카데미 내의 카페테리아에서 동급생들, 대부분 여자아이들의 작별 인사를 받아 주었다.
여름 방학이 아직 한 달이나 더 남았는데 덜컥 아카데미를 그만둔다니, 그의 얼굴을 보는 게 낙이었던 학생들은 아쉽고도 슬퍼했다.
“아쉽다. 그럼 이제 마지막이구나.”
“가지 마. 키제프가 가면 우리 아카데미는 이제 어떡하라고. 흑흑.”
“…….”
“아카데미는 대체 왜 그만두는 거야?”
“맞아. 왜 그만두는 거야?”
아이들의 질문 세례에 키제프는 찻잔을 코스터 위에 딸깍 내려놓고 말했다.
“결혼해.”
“……뭐, 뭐라고?”
“이건 꿈일 거야.”
“누군데? 호, 혹시 황녀님은 아니겠지?”
“아, 그나마 황녀님이라면 납득 가능.”
단체로 충격에 빠진 여자아이들이 머리를 쥐어뜯고는 상대를 예측했다.
키제프는 아이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건조한 붉은 눈동자를 다른 아이들이 먹고 있던 달콤한 디저트로 옮겼다.
루시엘이 사다 달라고 했던 디저트를 빠짐없이 구했는데, 아직 그거만 구하지 못했다.
몽글몽글하고 부드러운 솜사탕.
그때 사 준 솜사탕은 조금 평범했으니까, 이번에는 특별한 걸 주고 싶었다.
모레가 바로 결혼이기도 하고, 생일이기도 하니까.
“너희들 혹시 조금 특별한 솜사탕 파는 곳 알아?”
안내해 주겠다는 아이들의 도움을 거절하고, 키제프는 아카데미의 선생과 교장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나왔다.
“언제든지 돌아와라, 언제든지.”
아쉬움이 묻어 나오는 교장의 말을 흘려버리고, 키제프는 벨슈타인가의 마차에 느긋하게 올라탔다.
이동 마법을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마차에 실은 물건과 따로 이동해야 하므로, 게이트를 사용하기로 했다.
특히 수도에는 게이트를 탈 수 있는 곳이 세 군데 있어서 불편함이 크게 없었다.
마차에 쌓아 놓은 수도의 명물 디저트들, 그리고 분홍색 리본이 달린 하늘색 상자를 기분 좋게 바라보면서 키제프는 마부에게 솜사탕 가게로 가 달라고 명했다.
하늘색 차양이 달린 하얀 건물에는 정원 테라스에 테이블이 나와 있었다.
그리고 키제프의 시선을 잡아끈 것이 있었다.
“찾았다.”
루시엘이 저걸 보면 함박웃음을 짓겠다 싶을 만한 것이었다.
* * *
어느새 늦은 저녁.
루시엘은 기억력을 총동원해서 카빌 후작의 죄를 짜내느라 골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아까는 에바가 권하는 세스 주방장의 특별 간식까지 거절하고 몰두했다.
카빌 후작가가 벌인 일들은 참 많기도 많았다.
어느새 노트에 빼곡하게 채워진 범죄 행각들을 보며, 그것들이 언제 일어났는지 시기도 생각해 보기로 했다.
“……머리 아프다.”
하지만 시기까지 정확히 기억한다는 건 힘든 일이었다. 어떤 건 잘 생각나는가 하면, 일부는 죽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답답해.’
그러고 보니 카빌 후작뿐 아니라, 막시무스와 페넬로페가 상처를 주었던 일들도 떠올랐다.
아카데미에서 막시무스를 만났을 때 마법을 할 줄 알았더라면 더 제대로 혼내 주는 건데…….
그땐 너무 경황이 없었다. 루시엘은 저도 모르게 옷자락을 움켜쥐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파아앗!
심장으로 모여든 마나가 반짝이는 루비를 만들어 냈다. 루시엘은 노트를 한 장 쭉 찢은 다음, 거기에 이름을 차곡차곡 적기 시작했다.
「힐다 볼라디.
라스파드 폰 오르비아.
막시무스 폰 카빌.
페넬로페 폰 카빌.
이아로스 폰 카빌.
레이놀드 데 세이블 헨드릭.」
그리고 옆에는 루시엘이 아는 가장 끔찍하고 더러운 욕을 적었다.
바퀴벌레 똥이라고.
하지만 이내 누가 볼까 무서워서 종이를 꾸겨 버렸다.
그러곤 뒤늦게 꼬로록 대는 배꼽시계에 놀라 방문을 열었다. 늦은 저녁이라 간식을 먹어도 될지 베시에게 허락을 받아야지 했는데.
복도에는 베시가 보이지 않았다.
루시엘은 슬리퍼를 신고, 뾱뾱 걸어가 보았다.
아마도 쉬러 간 모양이었다.
“응?”
루시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덕분에 양 갈래로 묶은 머리가 기울어졌다.
“저게 뭘까.”
아래층에서 커다랗고 몽실몽실한 무언가가 조금씩,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마치 분홍색의 커다란 구름을 뭉쳐 놓은 듯했다. 길쭉한 귀가 달려 있는 거로 봐서는 토끼 모양 구름이었다.
“인형? 아니, 아니다.”
잠시 추리하던 루시엘이 고개를 붕 저었다. 이내 그것이 뭔지 깨달은 루시엘은 달콤한 눈이 되고 말았다.
“솜사탕이네.”
사람 크기의 왕 토끼 솜사탕.
이런 건 정말 처음 봤다. 보기만 해도 신기해서 웃음이 포실포실 났다.
루시엘은 솜사탕 뒤에 숨어 있는 상대를 눈치채곤 픽 웃으면서 살살 뜯었다.
달콤한 딸기 향이 폴폴 나는 것이 입안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렸다. 이내 솜사탕 옆으로 키제프의 말간 얼굴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