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눈사슴이 그렇게 영리한 동물이었나? 무언가 이상했다.
루이비드가 문고리를 돌려, 방 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허공에 촉촉하게 내리는 눈송이와 함께 놀란 눈사슴이 그를 경계하며 루시엘의 침대로 달아났다.
저벅.
루이비드가 한 발짝 다가가며 눈썹을 치켜세우며 중얼거렸다.
“……마법?”
루시엘이 방으로 들어오자 사슴이 곧장 콩콩 뛰면서 달려가 안겼다.
“어라, 시아빠. 여기 계셨었어요? 저 왈츠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루시엘. 이 사슴, 눈이 내리는 마법을 쓰는 걸 봤다.”
“아, 맞아요. 오늘 아침에도 방에 눈송이가 날렸는데. 착각이 아니었구나.”
루시엘도 아까를 떠올리며 말했다.
“다 나으면 설원으로 보내려고 했는데…….”
루이비드의 말에 사슴이 안절부절못하며 루시엘의 곁을 빙빙 돌더니 뺨을 할짝 핥았다.
“아무래도 이 눈사슴은 너와 같이 있고 싶은가 본데.”
루시엘의 자그만 손이 사슴의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눈사슴은 맑고 투명한 눈망울로 루시엘을 올려다보았다.
“설원으로 돌려보내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조금 더 지켜보도록 하자. 아니면 사슴을 위해서 공간을 하나 마련해 주어도 좋겠군. 어차피 네 영지도 준비 중이니까 그곳에 말이다.”
“좋아요. 감사해요, 시아빠.”
그렇지 않아도 언젠가 헤어질 생각에 아쉬웠는데 잘된 일이었다. 루시엘이 기뻐하며 눈사슴의 목을 폭 껴안았다.
“정말 나랑 있고 싶니?”
루시엘이 묻자 사슴이 맑은 눈망울을 빛냈다. 이윽고 허공에 눈송이가 흩날렸다.
“와, 너 대단하다. 나도 못 하는 걸 다 하고…….”
“진짜 마법을 하는군. 그나저나 사슴이 널 유난히 따르는 걸 보니 이놈도 귀여운 건 아는 모양이지.”
루이비드가 입꼬릴 말아 올리더니 이내 루시엘의 방을 유유히 떠났다. 루시엘은 떠나는 그의 뒷모습에 대고 꾸벅 인사했다.
“나중에 봬요.”
“오냐.”
그의 대답이 들려왔다. 예전보다 시아빠를 대하는 게 한결 편해졌다.
* * *
“소문에 의하면 벨슈타인 측에서 프란델 호수 옆 동굴의 소유권을 사들인 후, 무언가를 채굴하고 있다고 합니다.”
“……뭐라고?”
믿을 만한 정보 조직원에게서 나온 말에 카빌 후작은 골이 띵해지고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크게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이 가시지 않아 얼얼했다.
프란델 호수라면 카빌 후작이 자금을 모아 관광 사업을 황실에 제안하여, 진행하려고 벼르던 곳이었다.
천혜 자연이 펼쳐진 호수 옆에 자리한 크루즈형 카지노. 그곳에서 대귀족들의 유희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품격 높은 관광 사업을 하고 싶은 것이 그의 노년을 위한 소망 중 하나였다.
“프란델 호수는 제도에서 멀긴 하지만 관광지로 제법 유명한 곳이 아닌가.”
“자세히 따지자면 호수가 아니라, 호수 옆 커다란 동굴이랍니다. 잘은 모르지만 황실과 거래를 했다고 하더군요. 황실 측에서는 쓸모없는 동굴 하나를 넘겨주고, 더 가치 있는 걸 얻었다며 아주 만족하는 눈치더랍니다.”
카빌 후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예부터 벨슈타인은 수도와는 큰 교류도 없으면서 황제와의 옛 친분 하나만으로 여러 사업을 추진하곤 했다. 얄미웠다.
자신은 사업 하나를 제안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는데 말이다.
게다가 작년 겨울 밀수 사업 하나가 재수 없게 황성 감찰대에 걸려 1년간 근신 처분을 받아 황궁 출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위 귀족이라면 응당 다들 하는 사업인 것을, 작년에는 참으로 운이 안 좋았다.
하여, 여러 대신에게 갖은 뇌물까지 바쳤지만 이런 정보 하나 물어다 주는 귀족 하나가 없었다. 영양가를 따지자면 눈앞의 조직원이 그들보다 배의 가치는 있었다.
근신이 풀리더라도 이 조직원과의 거래는 계속할 생각이 있을 정도로.
그러나 카빌 후작은 내색하지 않았다.
“……대체 거기에 뭐가 묻혀 있기에 벨슈타인이 그렇게까지 나서는 거지?”
“그것까지는 저도 잘……. 경비가 워낙 삼엄한 걸 보면, 꽤나 귀한 것이 아닐까 추측되고 있습니다.”
‘금광이라도 묻혀 있나? 아니면 마정석……?’
어느 쪽이든 벨슈타인이 무언가를 선점하게 된다면 그로서는 입맛이 무척 쓸 것 같았다.
“황실에서 벨슈타인에게 무얼 받았는지도 알아봐 주게. 벨슈타인이 뭘 채굴하는지도 알아봐 주면 더 좋고…….”
“알겠습니다, 후작님. 대금은…….”
“마차로 건네겠다.”
“예, 늘 감사합니다.”
조직원이 사라지자, 카빌 후작은 거뭇해진 눈가를 꾹 눌렀다. 잠시 제쳐 두었던 일이 떠올랐다. 제 딸 페넬로페가 그랬지.
‘그러고 보니 그 아이도 눈이 무척이나 반짝거렸어요. 마치 루비처럼.’
그 후로 그 의상실을 감시하고 정보를 캐내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엉뚱하게도 벨리타 후작가가 그 아이에 대한 소문을 흘렸고, 소유한 선박이 폭격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누구도 그것이 벨슈타인이 벌인 일이라고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그렇게 강한 마법사를 둘 정도의 가문은 많지 않았다.
하마터면 카빌 후작가가 소유하고 있는 건물이 그 배처럼 폭격 맞을 수도 있었다.
그걸 생각하면, 그 역시 간담이 서늘해지긴 했다.
‘벨슈타인 공작이 그 아이를 여간 아끼는 모양이지. 설마 그 아이가 진짜 크리스털 페어리라서?’
“이거, 생각보다 더 건드리기 까다롭겠어. 하지만 아예 길이 없는 건 아니지. 귀한 물건이니 확인부터 해야겠구나.”
카빌 후작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장부를 뒤적여 귀족 서너 명의 이름을 확인했다.
벨슈타인의 가신들이었다.
벨슈타인에도 지점을 두길 잘했다. 그는 다른 이의 명의를 사서 불법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었다.
벨슈타인 공작령 안에서는 고리대금업은 불법이었고, 가신들은 벨슈타인의 재무 부서에서 관리하는 은행을 통해 자산을 투명하게 밝힌다고 들었다.
그러나 딴 주머니를 차지 않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돈이라는 것은 모름지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쓰임과 이동이 잦은 법…….
주군 모르게 급한 자금이 필요했던 벨슈타인의 일부 휘하 가신이 그의 돈을 빌려다 쓴 모양이었다.
카빌 후작은 재정을 담당하는 수하 빌푸를 불렀다.
“여기 일부 고객에게 서신을 보내라. 특별히 대상으로 지정된 분께만 상환 이자의 절반을 면제해 드릴 테니 꼭 참석해 달라고 말이다.”
그렇게 접근한 자리에서 두둑한 자금과 함께 후일을 도모하자면서 벨슈타인 내부의 정보를 달라고 거래를 요청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다들 거절하겠지만 슬금슬금 돈을 찔러 넣어 주고, 넘어오지 않는 이들에겐 주군 모르게 불법 비자금을 마련한 것을 공작에게 밝히겠다고 도리어 협박을 하면 된다.
‘들통나서 공작의 귀에 들어갈 때쯤 유령처럼 사라지면 그만.’
어차피 그의 고리대금업은 실체는 없는 개인 금융 사기업이었다. 건물도, 직원도, 그날 하루만 빌릴 터였다.
카빌 후작이 까끌까끌한 수염을 매만지면서 미소를 삼켰다.
그것이 후작이 짜 놓은 계획이었다. 지금 당장은 자신이 손해였지만, 크리스털 페어리만 제 손안에 들어온다면 얼마든 투자할 가치가 있었다.
* * *
“오셨습니까, 아가 마님.”
“네, 좋은 아침이에요.”
장서관지기의 반가운 인사에 루시엘도 기분 좋게 들어섰다.
“저기, 사서님. 한 가지 여쭐 것이 있어요.”
루시엘이 책상 앞에 와서 발돋움을 하면서 물었다. 한참 책을 정돈하던 그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잠시 손길을 멈추고는 말했다.
“베론이라고 편히 부르시지요.”
“아, 베론.”
나무로 만든 안경을 낀 그는 왜소한 체격에도 불구하고, 장서관 일만큼은 항상 혼자서 해내는 것 같았다.
“혹시 장서관에 보석에 관련된 책도 있나요?”
“물론입니다. 보석에 대해 궁금하십니까요?”
“네.”
“그렇다면 책보다는 직접 보시는 게 더 좋으실 터인데.”
“직접요? 아, 보석상이 있는 거리로 나가면 되겠어요.”
루시엘은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지, 하고 중얼거렸다. 베론이 허허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뇨, 돌아가셔서 시녀장이나 다른 어른에게 보석을 보고 싶다고 하시면, 흔쾌히 창고를 개방해 주실 겁니다.”
“……!”
그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부유한 벨슈타인이니 보석이 종류별로 다 있을 것이라는 걸 말이다.
그렇게 해서 루시엘은 가장 먼저 만난 집안의 어른에게 말해 보기로 했다. 마침 오늘 신문을 읽으러 이벨린이 장서관으로 들어왔고, 베론이 루시엘 대신 말해 주었다.
그러자 이벨린의 푸른 눈동자가 반짝거리더니, 루시엘의 손을 붙잡았다.
“보석을 보고 싶다니,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구나. 루시엘.”
“……네엣?”
그녀는 잔뜩 흥분한 얼굴로 속사포처럼 말했다.
“보석 창고로 당장 가자꾸나. 실은…… 네게 계속 보여 주고 싶었는데, 길리아트 그이가 하도 네가 이런 걸 부담스러워한다고 해서 참고 있었거든. 하지만 역시 반짝이는 것은 설렌단 말이지. 루시엘, 너도 보석이 좋은 게지?”
“…….”
루시엘은 이벨린 할머니의 질문에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약간의 오해가 생긴 것 같지만, 보석을 싫어하진 않으니까.
아니,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퐁퐁퐁.
오팔처럼 빛나는 우윳빛 대리석 분수와 분홍빛 장미가 가득 핀 근사한 중정을 통과하자, 이벨린은 슬쩍 뒤로 돌았다.
“루시엘, 저쪽 별채가 벨슈타인의 금고들이란다.”
“별채 건물 전부 다요?”
“그래, 나중에 차차 알게 될 거란다.”
루시엘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이벨린은 금고 관리를 솔리아페와 루시엘에게도 넘겨 함께할 생각에 들떠 있었다.
가문이 부강한 만큼 관리할 금고와 내부 살림살이, 보물도 많았기에 그녀 혼자서 감당하는 게 따분하기도 했고 며느리와 손주 며느리까지 모여 오순도순 살림하는 재미를 느껴 보고 싶기도 했다.
얼마쯤 갔을까.
천사상이 양쪽으로 놓여 있어서, 마치 여기부터 천국이 시작될 것만 같은 입구에 다다랐다.
“자, 여기가 천사궁이야. 첫 번째 날개 열쇠를 사용한단다.”
이벨린이 열쇠 꾸러미 중에서 가장 첫 번째 열쇠를 꺼내 들었다.
천사의 한쪽 날개 모양으로 조각된 은색 열쇠였다.
하지만 열쇠로 열 문이 없는데, 라고 루시엘이 생각하기가 무섭게 열쇠에서 한 줄기의 하얀빛이 전방으로 이어졌다.
그 기다란 빛줄기의 끝 지점, 그러니까 스무 발자국 정도 더 갔을 때 철로 된 문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