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루시엘이 수줍게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말했다.
“다음에 보여 드릴게요.”
“그래. 허허, 허허허.”
‘이렇게 단시간에 지팡이를 성장시키다니 놀라워. 게다가 지팡이에 다른 여러 가지 힘을 담고 싶다라. 그게 뭔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히는군.’
길리아트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흡족한 얼굴이 되었다.
그의 대견하다는 눈빛에 루시엘은 괜히 쑥스러워 당근 가방을 열어 딸기 사탕 몇 개를 꺼냈다. 그러곤 두 사람에게 다가가 조막만 한 손바닥 위에 놓인 사탕을 내밀었다.
“할아버지, 에리카. 혹시 사탕 드실래요?”
길리아트가 먼저 사탕을 집어서는 껍질을 홀랑 까서 입안에 넣었다.
길리아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주 맛있구나. 이게 바로 소문의 그 유명한 딸기 사탕이로군.”
“할아버지이, 쉿.”
루시엘이 살짝 신호를 주자, 길리아트가 알았다는 듯 입술을 다물었다.
에리카도 사탕을 하나 집어 들었다.
“잘 먹을게요, 루시엘 아가씨. 이건 동생 줘야겠어요.”
새로운 정보를 입수했다.
‘에리카에게 동생이 있었구나.’
몰랐던 사실이었다. 동생도 같이 챙겨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시엘도 언니가 있었더라면 꼭 챙겼을 것이다. 맛있는 건 나누어 먹는 게 좋으니까.
“잠깐만요.”
루시엘이 가방을 열더니 탈탈 털었다. 잘 포장된 사탕이 몇 알 더 떨어졌다.
“나 사탕 부자예요. 이거 다 줄게요.”
에리카가 얼굴을 붉히며 사탕을 가져갔다.
“마음씨도 착하셔라. 잘 갖다 줄게요, 루시엘 아가씨.”
“그럼 저는 돌아가 볼게요. 할아버지, 저 가요! 에리카, 나중에 만나요!”
루시엘이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는 돌아갔다. 에리카에게도 좋은 인상을 남긴 모양인지 그녀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은 루시엘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길리아트는 내심 손주 며느리가 자랑스러웠는지 집무실에서 제 연구 서류를 넘겨받아 보던 에리카를 슬쩍 떠보았다.
“우리 루시엘. 귀엽지 않으냐?”
“네? 아아…… 네.”
“요즘 내 일상의 낙이 되어 주는 아이다.”
루시엘 생각에 싱글벙글하는 길리아트의 낯선 모습에 에리카는 슬쩍 웃음이 나왔다.
마탑의 다른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모습이었다.
그의 심정이 이해가 가긴 했다.
처음 만난 루시엘이라는 꼬마 아가씨는 정말 귀여우면서도 아이답지 않게 똘똘해 보였다.
“그 아이, 지금 내 밑에서 마법을 배우고 있다.”
“……저, 정말입니까? 그럼 정식 제자로 키우고 계시는 건가요?”
“아직은 비공식이다만.”
그 말은 정식 제자로 받아들일 마음이 있다는 거였다.
그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마법만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
마탑에도 정식으로 소개를 하고, 마법사 협회의 일원으로 등록해 마법사로 활동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간 벨슈타인의 행보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그럴 일은 없었다.
벨슈타인 공작과 벨슈타인 공자도 마법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마법사 협회는커녕 마탑에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건 차치하고서라도 에리카가 궁금한 건 한 가지였다.
루시엘 아가씨의 어떤 점이 길리아트 님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그는 제자를 들인 적이 없었다. 황실의 부름도 거절할 정도라 마탑의 수많은 마법사들도 그의 제자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을 정도였다.
그런 길리아트의 선택을 받은 아이라는 건 의미가 남달랐다. 그만큼 특별하다는 거겠지. 에리카는 루시엘의 놀랄 만치 투명하던 눈동자를 떠올렸다.
“눈이 정말 보석처럼 빛나더라고요.”
“눈동자처럼 아주 맑고 순수한 마나를 가지고 있단다. 장차 미래가 기대되는 아이지.”
“……길리아트 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라면 얼마나 큰 가능성을 가지고 계신 건지 짐작이 가지 않네요.”
칭찬에 박한 줄로만 알았더니, 이제 보니 손주 며느리에게는 무른 분인 모양이었다.
“아, 에리카. 한 가지 부탁이 있다. 자료 정리가 끝나는 대로, 마탑에 있는 에레스를 불러다 주겠니?”
“에레스를 무슨 일로 찾으시나요?”
에리카가 입술을 톡톡 두드리면서 물었다.
“루시엘의 마법 실력을 테스트하려고 한다.”
길리아트의 부탁에 에리카는 자못 놀랐다. 제 동생 에레스는 마탑에서 가장 서클이 낮고 어린 나이이긴 했지만 루시엘은 그보다 한참 어렸고, 마법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루시엘 아가씨와 에레스를요?”
“그래. 기왕이면 너도 같이 도와주면 좋겠지만.”
어린아이의 마법 테스트 하나에 마법사와 마도사 두 명을 투입시키려고 하셨구나.
에리카는 속으로 살짝 놀랐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자료 정리를 끝내고 에레스를 데려오도록 할게요. 저도 필요하시면 불러 주세요. 하지만 저는 에레스보다 마법 실력은 못하다는 거 아시잖아요.”
“음, 그래. 아무래도 두 명까지는 과하겠지. 아무튼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자신도 루시엘이라는 아이에게 호기심과 호감이 생겼다.
우유처럼 뽀얀 소녀는 토끼처럼 정말 사랑스러운 외양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에리카는 귀여운 것에 사족을 못 쓰는 편이었다. 남동생인 에레스도 얼굴은 귀여웠지만, 하는 행동이나 말투는 귀여움의 범주를 벗어났다.
하지만 루시엘 아가씨는 달랐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따스하게 비춰 준달까…….
상냥한 마음씨는 또 어떻고, 단풍잎처럼 자그만 손으로 사탕을 내밀 때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에리카는 가방에 달린 자그만 솜인형을 움켜쥐면서 조용히 웃었다.
‘그래. 꼭 이렇게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인형 같으셨어. 조그맣고 귀여운!’
첫 만남이었지만 에리카는 다음에도 루시엘을 또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아가 마님!”
길리아트의 서재에서 돌아오는 루시엘을 보며, 에바가 얼른 아는 체를 했다.
“에바?”
“어디 계시나 했어요.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신가요?”
에리카도 만났고 오늘 루시엘은 기분이 좋았다. 잠깐 달콤한 간식을 먹거나, 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며 휴식을 가져 볼까 생각하던 중이었다.
“네, 지금은 마침 한가해요.”
“다행이네요. 항상 바빠 보이셨는데.”
에바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루시엘은 혹시 평범한 아이답지 않게 너무 바지런히 움직였나 싶어 살짝 가슴을 졸였다.
에바는 루시엘의 손에 커다란 사탕을 쥐여 주더니 말했다.
“아가 마님께선 왈츠를 추실 줄 아시나요?”
뜻밖의 물음에 루시엘은 고개를 저었다. 어렸을 적 재미 삼아서 언니와 춤을 춘 적은 있어도 제대로 배워 본 적은 없었다.
후작가의 연회 자리에서조차 루시엘은 무시를 받았다.
‘루시엘 같은 백치가 춤을 출 수 있을 리가 없지.’
‘가르쳐 준 적도 없으면서…….’
춤뿐만이 아니었다.
체스를 두는 법도, 피아노를 치는 법도, 노래를 부르는 법도 몰랐다.
루시엘은 어느새 정말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백치가 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받는 교육이나 문화를 접해 보지 못하고 살았다. 예법은 눈치로 익히긴 했지만.
그래서 루시엘에게 무언가를 배운다는 건 항상 설렘을 주는 일이었다.
“그럼 저에게 왈츠를 배워 보시겠어요?”
“제가 왈츠를요?”
루시엘은 토끼처럼 눈이 동그래져선 에바를 올려다보았다. 에바는 평소에도 몸가짐이 무척 곧고 가지런했는데 춤을 추면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춤을 추면 어떤 기분일까, 재밌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루시엘은 대답했다.
“좋아요.”
“네, 길게 시간을 뺏진 않을게요. 곧 두 분의 결혼식이 있지요? 어린 부부들은 서약의 키스 대신에 왈츠를 함께 춘답니다.”
‘결혼식을 위해서 미리 알려 주려는 거였구나.’
하긴 결혼식 당일에 춤출 줄 몰라서 곤란해질지도 몰랐다. 귀족들은 으레 기본적인 사교댄스는 익혀 두니까, 미리 배려해 준 에바가 고마웠다.
“고마워요, 에바.”
루시엘이 양 볼을 물들이며 말하자 에바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 잘 추지는 않지만 잘 부탁드려요, 아가 마님.”
“저도요.”
언제 도착한 것인지 뒤에서 느긋한 얼굴로 나타난 솔리아페가 말을 거들었다.
“에바의 댄스 솜씨는 장담하지. 아주 정석적으로 추어서 조금 재미는 없겠지만.”
“앗, 솔리아페 님!”
루시엘이 놀라서 뒤돌았다. 한결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모습에 루시엘은 왠지 안도가 되었다.
“실은 마님이랑 종종 왈츠를 연습하곤 했었어요.”
“앗, 그랬구나.”
“지금도 춤이 서툰 편이시지요.”
에바가 장난스레 말했다.
무척이나 의외의 사실이었다. 높은 귀족들은 전부 댄스에 능한 줄 알았는데.
“난 춤이 진짜 싫었거든. 드레스랑 구두를 신고 춰야 하니까. 그럴 시간에 검술 연습을 하는 게 좋았단다.”
그녀의 인간적인 모습에 루시엘은 왠지 친근하게 느껴졌다.
“저도 마법 연습이 더 좋지만 춤도 재밌을 것 같아요.”
“나보단 낫구나.”
솔리아페가 루시엘의 보슬보슬한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웃고는 소파로 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냥 앉은 것뿐인데도 길쭉하고 늘씬한 몸매가 드러났다.
“내가 박자를 맞추어 줄 테니까, 시작해 봐.”
“자, 우선 자세부터 정해야 해요.”
그렇게 응접실에서 댄스 실습이 벌어졌고, 지나가던 로즈와 베시도, 공작가의 다른 사용인들도 하나둘 모여 루시엘의 첫 왈츠 연습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먼발치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왈츠 연습을 하고 있던 루시엘과 솔리아페를 보면서 루이비드는 입꼬릴 올렸다.
이렇게 평화로운 풍경이라니, 그 누구도 벨슈타인가에서 이런 날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터였다.
콩콩콩.
기민한 그는 곧 누군가의 기척을 알아차렸다. 고개를 들어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재빨리 올라갔다.
붉은 카펫 위로 작은 동물의 발자국이 보였다.
설원 위에 찍혀 있던 눈사슴의 발자국과 같은 것이었다.
루이비드가 벽에 붙어 복도를 살피자 눈사슴이 복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답답해 그러나?’
그러나 주변을 살피던 눈사슴은 이내 문이 열려 있던 루시엘의 방 안으로 다시 쏙 들어갔다. 곧이어 문도 달칵하고 닫혔다.
‘스스로 문을 닫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