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루시엘이 혼자 땅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공작은 아이들을 데리고, 사슴을 방목해 둔 곳으로 갔다.
사슴 방목장에는 여러 마리의 사슴들이 풀밭 위를 뛰놀고 있었다. 뿔이 달린 큰 사슴도, 등에 하얀 점이 예쁘게 난 사슴도 있었다.
공작이 조심스레 방목장에 직접 들어가자 자그만 아기 사슴 한 마리가 쪼르르 그의 뒤를 따라왔다.
다른 사슴들과는 털의 색깔부터가 달랐다. 새하얀 눈의 빛깔과 같은 색. 포슬포슬한 은빛 털이 신비로웠다.
“우아!”
“이 아이가 눈사슴이다. 루시엘이랑 똑같지 않으냐.”
사슴이 콩콩 뛰어오더니, 루시엘에게 안기듯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곤 루시엘의 볼을 할짝, 핥았다.
루시엘이 간지러워 한쪽 눈을 찡그렸다.
“딘짜 뉴나랑 똑가타.”
레오니마저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잘 놀던 것이 얼마 못 가고, 다시 다리를 절룩거렸다.
“치료 마법으로 응급 처치는 했지만 관절이 다친 것이라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더군.”
“사숨 다쳐써!”
“당분간 나을 때까지만 보살피다 다시 설원으로 돌려보낼 거다. 기후가 맞지 않아서 더워하는 것 같군.”
루이비드가 사슴에게 스노우 마법으로 눈을 뿌려 주었다. 아직도 파르르, 다리를 떠는 모습이 가여웠다. 루시엘이 말했다.
“시아빠, 이 눈사슴 제가 돌봐 주고 싶어요.”
“네가 말이냐.”
“네.”
“그리고 한 가지 더 소원이 있어요.”
“소원이라? 원하는 게 있나?”
루시엘은 제 조그만 손을 조물조물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봐라. 곧 네 생일도 있으니까 갖고 싶은 거라면 얼마든지.”
“저, 저도 그럼 아기 영지…… 를 내려 주세요. 레오니 것만큼 크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냥 헛간 하나만 있어도 좋을 것 같아요.”
루이비드와 솔리아페가 서로를 마주 보며 쿡 웃었다. 아까부터 내내 그의 눈치를 살살 보던 것이 아마 영지를 갖고 싶어서였던 모양이었다.
“알았다. 네 결혼식 이후, 적당히 아기 영지를 만들 땅을 검토해서 내려 주마.”
“감사합니다…… 시아빠.”
처음으로 물질적인 커다란 무언가를 요구해서 받았다는 생각에 루시엘은 부끄럽고, 또 부끄러워서 자꾸만 숨고 싶었다.
“그렇게 부끄러워할 건 또 뭐지?”
루시엘이 솔리아페의 스커트 자락 뒤로 숨었다.
그날 저녁 루시엘은 눈사슴을 온실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온실의 기후는 식물을 자라게 하는 온도로 맞춰져 있었기에, 눈사슴이 지내기엔 너무 더운 것 같았다.
눈사슴은 지쳐서 바닥 위에 다리를 접고, 앉아있었다.
그러니 피닉스의 장미의 생명력과 치유력이 필요했다.
“피닉스.”
루시엘이 와서 장미의 잎사귀를 매만지며, 피닉스를 불렀다.
―마나 주러 왔구나?
보자마자 마나 타령하는 피닉스에게 루시엘은 말없이 마나를 모아, 전해 주었다.
잎사귀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고맙구나.
“제 마나를 주었으니, 이제 생명력을 좀 나누어 주세요. 눈사슴이 다쳤어요.”
―눈사슴? 저 아이 말이냐?
“네, 마물에게 습격당했었다고 해요. 너무 가여워요.”
―나도 이제 나누어 줄 생명력이 없는데. 네 시어머니에게 전부 쏟아 주었거든.
“앗, 제 마나를 더 드려도 안 돼요?”
루시엘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그냥 네가 정성껏 간호를 해 주면 어떨까.
온실은 너무 더워서 눈사슴이 힘들 텐데, 루시엘은 낑낑거리면서 눈사슴을 안아 옮기려고 했지만 제법 무거웠다.
“……읏, 너무 무겁다. 조금만 기운 내 줄래? 여기서 있다간 너 쓰러져.”
그러나 사슴의 몸은 이미 축 늘어져 있었다.
루시엘은 중간에 겨우 만난 시종에게 부탁해서, 제 방으로 사슴을 옮겼다.
기운이 쪽 빠졌지만 차가운 물수건도 몸 위에 올려 주고, 다리에 헐거워진 붕대도 다시 정성껏 감아 주었다.
그러곤 사슴의 등을 살짝 쓰다듬었다.
“어서 나아. 내가 얼음 속성을 익혀서 널 시원하게 해 주면 좋을 텐데.”
루시엘이 슬리퍼를 벗고는, 침대 위로 올라갔다. 사슴의 까만 눈망울이 루시엘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이내 잠들었다.
* * *
짹짹짹.
아침에 일어난 루시엘은 제 등과 목에 시원하고 차가운 무언가가 느껴져 깜짝 놀랐다.
“……눈?!”
뒤돌아보자 하얀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당황한 루시엘이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나와 눈송이를 털어 냈다.
까만 눈망울을 또랑또랑 굴리던 눈사슴과 루시엘이 눈을 마주쳤다.
“너…… 이거 네가 한 거야?”
그러나 사슴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그저 다시 몸을 옆으로 뉘었다. 루시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슴이 마법을 할 리가 없지.’
그러고 보니 마탑에 가신 길리아트 할아버지는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으셨다.
‘할아버지, 언제 오실까…….’
루시엘은 발돋움을 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엇……?”
성의 입구에 공기를 찢는 파열음과 함께 초록빛의 이동포탈 마법진이 생성되고 있었다.
그 안에서 가장 먼저 느릿한 걸음으로 긴 금발에 망토를 휘날리는 사람이 걸어 나왔다.
“할아버지 오셨구나!”
곧장 달려 나가려던 루시엘은 잠깐 멈칫했다.
잠시 후 로브를 눌러쓴 호리호리한 인상의 사람이 내렸다.
“……누구지?”
푹 눌러쓴 로브 위로 푸른색 숄이 바람에 흔들렸다. 순간 바람이 강하게 불어 얼굴이 잠깐 드러났다.
푸른색 머리를 가진 여자였다.
‘저 푸른색 숄, 낯익어……. 저기에 문양이 있었는데. 그래, 구름 같은 문양이었어.’
그리고 입술에 점이 있었고, 손등에 문신이 있었다.
‘이제 가서 확인만 하면 돼.’
저 여자가 에리카가 맞는지.
“손님이 오셨으니까, 서재로 가시겠지!”
루시엘은 짧은 다리로 도다다 방을 빠져나와서 길리아트의 서재로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숨을 몰아쉬며 서재 근처 벽에 찰싹 달라붙어 매의 눈으로 두 사람이 오는지를 지켜보았다.
바짝 긴장한 루시엘이 옷자락을 쥔 채로 기다렸다. 한참 그들을 기다리는데, 누군가 루시엘을 불렀다.
“루시엘.”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무심코 루시엘이 슥 돌아보자, 미리 대 놓았던 손가락에 루시엘의 말랑한 뺨이 콕 찔렸다.
“아…….”
루시엘은 이런 아이 같은 장난을 누가 치나 올려다보았다.
그토록 기다리던 길리아트 할아버지가 장난스레 쳐다보고 있었다.
“할아버지이.”
“루시엘,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게냐.”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긴. 아, 인사하렴. 이쪽은 에리카 실베인이란다.”
루시엘은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입가의 점.
손등에 별 모양 문신.
‘드디어 찾았어!’
그녀의 고양이 같은 새초롬한 눈이 루시엘에게 향했다.
“반가워요.”
“저야말로 반가워요.”
루시엘이 그녀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에리카 님도 마법사이신가요?”
루시엘이 눈을 빛내면서 묻자, 에리카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마도사…….”
과거에는 황태자의 영향이었는지, 조금 음침하고 어두운 것 같다는 인상이었는데. 지금 마주한 어린 에리카는 그냥 조용하고 얌전한 아가씨였다.
겉보기로는 스무 살을 이제 갓 넘겼을까 싶은, 쌍꺼풀이 없는 눈이 매력적인 차분한 인상의 단발머리 아가씨.
“마도사는 마법사랑 달라요?”
루시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마도사는 일반 마법사와 달리 마법을 사용하기보단 연구하는 데 몰두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루시엘은 그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필요가 있었다.
그녀가 어떤 일을 하는지도 궁금했고.
길리아트는 자신의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꼈는지, 대신 답했다.
“마도사는 학문을 토대로 연구를 하거나, 새로운 마법을 개발 및 실험하고, 실생활에 응용하는 등 다양한 일을 맡고 있단다.”
길리아트는 에리카를 보면서 덧붙였다.
“에리카는 그중에서도 사물에 주문서의 힘을 불어넣는 마법에 대해 연구 중이지.”
루시엘의 귀가 쫑긋해졌다.
마법이 담긴 주문서라면 상당히 고가일 터. 연구비만 해도 엄청난 비용이 들 것이다.
주문서 대신 보석의 힘을 내가 사용하는 물건에 불어넣을 수 있다면?
그렇게 된다면 황태자의 마검처럼 지팡이나 액세서리에도 보석의 힘을 담을 수 있을지 몰랐다.
‘그 전에 보석에 어떤 힘이 얼마만큼 담겨 있는지를 알아야겠지. 그리고 보석의 힘을 무기에서 활용하기 위한 방법도 찾아야 해.’
그 일의 적임자는 눈앞의 에리카였다.
무엇보다 그녀가 하는 일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었다. 루시엘은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대단해. 에리카와 친해지고 싶다.’
루시엘은 입을 벌려 감탄했다.
“에리카는 엄청 흥미롭고 멋진 일을 하시네요. 언젠가 구경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요.”
“……아, 그건 조금 곤란해요. 아가씨.”
에리카의 말에 놀라 괜찮다 답하려는데 그녀가 설핏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게…… 저는 누가 보고 있으면 일에 집중을 못 하거든요.”
‘앗, 그런 이유였구나…….’
황태자의 사람일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순박한 구석이 있나 싶어 루시엘은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다.
“죄송해요.”
“아니에요. 방해가 되면 안 되니까요. 그냥 궁금해서 보고 싶었어요. 물건에 마법이 걸린다고 하니까 신기해서요.”
길리아트가 허허 웃으며 아이의 자그만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루시엘이 그런 분야에도 관심이 많았구나.”
문득 루시엘의 시선이 길리아트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로 향했다.
“할아버지. 그 이동 반지도 에리카 언니 같은 마도사들이 만든 물건이에요?”
“그렇단다.”
“우와. 그러면 저도 물건에 마법을 깃들게 하는 일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어요.”
“어째서냐? 이동 마법이 담긴 아이템이라면 내가 구해다 줄 수도 있는데.”
물론 궁극적으로는 강해지는 것이 맞지만 마법의 다양한 쓰임새는 알아 두면 유용할 것이 틀림없었다.
“물건에 마법의 힘을 실을 수 있다면, 그만큼 더 특별하고 가치 있는 물건으로 바꿀 수 있잖아요. 나만의 물건으로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물건에 하려고요.”
루시엘을 내려다보던 길리아트가 턱을 쓰다듬으면서 물었다.
“그렇지. 루시엘은 어떤 마법 물건을 만들고 싶으냐?”
“……음, 제가 정말 정말 좋아하는 물건은 이미 있어요. 거기에 여러 가지 힘을 담고 싶어요. 헤헤.”
“정말 정말 좋아하는 물건?”
루시엘이 맑은 눈망울을 빛내면서 이어 말했다.
“할아버지가 주신 지팡이요. 어느 순간 모양이 변하고 더 강해졌어요. 그 지팡이를 평생 아끼면서 쓰고 싶어요.”
루시엘이 생긋 웃으며 말하자 길리아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헛, 벌써 무기를 성장시켰단 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