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65)화 (65/282)

<65화>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벨슈타인의 장벽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죽는 끔찍한 미래를, 그걸 막고 싶어요.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하실지 몰라도요.”

솔리아페는 혼란스러웠다.

‘미래에 벨슈타인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죽는다니. 그리고 그걸 이 작은 아이가 막겠다고?’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는구나.”

“네, 혼란스러우실 거예요. 믿지 않으셔도 돼요. 분명한 건 제가 솔리아페 님을 도울 수 있다는 거예요. 도울 수 있게 해 주세요.”

“…….”

“보여 드릴 게 있어요.”

“보여 드릴 것?”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녀를 온실 정원으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루시엘이 오전에 돌보았던 피닉스의 장미 줄기가 한층 더 자라 넝쿨까지 뻗어 있었다.

“……이건 무엇이지?”

“피닉스의 장미라는 마법 식물이에요. 이벨린 님의 수면을 깨우기 위해 불의 제단에 있는 피닉스에게서 얻어 온 거예요.”

“마법 식물이라면 알아. 그토록 귀한 것이 여기 있다니…….”

루시엘이 솔리아페의 손등에 난 작은 상처를 가리켰다.

“피닉스의 장미 향을 맡아 보세요.”

솔리아페가 의아한 얼굴이었지만 곧 루시엘이 시키는 대로 장미의 향기를 맡았다.

진한 장미 내음이 그녀의 폐부로 들어오며 손등에 났던 상처가 사라졌다. 몸의 활기도 가득 채워져 가뿐해진 듯했다.

반면에 피닉스의 장미가 살짝 시들해지며,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시엘, 내 생명력을 다 주었더니…… 기운이 없어지는구나.

루시엘이 흠칫 놀랐지만, 개의치 않고 솔리아페에게 말했다.

“피닉스의 장미는 드래곤을 깨우는 힘 말고도 생명력을 채워 준다고 해요.”

“……신기하지만 내 병은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야. 고작 상처 따위가 아니야.”

“정확히 병명이 뭐예요?”

“마나리스. 체내를 도는 마나가 점점 말라서 사라지는 병이라더군. 결국 마나가 전부 사라지면, 혈액까지 말라 죽음에 이르지.”

“……무서운 병이네요.”

“그래, 의사가 내게 남았다고 말한 2년이 거의 다 되었단다. 난 가망이 없어.”

루시엘은 맥없이 말하는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아뇨. 방법이 있어요.”

루시엘은 속으로 생각했다.

피닉스가 어서 부활하기만 한다면, 솔리아페 님을 도울 수 있어.

‘내 손으로 그녀를 지킬 수 있어.’

“피닉스가 부활할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글쎄다. 나에게는 시간이 이제 별로 남아 있지 않은데.”

시간, 그래. 시간이 가장 문제였다. 최악은 피닉스가 부활하기 전에 그녀가 죽는 것이니까.

한시라도 빨리 피닉스의 부활을 도와야 해.

“루시엘, 오늘 네가 본 건…….”

“오늘 일은 모두에게는 비밀로 할게요…….”

“고맙다.”

“그렇지만 계속 피하기만 해서는 안 돼요. 시아빠께 진실을 이야기하는 게 가장 좋겠지만……. 그건 솔리아페 님의 몫이겠지요?”

“…….”

“아,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부탁?”

“저와 함께 의사에게 진료를 받아 주세요. 병세가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알아야 하니까요.”

피까지 토하는 걸 봐서는 꽤 진행이 된 것 같아 염려스러웠다.

한결 경계가 누그러진 그녀의 안색에 밝은 빛이 어렸다.

“그건 생각해 보지.”

루시엘이 고개를 붕붕 저으며, 조막만 한 손으로 솔리아페의 손을 꼬옥 잡았다.

“안 돼요. 저랑 손잡고 꼭 가셔야 해요. 아셨죠?”

루시엘이 제게 착 달라붙어 말했다. 낯선 경험에 솔리아페가 엉거주춤해졌다.

조그만 솜뭉치처럼 보드라운 감촉이 마음 한구석을 간지럽게 했다.

아이를 대놓고 끌어안기에는 쑥스러웠는지. 솔리아페가 한 손으로 루시엘의 등을 토닥거렸다.

루시엘은 그녀의 품을 느끼면서 말했다.

“어머님은 제가 지킬 거예요. 놓치지 않을 거라고요. 그러니까 제 손 놓지 말아 주세요.”

“……뭐?”

설원에 뛰노는 솜털 보송보송한 눈토끼처럼 자그맣고 하얀 아이가 자신을 지키겠다니, 문득 웃음이 나고 말았다.

“그런데 방금 나에게 어머님이라고 불렀니……?”

“앗, 급해서 저도 모르게 그만. 죄송해요, 솔리아페 님.”

루시엘이 실수한 척했지만, 실수가 아니었다. 왠지 모르게 벨슈타인가 사람들은 호칭에 민감한 편 같았으니까.

“아니다. 듣기 좋구나.”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루시엘은 헤헤 웃었다.

한참 웃고 있는 두 사람을 멀리서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어머님.”

“응?”

“저쪽에서 시아빠께서 보고 계세요. 계속 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에요.”

루시엘이 맞다는 걸 솔리아페 자신도 알고 있었다.

솔직하지 못한 자신 때문에 루이비드는 속이 타들어 가고 있는 터였다.

루시엘이 그녀를 떠밀었다.

“아무 말이라도 먼저 걸어 주세요.”

그러나 그녀는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한 발 내딛기만 하면 그와 가까워지는데도 그것이 두려웠다.

그러자 루시엘이 쪼르르 루이비드에게 달려가서 말했다.

“시아빠!”

“루시엘.”

말이 없어도 얼굴에 다 쓰여 있었다.

솔리아페는 괜찮은 것이냐고.

“어머님 괜찮아요. 가 보셔도 돼요.”

“알았다.”

“아, 시아빠!”

솔리아페에게 다가가려는 루이비드를 보고, 루시엘이 재빨리 불러서 무언가를 손에 쥐여 주었다.

그건 자그만 토끼풀이었다. 아주 흔하게 자라는 풀.

“부드럽게요. 아셨죠?”

루이비드가 픽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이 년 동안 얼어붙었던 마음을 녹이는 건, 사소하고 작은 것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루이비드는 토끼풀을 동그랗게 엮어서 꽃반지를 만들었다.

하얗고 둥근 반지를.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어느새 말간 낯빛의 제 아내가 다가와 있었다.

루이비드의 붉은 눈동자가 이내 커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왜 모든 연락을 차단했느냐고 원망도, 집착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너른 어깨로 오라며, 팔을 벌렸을 뿐이었다.

때로는 열 마디 쓸데없는 말보다 하나의 행동이 중요할 때도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루이비드의 품에 안긴 솔리아페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음미하듯이 한참 그의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공작은 성 밖에 있는 벤치로 아이들을 불렀다. 그는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낯빛이 밝았다.

그의 옆에 솔리아페가 우아한 목선을 드러낸 채, 자줏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손가락에는 토끼풀로 만들어진 풀꽃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화해를 제대로 하신 모양이야.’

두 사람은 아닌 척하면서도 은근히 시선을 부딪치고 있었다.

루시엘은 지켜보는 자신이 다 설렐 것만 같았다. 순간 두근거리는 마음을 간신히 참았다.

루시엘은 옆에 있는 레오니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두 분 정말 아름다우시다, 그치?”

“아부디, 엄마. 웅, 가티 잇눈 고 올만이야.”

공작이 두 아이에게 다가오더니 말했다.

“돌아오는 길에 선물을 사다 주기로 했었지.”

‘그 약속 기억하고 계셨구나.’

루이비드는 곧 맑게 갠 하늘 위로 스노우(Snow) 마법을 시전했다.

쾌청한 하늘 아래 눈이 사락사락 내리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봄에 보는 눈이라니. 근사해요!”

루시엘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하자, 솔리아페가 루시엘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눈 말구 눈싸람…….”

그러나 레오니가 원하는 것은 눈이 아니라, 눈사람인 모양이었다. 루이비드가 주머니에서 당근과 단추, 나뭇가지 등을 꺼내서 허공에 띄우곤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사르륵 쌓인 눈덩이에서 얼굴과 몸이 뭉쳐졌고, 팔다리와 코, 눈까지 날아와 붙었다. 마지막으로 기다란 당근 코까지 푹 꽂혔다.

“딘짜 눈싸람이다!”

뛸 듯이 기뻐하는 레오니를 보며 루이비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눈사람이 아장아장 걸으며 움직이기 시작하자, 레오니는 정신이 쏙 다 빠져서는 눈사람 친구와 눈싸움도 하고, 다른 눈사람도 만들면서 놀기 시작했다.

루시엘도 레오니의 닦달에 같이 눈사람을 만들기도 했다.

“근데 누나 선물은 안 주셔따.”

“루시엘의 것은 여기 있다.”

공작이 그럴 리 있겠냐는 듯, 루시엘에게 빨갛고 네모난 상자를 내밀었다. 루시엘의 선물이 궁금했는지 레오니가 다가와 힐끗거렸다.

“이고 몬데요?”

“종이접기 세트! 이게 요즘 영애들한테 유행이라고 로즈가 알려 줬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시아빠.”

루시엘은 나중에 로즈랑 베시와 함께 종이접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그리고 루시엘, 설원에서 너를 닮은 동물을 하나 데리고 왔는데.”

루이비드의 말에 솔리아페가 쿡 미소를 터트렸다.

“정말 루시엘이랑 닮았더구나.”

“보러 갈래요.”

“그래, 일단은 우리 소백작의 아기 영지에 있는 동물 목장에 두었다.”

공작의 말에 레오니가 빵빵하게 부푼 뺨을 하고는 신나서 폴짝 뛰었다.

“앗싸!”

“레오니, 네게 준 것은 아니니까 흥분하지 말고…….”

“녜.”

“아기 영지?”

“레오니가 동물을 좋아해서 미리 작위와 함께 아기 영지를 꾸려 주었다.”

“웅. 내 영지에 동물 목장이랑 우물도 이써. 다 내 맘대로야.”

‘공작가의 아들이라 그렇게 교육상 물려주신 거구나. 뭔가 멋진걸.’

단순히 감탄하던 루시엘은 문득 이거다 싶었다.

‘나에게도 조그만 땅이 있다면 보석을 마음껏 보관해 둘 수 있으려나?’

네 사람은 나들이용 마차를 타고 금세 레오니의 아기 영지에 다다랐다.

마치 마을의 명물처럼 아기 영지의 입구에는 자그만 푯말이 하나 있었다.

「레오니 최강 영지」

정말 단순하고 강렬한 이름이라, 루시엘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조랑말, 닭, 오리, 양, 사슴, 염소까지 제법 동물이 많이 있었다. 작지만 목축지도 있는 목장이었고 돌보는 청년도 여럿 있었다.

“안넝!”

레오니가 청년을 향해 손을 들었고, 청년도 친근하게 아이를 바라보며 영주님 어서 오십시오, 하면서 놀이하듯 말했다.

루시엘은 주변을 슥슥 둘러보았다. 곳곳에 벨슈타인의 병사들이 지나다녀서 치안은 좋아 보였다.

이 정도로 넓은 땅은 필요 없고, 정말 창고 하나만 들어갈 정도로 작은 곳이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루시엘은 시아빠가 아기 영지를 주신다고 하면 냉큼 대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