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62)화 (62/282)

<62화>

“얘 루시엘, 그 드레스가 예쁘긴 하지만 그래도 새로 맞추는 게 낫지 않겠니?”

“그 드레스가 가장 좋아요. 할머니가 처음으로 사 주신 드레스니까요.”

루시엘이 방긋 웃으면서 말하자 이벨린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으음. 루시엘이 정 그렇게 말한다면야…….”

휴, 살았다.

루시엘이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사랑해서 하는 결혼도 아닌데, 복잡한 절차는 생략하는 게 좋았다.

키제프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이혼이라는 끝이 정해져 있는 결혼이니까.

간단할수록 좋은데.

이벨린 할머니는 계약 결혼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시는 것 같지만.

때가 되면 알게 되시겠지.

루시엘은 힐끔 두 어른을 살피면서 고기 한 점을 입안에 쏙 넣었다. 사르르 녹는 맛에 루시엘은 꼭꼭 다 씹은 후에 다음 고기를 또 포크로 찍었다.

접시 위에 있던 고기가 다 사라지자, 이번엔 이벨린이 썰은 고기를 루시엘과 레오니, 솔리아페에게 나누어 주었다.

“너무 맛있어요. 저도 잘라 드릴게요.”

조그마한 손으로 썰어서 루시엘이 이벨린부터 솔리아페, 레오니까지 차례대로 고기를 배달했다.

작은 아이가 꼬물꼬물하면서도 제법 야무진 솜씨로 썬 고기를 다 같이 입안에 넣었다.

아까의 그 싸한 분위기는 사라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식사를 마친 후, 솔리아페가 루시엘에게 말했다.

“잠시 이야기 좀 하고 싶구나.”

루시엘은 무슨 이야기일까, 살짝 긴장되어 토끼 눈이 되고 말았다. 아이에게 겁을 주었나 싶어 솔리아페가 루시엘에게 말했다.

“겁먹을 것 없단다.”

“네.”

루시엘이 귀엽게 고개를 주억였다.

두 사람은 식당에서 가까운 테라스로 향했다. 부드러운 밀크티와 씁쓸한 홍차 한 잔이 티테이블에 차려졌다.

“레오니에게 이야기 들었단다. 착하고 잘 놀아주는 누나라고 아주 좋아하던걸. 고맙다. 레오니가 확실히 착하고 순해졌어. 그렇게 식사를 얌전히 하는 모습도 처음 봤고.”

“레오니가 잘 따라 주어서 제가 오히려 고마운걸요.”

“그 밖의 많은 일도 네가 해냈다고 들었어. 어머님의 수면을 깨운 것도, 키제프를 구한 것도. 영지를 위해서 한 일들도……. 고작 아홉 살짜리라고는 믿기지 않아.”

루시엘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어쨌든 고맙구나. 아직 너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말이지.”

자신이 없는 동안, 벨슈타인에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작은 아이.

‘이 아이라면 믿어도 좋을까?’

솔리아페의 푸른 눈동자가 루시엘을 빤히 응시했다.

“눈이 유독 빛나네. 보석이나 별같이.”

“……감사해요.”

“어머님이 네가 특별한 아이라고 말씀하시더구나. 왜 그런지 조금 알 것 같아.”

루시엘은 그저 배시시 미소로만 넘겼다. 어쩐지 자신의 속마음까지 꿰뚫어 보는 것만 같은 눈이었다.

‘어쩌면 나를 완전히 믿지 않으실지도 몰라.’

다른 가족들은 나를 믿지만, 솔리아페 님은 아직 아니다.

‘신뢰를 얻는 게 좋겠어. 그러려면 가까워져야겠지?’

루시엘은 밀크티를 홀짝이며 눈동자를 굴렸다.

어떻게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좋을까.

방으로 돌아온 루시엘은 창문으로 벨이 포로롱 날아서 들어와 있는 걸 발견했다.

“벨!”

―쀼엉.

먹이통에 들어 있던 벌레가 다 떨어져서 고민이 되었는데, 벨의 통통한 배를 보니 밥을 주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배 좀 봐. 귀여워. 키제프, 도대체 벨한테 벌레를 얼마나 먹인 거야?”

루시엘은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늘어졌다.

「그대는 이미 별이 되었다.」

편지를 펼친 루시엘은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는 아무것도 모를 텐데도 이미 ‘별’이 되었다고 말해 주었다.

단 한 문장이지만 마음을 도닥여 주는 위로였다.

비록 지금 당장 고백하지는 못하지만, 언젠가는 모든 걸 이야기해 주어야지.

‘내가 진짜로 너의 별이 되어 줄 테니까.’

루시엘은 깊은 마음을 털어 내고, 편지를 마저 읽었다.

「그 많은 디저트를 다 구하려면 시내를 종일 헤매야 할 것 같네. 디저트 사다 주면 뭐 해 줄 거야?

돌아갈 날이 머지않았군.

답장 대신 나에게 줄 대가를 생각할 것.」

짤막한 편지를 읽은 루시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자기가 먼저 디저트를 뭐 사 줄지 물어봤는데 대가가 있었어?’

무엇을 줄지는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다. 그보다 루시엘은 솔리아페에 대해서 생각했다.

벨슈타인이 무너질 때, 황태자는 공작을 포함한 모든 가족을 죽였었다.

‘그중에 공작 부인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없었어.’

황성에 있을 때도 벨슈타인 공작 부인에 대한 소문은 일절 없었다. 폐쇄적인 성향이 짙은 벨슈타인이라면 사교계를 애써 배제했을 수도 있지만…….

다른 가능성은 황태자가 벨슈타인을 치기 전에 공작 부인이 이미 성에서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최근에도 그녀는 이 년이나 성을 비우고 토벌대에 참가했다고 하니까…….

‘뭐가 없을까……. 중요한 무언가를 놓친 것 같아.’

루시엘은 애써 기억을 하기 위해서 괜스레 손가락을 주무르며, 머리를 굴렸다.

그때 불현듯이 떠올랐다.

키제프.

레오니.

그리고 벨슈타인 공작까지.

세간의 평가 중 세 사람의 공통점은 미쳤다는 것에 있었다.

그들을 전부 미치게 할 만한 인물은 솔리아페 한 사람뿐이다.

‘만약 공작 부인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거라면……?’

상상하기는 싫지만, 그녀의 죽음이나 실종 같은 일이 있었다면 세 사람을 모두 미치게 하고도 충분한 일이 아닐까?

루시엘은 그녀를 더욱 주의 깊게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화톳불에 모여 앉은 검은 날개의 기사들이 둘러앉아 몸을 녹이면서 육포를 씹고 있었다.

기사들과 따로 떨어진 채 자르가와 함께 앉아 있던 엘링턴은 고개를 저었다.

“각하께서 많이 늦으시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체온 보호 마법이 걸린 갑옷을 입었더라도 장시간 추위에 노출되면 효과는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내심 주군을 강제로라도 끌고 왔어야지 하는 무언의 압박을 자르가에게 보낸 거였지만, 자르가는 그만큼의 눈치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돌아오실 겁니다.”

자르가 단장은 문득 생각이 났는지 엘링턴에게 물었다.

“아가 마님 말입니다.”

“예.”

“도대체 어떤 분입니까? 듣기로는 아이답지 않게 영민하고 각하가 몹시 귀여워하신다던데.”

엘링턴은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자르가 이 양반도 참. 지난번 아가 마님의 친부인 오르비아 백작을 사로잡기 위해 함께 갔는데도 이렇게 남의 다리 긁는 소리나 하다니.

기사단 최고 둔치, 아니 세계 최강 둔치임은 인정해 주어야 했다.

“그 말 그대롭니다. 아이답지 않게 영민하시지만, 눈물 날 정도로 귀여우십니다. 보다 보면 무엇이든 다 해 주고 싶지요. 그러고 보니, 설원에서 눈사슴을 만나면 그림을 그려서 아가 마님께 드려야겠습니다.”

엘링턴이 해사하게 웃으면서 중얼거리자마자, 저 멀리서 검은 형체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각다각. 눈보라를 가르며, 주군의 흑마가 막사 앞에서 멈추었다. 말의 엉덩이에는 바르작거리는 여린 은빛 짐승 한 마리를 실은 채였다.

“각하! 돌아오셨습니까?”

엘링턴과 자르가 이하 기사단원들도 일제히 그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루이비드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고는 뒤에 실었던 작은 사슴도 내렸다.

“이건…… 눈사슴 아닙니까?”

“마물에게 쫓기고 있더군. 다리를 다친 것 같다.”

“저런…….”

“가엾습니다.”

눈사슴은 예로부터 신비로운 설원의 존재로 만나는 이에게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보기 드문 짐승이었다.

눈이 새하얗게 소복소복 쌓인 것처럼 부드러운 은빛의 털을 가진 것이 특징이었다.

다들 눈사슴을 본 건 처음인지 들떠 있었지만, 엘링턴은 조금 전 아가 마님께 그림 선물을 하려던 소망을 잃어버려 시무룩해졌다.

아무래도 그림이 진짜를 이길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 엘링턴의 마음도 모르고, 기사들은 난리가 났다.

“눈사슴은 행운의 상징인데…… 역시 각하는 최고십니다.”

“맞습니다. 분명히 벨슈타인의 번영을 가져올 신호이지 말입니다. 핫핫.”

“……시끄럽고 치료 좀 해 주어라.”

루이비드의 말에 치유 마법을 익힌 마법사가 나와 사슴의 다리를 치료해 주었다.

사슴이 커다란 검은 눈망울을 끔벅였다. 고통에 차 파르르 떨던 다리도 얌전해졌다. 그러더니 눈을 폭 감았다. 고통이 사라져 편안해진 모양이었다.

그사이 루이비드는 막사 안으로 들어가 외투를 벗어 던졌다. 마법 효과가 떨어지기 시작해 외투의 끝자락 일부가 얼어 버릴 정도로 매서운 날씨였다.

짐승 가죽을 깔아 놓은 간이침대 위로 몸을 누이려던 그는 문득 상자 안에 보관해 둔 통신구를 꺼내 보았다.

깜빡깜빡.

미세한 불빛에 얼른 받으려고 했으나, 이미 끊어진 후였다.

누구인지 상대는 모르지만 공작성에서 온 것이라면, 중요한 일이 있다는 증거였다.

그때 무언가를 느낀 루이비드는 늘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옷자락 밖으로 빼냈다.

이 년 동안 한 번도 빛나지 않았던 목걸이가 푸른색으로 빛이 났다.

“솔리아페……!”

목걸이를 확인한 루이비드의 눈이 잘게 떨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통신구를 켜서 솔리아페에게 통신을 시도했다. 역시나 연락은 되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추적 마법이 걸린 액세서리를 다시 착용했다는 건 솔리아페가 공작성으로 돌아와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드디어 제 아내를 찾게 되었다.

그는 조바심 가득한 얼굴로 추적 마법을 시도했다. 혹시 통신구를 가지고 설원에 나와 있을까 싶어 확인해 보았다.

아지랑이처럼 푸른빛을 머금은 마나가 삽시간에 멀리 퍼지더니, 이내 푸르고 가느다란 실이 되어 팽팽하게 당겨졌다.

설원에는 없는 듯했다.

그렇다면…….

‘역시 공작성으로 귀환한 것인가? 제발 성에 돌아와 있기라도 하기를.’

공작성까지의 거리라면, 추적 전용 마법진을 구동하면 거리가 닿을 것 같았다. 루이비드는 막사 밖으로 나가 마도사를 불러 모았다.

이내 결과를 확인한 루이비드가 입술을 끌어 올렸다.

“전원 성으로 귀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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