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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61)화 (61/282)

<61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 에바가 찾아와 시녀와 시종들을 배치해 주고는, 오랜만에 돌아온 마님에게 예우를 갖추며 무릎을 꿇었다.

“마님,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잘 돌아오셨어요.”

에바가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에바……. 많이 물러졌구나. 내가 떠날 때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더니.”

에바가 눈물을 슥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 눈물을 흘리면 마님이 떠나실 수 없었을 테니까요.”

솔리아페가 에바의 두 손을 잡았다. 시녀장과 공작 부인의 관계를 뛰어넘어 두 사람은 유대가 깊었다. 에바의 아버지의 목숨을 구해 준 일이 있던 터였다.

“마님, 남관은 새롭게 단장이 필요할 듯해요. 당분간은 동관이나 본관에서 지내시는 게 어떠세요?”

아들인 레오니와 지내거나, 남편인 루이비드와 지내거나, 선택하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솔리아페는 남관이 준비가 되면 혼자서 지내고 싶었다. 지금 그런 것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내가 보기엔 괜찮은데…… 설마 인테리어나 가구까지 싹 바꾸자는 건 아니겠지?”

일정이 더 걸리는 것을 꺼려 하는 솔리아페의 기색을 읽었는지, 에바가 말했다.

“제 맘이야 그러고 싶지만, 청소와 마님의 새로운 물건들을 챙겨 드리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할 거예요. 그리고 곧 기쁜 일이 있어서 그걸 준비해야 해요.”

“기쁜 일?”

에바는 이벨린 큰 마님이 얘기하시리라 믿고, 입술을 닫았다.

“차차 아시게 될 거예요. 자, 우선 큰 마님 명대로 오찬을 준비하러 가 보죠. 큰 주인님과 주인님 모두 안 계시지만요.”

영문을 모르겠지만 솔리아페는 얌전히 에바의 말에 따라 예전 드레스 중 입을 만한 것들을 골라서 동관으로 옮기라고 명했다.

“잠깐, 먼저 가 있도록 해. 곧 따라갈 테니.”

“예, 마님.”

에바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둘러 시종들에게 물건을 옮기라고 지시했다.

모두가 물러갔을 때 솔리아페는 깊숙한 서랍에 넣어 두었던 상자를 하나 열었다.

동그란 통신구와 루이비드가 선물했던 액세서리들이 있었다. 그중 장밋빛이 도는 금색 팔찌를 낀 후에 통신구를 켰다.

연결이 되지 않자 그녀는 바로 툭 하고 꺼 버렸다. 어차피 시찰을 나간 것이라면 그는 곧 돌아올 것이다.

각오하고 온 것이지만 아직 그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솔리아페는 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길어 봐야 이 년일 겁니다.’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의사가 말했던 2년이란 시간이 벌써 훌쩍 지나 버렸으니까.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처음 시한부라는 걸 알았을 때. 그때는 그저 도망치고만 싶었다.

죽더라도 검을 잡고, 이 손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며 살다가 어느 날 그렇게 조용히 죽고 싶었다.

몇 번 강한 마물이나 상대를 만나 죽을 뻔했지만 질긴 목숨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이제 와 돌이켜 보니 문득 가족들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 돌아왔다.

다시 떠나야 되겠지만.

솔리아페는 무거운 몸을 겨우 몸을 일으켰다. 몇 걸음만 더 가면, 제 아들이 기다릴 것이다.

힘겹게 한 걸음, 또 한 걸음 옮겼고 오랜만에 시녀들의 시중을 받아 단장을 마친 다음, 식당으로 들어섰다.

드레스를 얼마 만에 입어 보는지 무척이나 낯설었다. 식당에는 아이들이 먼저 도착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식탁 의자에 앉아있는 황금빛 밤톨 같은 아이의 머리가 보였다. 꿈에 그리던 제 아들이었다.

‘레오니!’

레오니의 옆에 앉은 은발의 여자아이도 보였다. 어제 마주친 그 아이였다.

루시엘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어제 남관에 들렀다가 마주쳤던 사람이었다.

벨슈타인 공작 부인, 솔리아페.

보라색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진주로 장식하고, 남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그녀는 어제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이벨린이 찻잔을 드는 손끝까지 여성스럽고 우아한 품새를 가지고 있다면, 솔리아페는 멋진 아우라를 풍겼다. 검을 잡는 사람 특유의 깔끔함이 몸에 배어 걸음걸이마저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껏 치장한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지만 표정이 왠지 모든 것에 초연하고 담담해 보였다.

그녀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으니 예를 표해야 했다.

루시엘은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원피스 자락을 사붓이 붙잡고 인사했다.

“벨슈타인 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루시엘이라고 해요.”

이채가 도는 푸른 눈동자가 은발의 소녀에게 머물렀다.

“……너는 어제 그. 시녀가 아니었구나. 실례를 저질렀군.”

“아니에요. 어제 저야말로 실례했어요.”

루시엘의 시선과 행동을 따라서 레오니가 뚱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엄마?”

석류알 같은 레오니의 눈동자가 몹시 커다래졌다. 느릿하게 아이의 모습을 눈에 담던 솔리아페가 다가오며 레오니를 꼭 끌어안았다.

떠나던 날 레오니의 모습조차 보지 않고 갔었다.

어린 아들의 얼굴을 보면 도저히 갈 수 없을 테니까. 독한 짓이었다.

솔리아페와 레오니, 두 모자의 포옹이 길어졌다. 레오니가 강아지처럼 엄마 품에 파고들며 물었다.

“엄마아…….”

“레오니, 미안해. 엄마가 너무 늦었다. 그치?”

솔리아페가 아이의 자그만 등을 토닥이며, 울음을 삼켰다.

레오니 앞에서만큼은 그녀는 검사가 아닌, 한 아이의 엄마로만 보였다.

“열 밤만 자고 온다고 했는데, 엄마가 너무 늦었다. 늦어서 미안해.”

그녀의 생각보다 아이는 더 의젓해져 있었다.

“갠차나. 일케 와쓰니까 댔어. 이제 나랑 이써. 계속 가치.”

기어코 포동포동한 볼살이 붉어지면서, 레오니의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시엘도 울컥해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이상하게 솔리아페의 너무나도 초연하고 담담한 얼굴이 슬퍼서 참을 수가 없었다.

“저…… 자, 잠시만 실례할게요.”

“……이런, 루시엘. 무슨 일이니?”

“……뉴나, 왜 구래?”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으며 두 모자가 묻자, 루시엘이 대충 얼버무렸다.

“어? 아니요, 잠시 용무가 급해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루시엘이 뛰쳐나가 급하게 식당 옆에 있는 작은 창고에 숨었다. 식재료를 보관해 두는 창고였기에 온갖 농작물이 가득 있었다.

양파가 가득 쌓인 바구니 옆에는 썰어 놓은 양파가 담긴 그릇도 있었다. 루시엘은 양파를 핑계 삼아 구슬 같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솔리아페의 사정을 잘 모르면서도, 두 사람의 애틋한 재회가 슬프고 가슴이 아팠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근데 왜 이렇게 슬픈 기분이 들지?’

오래전 떠나보낸 언니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도 함께 밀려들었다.

심장이 저릿하게 아프기까지 했다.

이윽고 루시엘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동시에, 마나가 모여들며 심장이 물결처럼 일렁거렸다.

허공에 푸른 사파이어가 맺혔다. 바다색의 아름다운 사파이어였다.

루시엘은 바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그림으로는 본 적이 있었다.

‘진짜 바다의 물빛은 아마 이런 색일 거야.’

루시엘이 자리로 돌아왔을 때는 이벨린이 도착해서인지 한결 분위기가 밝아져 있었다.

식탁에는 푸짐한 오리구이와 쇠고기 스테이크, 가리비찜, 부드러운 크림 스튜, 고소한 호밀빵들, 바질과 곁들여 나온 토마토 카프레제 샐러드, 레몬과 라임을 넣은 음료 같은 음식들이 가득히 차려져 있었다.

식기가 부딪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모두의 시선이 루시엘에게 쏠렸다.

이벨린이 부드럽게 눈을 휘면서 말했다.

“어서 와서 앉으렴, 루시엘. 마침 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단다. 공작 부인, 아니 네 시어머니께는 인사드렸니?”

“아, 넷.”

“네, 루시엘은 아까 제게 인사했어요. 나야말로 내 소개를 못 했구나.”

솔리아페가 입가에 잔미소를 담고는 티슈로 입가를 두드려 닦은 후 말했다.

“솔리아페 폰 벨슈타인이야. 사정이 있어 이제 성에 귀환했단다.”

“아, 네에.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제 상상보다 더 근사한 분이셔서 눈을 뗄 수가 없어요.”

루시엘이 양 뺨 가득 홍조를 담은 채 말하자 솔리아페의 푸른 눈이 아이를 가득 담았다.

“귀엽구나. 내 며늘아기는.”

“앗…… 네에. 잘 부탁드려요.”

루시엘은 시어머니 앞에서 며느리 소리를 들으니 왠지 모르게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긴장하고 있는 아이를 보며 입술을 끌어 올린 솔리아페가 스테이크를 썰어서 루시엘의 접시로 옮겨 주었다.

“많이 먹어.”

“네, 솔리아페 님도 많이 드세요. 이벨린 할머니도요. 레오니도!”

루시엘이 이쪽저쪽 살뜰히 챙기는 모습을 보며, 솔리아페가 속으로 생각했다.

‘어린아이치고 배려심이 깊구나.’

루시엘의 사정은 에바를 통해 대략 들었다.

루이비드와 저를 닮아서 무뚝뚝한 키제프에게 따뜻하고 화사한 반려가 되어 줄 듯해, 솔리아페도 루시엘이 마음에 들었다.

자연스레 루시엘을 향해 따듯한 눈빛을 보냈다. 어쩌면 자신이 죽고 나면, 키제프에게 루시엘이 있어서 괜찮을지도 모르지.

“얘, 솔리아페. 다음 달이면 루시엘이 열 살이 되고 바로 결혼식이 있을 예정이란다. 너도 바쁘지 않으면 도와줬으면 하는데…….”

이벨린의 말을 들은 솔리아페는 망설이다가 입술을 열었다.

“저는 그런 걸 잘 모르니 어머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는 게 좋겠어요.”

솔리아페가 머리를 짚으며 이야기하자, 이벨린의 고운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

“……전부 끝난 게 아니었어?”

“해산은 했지만 뒷정리가 조금 남았어요.”

“다른 이도 아니고, 네 아들 키제프의 결혼식인데 서운하구나.”

두 사람의 눈치를 살짝 보던 루시엘이 말했다.

“성인이 아니니 결혼식은 약식으로 하는 것이 아닌가요?”

“아무리 약식이라 해도, 챙길 것이 많단다. 루시엘.”

“저는 이미 준비가 다 되었는걸요. 크게 준비할 건 없으실 거예요. 그리고 베시랑 로즈도 있으니까…… 솔리아페 님을 신경 쓰이게 할 일은 별로 없을 거예요.”

루시엘의 말에 이벨린이 무슨 말인가 싶어 귀를 기울였다.

“……준비가 다 되었다니, 그게 무슨 말이니? 응?”

“할머니께서 세상에서 하나뿐인 다이아몬드 드레스를 사 주셨잖아요. 그걸 입고 할게요. 아직 한 번도 입어 보지 않아서 그걸 입어 볼 날만 기다리고 있는걸요.”

루시엘이 아이답게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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