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조금 전 질문을 던질 때 누군가를 떠올리지 않았니?”
속마음을 들킨 루시엘이 앗, 하고 수줍게 웃었다.
“시아빠가 생각나긴 했어요.”
“……흠흠. 역시 내가 그놈보다 더 약해 보이나?”
길리아트의 짓궂은 물음에 루시엘은 자그만 손을 마구 휘저었다.
“앗, 아뇨 아뇨. 그냥 제가 아는 분 중에 할아버지와 견줄 만한 분은 시아빠밖에 없어서요.”
“농담이다. 루시엘. 사실 루이비드와 제대로 붙어 본 적은 없다만, 녀석의 수준은 나를 능가한다.”
루시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길리아트 할아버지가 7서클의 대마법사이신데 그럼 그 이상이라는 걸까?
“서클 차이는 크지 않아도, 루이비드는 검술 실력까지 강하단다. 그야말로 미쳤지.”
“……앗. 조, 좋은 의미죠?”
“그럼 그럼.”
할아버지의 다소 거친 언사에 루시엘은 민망해하면서 웃었다.
“어쨌든 마탑을 관리하고 휘하에 있는 마법사들을 지휘하는 게 나의 역할이란다.”
루시엘은 시아빠가 왜 마법 실력을 공식적으로 드러내지 않는지 알 것 같았다.
“시아빠께서는 일거리가 늘어서 실력을 감추시는 거군요.”
“……그렇지. 가주 노릇을 하는 것만으로도 바쁘니, 마탑주까지 하기 싫겠지.”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가주에 비해서 마탑주가 훨씬 덜 바빠 보였다.
“뭐, 부탑주 녀석에게 나도 많은 걸 맡겨 두어서 사실 그리 바쁘지는 않다만 말이다. 핫핫하.”
사실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대외적으로 그는 골동품 수집이나 하러 다니는 한가한 인물로 알려져 있기도 했다.
길리아트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렇구나. 알면 알수록 신기해요.”
“음…… 다음에 한가할 적에는 마탑을 구경시켜 주마.”
“……정말요?”
“그럼 물론이란다. 우리 하나뿐인 손주 며느리.”
길리아트가 루시엘의 하얀 볼을 살짝 감쌌다. 예뻐서 어쩔 줄을 모르는 할아버지의 손길이 루시엘도 기뻤다.
‘정말 친할아버지 같아.’
그러고 보니, 길리아트에게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할아버지.”
“오냐.”
“본성의 남관은 누가 지내는 곳이에요?”
“……남관? 거긴 비어 있을 텐데.”
“앗, 그렇구나. 그럼 예전에는요?”
“공작 부인 솔리아페가 기거하던 곳이란다.”
“히익……. 저, 정말요?”
“음…… 왜 그러니, 루시엘?”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세상에, 나 그럼 시어머니가 될 분을 만났던 거였나 봐.’
실수한 것 같아서 루시엘은 자못 속으로 혼란스러워졌다.
아까 그녀를 마주쳤을 때 왜 기시감을 느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시아빠나 키제프를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어. 가족이어서. 벨슈타인가 사람이어서 그랬던 거구나.
루시엘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분이 비밀로 해 달라고 했으니, 일단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마조마했다. 한편으로는 염려도 되었다.
“아, 할아버지. 마탑에 다녀오시면 부탁이 하나 있어요.”
“부탁? 무슨 부탁 말이냐?”
루시엘이 그의 손을 조막만 한 두 손으로 꼬옥 잡고는 애원하듯 말간 눈망울을 또롱또롱 빛내며 부탁했다.
“텔레포트 마법을 알려 주세요.”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또 반한 길리아트가 말했다.
“오냐. 텔레포트든, 텔레포트 할아버지든 다 가르쳐 주마.”
“고맙습니다. 히히.”
길리아트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마법을 알려 주겠다며 허허 웃었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보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루시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시엘이 이 할애비에게 부탁을 다 하고 기분이 좋구나.”
“…….”
루시엘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웃어 보였다.
“그럼 다녀와서 보도록 하자, 루시엘.”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길리아트는 서둘러 손을 흔들고는 망토와 긴 백금발을 함께 펄럭이며 돌아섰다. 마탑주다운 뒷모습이었다.
할아버지가 제 부탁을 그렇게나 좋아하실 줄은 몰랐는데……. 루시엘은 눈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아…… 누군가에게 부탁을 한다는 건 그만큼 믿고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라서야.
내가 할아버지를 믿고 의지해서, 그래서 기분이 좋으신 거구나.
루시엘은 마음 한구석이 따듯해졌다. 또 보석을 만들 것만 같았다.
마탑에 가신 할아버지도, 공작님도 없는 조용한 아침.
원래 일정대로라면 오늘이 마법 테스트였지만 취소되었으니, 루시엘은 낮잠을 만끽하고 있었다.
깨우지 말라고 미리 이야길 해 두었기에 베시도, 로즈도 루시엘의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루시엘 아가 마님은 아기치고는 잠이 별로 없다며 평소 걱정하던 그들이었기에 푹 더 잘 자라고, 곰 인형 옆에 보송보송한 노란색 병아리 인형까지 함께 침대에 넣어 재워 주었다.
루시엘은 인형의 포근함을 느끼며 더욱 깊게 잠들었다. 볕을 차단하는 커튼 덕분에 꿈도 잔뜩 꾸었다.
꿈에서 루시엘은 강한 마법사가 되어 있었다. 속성을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나 발현해서 하고 싶은 마법을 전부 시원시원하게 사용했다.
꿈속의 루시엘은 파이어볼로 오르비아 백작의 머리카락과 수염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백작은 비명을 지르면서 집 안으로 도망갔고 덕분에 백작가도 활활 타올랐다.
강렬한 쾌감을 느끼며 백작을 뒤쫓아 가던 루시엘은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붙잡혔다. 검은색 장갑을 낀 손이었다. 상대를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저 검은색 장갑에 검은색 망토를 둘렀다는 것밖에는.
그 검은 장갑은 루시엘을 멈추게 한 뒤, 손톱을 딱 부딪쳤다. 그러자 백작이 감쪽같이 없어져 버렸다.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루시엘이 할 일을 대신 해 주었다. 검은색만 보여서 무서울 만한데도 이상하게 그렇지 않았다.
“……!”
루시엘은 흠칫 몸을 떨면서 눈을 떴다. 이상한 꿈이었다. 보이지 않는 힘이 자신 대신 오르비아 백작을 죽이는 복수를 해 주었다. 하지만 어쩐지 기분이 나쁘다거나 불길한 느낌은 아니었다.
언젠가 루시엘은 자신의 손으로 백작의 마지막을 보내 주려 했다. 그만큼 깊게 사무친 원한이 있었다.
오르비아 백작을 생각하자 마음속에서 불길이 확 이는 듯했다.
그 순간 루시엘의 심장으로 마나가 일렁이며 모여들었다.
또롱!
투명하고 붉게 반짝이는 보석이 허공에 맺혔다. 루시엘도 익히 아는 보석이었다.
바로 루비였다. 루비가 어떤 감정인지는 아주 잘 안다. 분노, 증오, 원망, 미움 같은 것들.
루시엘이 뼛속 깊이 새겨 넣었던 감정들. 울컥울컥 화를 치밀어 오르게 만드는 활화산처럼 폭발하는 감정이 루비를 만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루비가 가진 속성만큼은 알 것 같았다.
‘분노처럼 뜨거운 불이겠지.’
확실히 과거에 만든 것보다 보석이 더 빛나고 반짝거렸다. 보다 투명하고 순도가 높았다.
에메랄드는 과거에 몇 번 만들어 본 일이 없어서, 비교가 어려웠지만 루비는 많이 만들었기에 조금 더 알 수 있었다.
루비를 만들려면 분노나 화가 날 상황이 필요한데, 벨슈타인가에서는 그럴 일이 도무지 없었다.
루시엘은 풋 하고 웃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루비를 서랍장 보석 상자에 보관한 다음, 슬리퍼를 신고 테라스 밖으로 나갔다.
상쾌한 아침 공기가 달콤했다.
* * *
한편 루시엘이 아침을 맞이하는 사이, 성은 발칵 뒤집혔다.
기척을 잘 읽는 예민한 감각을 가진 이벨린이 남관에 몰래 도착한 솔리아페를 찾아왔던 터였다. 이벨린이 오랜만에 만난 며느리를 보고는 눈을 곱게 흘겼다.
소파에서 자유분방하게 위스키를 마시다가 잠든 솔리아페로서는 당황스러운 아침이었다.
“얘야. 왔으면 왔다고 기별이라도 해 주었어야지. 솔리아페,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이니?”
반가움과 놀람, 서운함이 공존하는 이벨린의 얼굴에 솔리아페도 잠시 놀랐으나 워낙에 표정 없는 그녀였기에 눈동자와 눈가가 잠시 떨린 정도였다.
“어머님. 수면기에서 언제 깨어나셨어요?”
그녀가 성을 떠날 적에는 분명 서탑에 잠들어 있던 이벨린이었다. 잠든 그녀에게는 이별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너야말로 언제 도착한 거니?”
“…….”
“…….”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하던 기류가 극에 달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솔리아페 쪽이었다.
“어제 늦은 밤에 돌아와서 인사드릴 겨를이 없었어요. 죄송합니다.”
“……그래도 그렇지. 나는 자느라 몰랐더라도 다른 식구들은 모두 네 소식을 궁금해했을 텐데. 에바에게라도 전했어야지. 이 먼지투성이에서 하루를 보냈단 말이야?”
물론 관리는 가끔 하고 있었지만 깔끔한 걸 좋아하는 이벨린의 눈에는 엉망진창으로 보였다.
애정이 섞인 잔소리라는 걸 알지만, 솔리아페는 자못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이 정도면 깨끗한걸요.”
무던히 대답하는 그녀를 두고 이벨린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 저었다.
“에이그, 털털해서 좋구나. 혹시나 해서 와 봤더니 정말 네가 와 있을 줄이야. 에바에게 바로 알려서 시녀를 배치하라고 해야겠구나. 몇 명이나 필요하니?”
시녀라……. 시녀 대신 수하가 익숙해진 요즘이라, 미처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몸단장은 스스로 간단히 처리했던 터였다.
“시녀는 한 명이면 되고, 나머지는 차라리 시종을 주세요. 제 말을 관리해 줄 아이랑 무기를 관리해 줄 아이로요.”
“알았다.”
그대로 돌아서려던 이벨린이 다시 한번 솔리아페를 보며 말했다. 무뚝뚝하긴 해도, 그 먼 여정 동안 고생했을 며느리에게 먼저 다가가서 안아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리아페.”
“네, 어머님.”
그러나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저를 대하는 눈빛에 거리감이 느껴졌다. 이벨린은 안아 줄 용기가 나지 않아 말로 대신했다.
“마물 토벌을 이 년 넘게 나가다니, 그 누구도 못 할 일이야. 고생했다.”
“……저 혼자서 한 것도 아니었어요. 좋아서 한 일이기도 하고요. 감사합니다. 그이는요?”
제 남편의 일을 제게 묻는 솔리아페를 보니, 이벨린은 안타까움에 한숨이 나왔다.
“부부끼리 그렇게 소원해서 어떻게 살려고? 먼저 연락해 보렴. 북부로 영지 시찰을 나갔단다.”
“네…….”
“애들은 안 궁금하고?”
“……어제 살짝 자는 모습 보고 왔어요. 지금 만나러 가려고요. 키제프는 아카데미에서 잘 지내고 있죠?”
“……그래, 유월이 되기 전에 돌아올 거란다. 시녀부터 보낼 테니 몸단장하고 나오렴. 다 같이 식사하자고 이를 테니까. 소개시켜 줄 얼굴도 있고 말이지.”
루시엘을 떠올리며, 이벨린이 밝게 말했다.